딱딱했던 마음이 숲으로 스며든다. 어림잡아도 한 아름 이상 되는 전나무 숲길, 초록빛 자연의 반란이 시작된 가을 하늘아래 천년고찰을 찾아 길 나선다. 이번 여행길은 문경 대승사를 시작으로 사면석불을 거쳐 정원이 아름다운 윤필암,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 전나무 숲길에서 만나는 묘적암을 잇는 가을 산행을 겸한 사찰 여행이다.

▲ 사불암에서 바라 본 윤필암 전경

▲ 대승사 주변 가을이 곱게 내려 앉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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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덕산 사불산 대승사 절집 마당 주차 : 경북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9-3 |
계절이 은은하게 숨어든 대승사
울창한 숲, 거친 바람이 살포시 들춰 낸 숨겨진 풍경 그리고 가을 그 깊고 진한 향기 속으로 빠져든다. 선종사찰 ‘대승사(大乘寺)’ 초입, 참 나를 찾고자 일주문 (一柱門)을 통과한다. 두 개의 굵은 기둥 위 맞배지붕의 위엄과 달리 편액은 좁고 가냘프다. ‘사불산 대승사(四佛山大乘寺)’ 1911년 이곳 주지였던 권상로(權相老 1879~1965) 작품이다.

▲ 대승사 일주문
계절이 은은하게 숨어든 숲길 장승처럼 우뚝 서 있는 일주문은 겉과 속이 다르다. 풍족하지 못한 절집 사정 때문일까? 사찰의 세 번째 또는 마지막 문으로 알려진 불이문(不二門) 편액이 일주문 뒤편에 걸려있었다. 뿐만 아니라 불이문(不二門)이 아니라 불이문(不貳門) 즉 二를 貳로 표기했는데 둘 다 ‘두 이’이지만 왜 二(두이), 가 아니라 貳(두이)라 했는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 주차장에서 바라 본 대승사 전경
번잡함은 사라지고 햇살과 단풍이 어우러진 그 계절의 절정에 미처 덜 여문 가을색감은 매우 유혹적이다. 세월 흔적을 고스란히 껴안고 사는 은행나무보다 더 오래 자리를 지켜온 탑의 모습일까? 아니면 다른 절간에서 잠깐 방문했다 눌러앉아 버린 걸까? 훼손의 정도가 심한 탑 1기가 묵묵히 자기만의 색을 내고 있다.

▲ 주차장에서 바라 본 은행나무와 1기의 훼손된 탑, 동물 모형 조각 1구
탑의 크기에 비해 깊게 조성한 감실을 보니 탑 그자체가 절간이요 법당이 아닌가? 청명한 하늘 아래로 비춘 햇살이 감실을 향하면 배시시 미소를 짓거나 턱을 당기고 눈을 살포시 뜬 부처의 자비로움이 신도의 눈과 마주쳤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그 감실의 주인은 지금 어디서 중생을 구제하기에 그토록 오랜 세월 자리를 비웠을까 그 소식이 궁금해졌다.

▲ 대승사 대웅전
절집 중심건물이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형식을 한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며, 화려한 꽃문살을 열고 보면 석가여래를 중심불로 모시고 협시불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특히 대웅전 중심불 뒤편으로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화려하고 장엄한 목각후불탱(국보 제321호)이 장식되어 있다.

▲ 대승사목각후불탱(국보 제321호)
목각후불탱은 아미타여래 설법모습으로 목각탱의 크기는 높이 4m, 너비 3m이고 11개의 판목으로 구성되었다. 본존불을 중심으로 8대 보살과 불제자 사천왕, 지물 등 25구를 조각하고 그 앞에 명패를 달았다.
사불산(912m) 공덕봉 허리춤 해발 600m 위치한 대승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며, 삼국유사 권3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 9년(587) 공덕봉(功德峰) 중턱 사면석불이 붉은 비단보자기에 싸여 떨어졌다는 소리를 듣고 왕이 찾아와 예배하고 바위 옆에 절을 만든 후 망명비구(亡名比丘: 이름과 행적을 알 수 없는 비구스님을 통칭해 부르는 말)에게 향화(香火)를 끊이지 않게 하게 하였다 한다.

