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밀양] 표충사의 여름과 가을
표충사의 가을 풍경
바람이 불면 후드득 낙엽소리에 가슴은 덜컥 내려앉는다. 만추의 서정을 느끼려는 많은 인파가 앞서간 흔적 위 도토리 몇 알 용케도 살아남아 늣 가을 여행 친구삼아 길 따르고, 삼남금강 푸른 숲 산자락 발