▲ 대웅전 전경
대웅전 처마 매달린 풍경은 방문객의 마음을 송두리째 훔친다. 차분히 걸으며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평온한 마음은 두려움을 떨쳐내고 구도의 마음으로 길을 연다. 비록 묵직한 세월의 흔적은 화마로 잃어버렸다지만 조각 칼날을 통해 새겨진 목불탱을 만나면 마음을 절로 평화롭게 만들어주는데 부족함이 없다.
목각탱은 본래 영주 부석사(浮石寺) 소유였다. 고종 6년(1869) 화재로 불타 소실된 절을 다시 조성하면서 거의 폐찰로 있던 부석사 무량수전에 있던 목각탱을 옮겨 왔지만 몇 년 후 부석사에서 되돌려 줄 것을 요구하여 송사를 벌렸는데 상주대승사외사사승도등장, 상주사불산대승사승도등장, 도내상주사불산대승사제승등장, 완의 등 관련서류를 남겼는데 이 서류가 보물 제575-1,2,3,4,호이다. 부석사의 반환 요청에 대승사는 부석사 조사전 수리비용 250냥 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일단락되었다고 목각탱 하단에 기록하고 있다.  ▲ 대승사 노주석
1729년 작품인 노주석은 석등을 대신하여 세운 것으로 좌, 우 한 쌍이다. 야간 행사가 설법을 위해 불을 밝히는 일종의 관촉대로 절집에서는 대부분 석등을 세우는 반면 많지 않은 노주석이다.
사찰 대부분 임진왜란으로 전소되고 훗날 몇 번의 재건을 하였으나 대화재로 소실되어 오늘날 대승사는 옛 전각이 없지만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국보 제321호)을 비롯하여 많은 불교유적이 전해지고 있는 천년고찰임은 틀림없다.
대승사에서 장군수를 거쳐 사불석불을 향하다
1,400년 세월을 흔들림 없이 자리 잡은 사불석불
대승사에서 종각을 거쳐 산길로 접어든다. 첫 큰 바위에 “有無有(유무유)”바위를 만난다. ‘존재한다는 것은 허무한 것일 뿐’이란 의미라 한다. 산길을 걷다보니 고요함에 빠져든다. 대승사에서 사불암으로 향하는 길은 1km 정도이며, 대승사에서 600m 정도 산길을 따르다 보면 장군수 약수터에 도착한다. 장군수 약수터에서 윤필암까지 400m, 사불암까지 400m이다.

▲ 산길로 접어들기 전 되돌아 본 대승사 전경
숲 사이로 치솟은 바위를 올려다보며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숨이 조금 거칠어 질 즈음 사불암 입구에 도착한다. 단단한 암릉 그리고 삼면이 깍아지런 듯 수직절벽 위에서 기묘한 형상의 바위 하나가 툭 던져 놓은 듯 자리 잡고 있다. 바위 사면은 여래상을 새겼는데 동서면은 좌상, 남북은 입상을 새겼다하지만 막막함이 앞서간다.

▲ 사면석불을 절벽 방향으로 바라 본 전경

▲ 사면석불을 절벽에서 입구로 바라 본 전경
대승사 사불석불은 6~7세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대승사 사면석불은 삼국유사 기록처럼 현재 사불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러한 특이한 형태의 불상은 경주의 굴불사지사면석불과 예산화전리사면석불이 있다. 석불의 높이는 3.4m, 폭 2.3m에 이르며, 동과 서는 좌상, 남과 북은 입상의 형태를 띠고 있다. 또한 동쪽은 약사여래를, 서쪽은 아미타여래, 남쪽은 석가여래, 북쪽은 마륵여래를 새김으로서 부처님 눈으로 보이는 사방의 땅이 모두 불국토 임을 알려주는 상징이라 할 수 있다.”

▲ 사면석불에서 바라 본 묘적암 전경

▲ 사면석불에서 바라 본 아래 윤필암과 윗편 묘적암

▲ 사면석불에서 바라 본 윤필암
사면석불에 관해 당시 신라와 백제의 영토분쟁이 심했던 곳으로 신라 영토임을 표시하려 하였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산 능성 벼랑에 존재하는 사면석불이 심하게 훼손된 것은 전쟁으로 인한 훼손이 아니면 쉬이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다. 자연이 빚은 무한한 아름다움에 빠져본다. 금방이라도 내려서면 만날 것 같은 윤필암과 묘적암이 조망된다. 숲과 숲사이 작은 길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면 묘적암 초입 정과 끌로 바위에 불심을 새겼을 석공의 열정과 윤필암 꽃향기가 노송과 전나무 숲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듯하다.
윤필암(潤筆庵) 사불암에서 윤필암으로 내려서다
사불암에서 내려 윤필암 내려선다. 장군수까지 400m 되돌아 내려선 후 이번에는 곧장 산길을 따라 윤필암으로 향한다. 만추의 계절 가을바람이 살갗에 닿는가하면, 상큼한 피톤치드가 폐부 깊숙이 스며든다.

▲ 윤필암 전경. 왼편 윗쪽 사불전이다.
고려 우왕 6년(1380년) 각관(覺寬)비구가 창건한 윤필암은 사불전(四佛殿)으로 유명한 곳이다. 통도사 대웅전 법당과 경주 남산 칠불암에는 불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불상을 대신 할 대상이 그 앞에 있기 때문인데 이곳 윤필암 사불전에도 불상이 없다. 창 너머 올려다보면 사불암이 조망되기 때문이다.

▲ 윤필암에서 바라 본 사불암 전경

윤필암은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입적하자 승려 각관이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조성된 사찰이며, 1930년대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고 비구니선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데 그 이유에서일까? 절집 공간이 개인 정원을 걷는 듯 꽃길이 이어진다.
대승사묘적암마애불좌상
윤필암에서 대승사 묘적암으로 향하다 만난 마애불좌상





민중불교를 대변하는 마애불을 만나기 위해 윤필암에서 내려선 후 묘적암으로 향하는 길목 전나무 숲길을 앞두고 오른편으로 돌계단으로 오른다. 햇살이 찾아들기 좋은 위치에 태곳적부터 꼼짝없이 서 있던 수직암벽을 정과 망치로 다듬고 새긴 높이 6m, 고려시대 투박한 마애불 좌상을 마주한다.
묘적암(妙寂庵) 나옹선사가 출가하여 수행한 사찰 묘적암
전나무 숲길이 하늘을 뚫을 기세다. 햇빛한줌 허락하지 않는 숲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담장을 낮게 두른 건물 한 채를 만난다. 고려 말 나옹(懶翁)화상(1320-1376)이 출가, 득도한 곳으로 알려진 묘적암(妙寂庵)이다. 선덕여왕 15년(646) 부은(浮雲)거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묘적암은 단출한 절집이지만 나옹화상과 관련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나옹화상은 묘적암 뒤 뾰족 솟은 안장바위에 올라가 앉아 있었는데 이를 본 마을 농부들이 몰려와 안장바위를 훼손했는데 이후 수년 간 가뭄과 흉년이 들자 농부들은 나옹화상이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 다시 바위를 이어 놓고서야 가뭄과 흉년이 끝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해발 600고지 자리한 대승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이며, 신라 진평왕 9(587) 비단 보자기에 싸인 사면석불이 공덕봉 중턱 떨어지자 왕이 찾아와 예배하고 절을 창건한 후 대승사라 사액하였다 한다.
대승사 불교 문화재로 문경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국보 제321호), 문경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관계문서(보물 제575호), 문경 대승사 금동관음보살좌상(보물 제991호), 문경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제1634호), 대승사마애여래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39호), 대승사윤필암목조아미타여래좌상및지감(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00호), 문경대승사사면석불(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3호), 문경대승사노주석(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7호), 문경대승사묘적암나옹화상영정(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8호), 문경대승사명부전지장탱화(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45호)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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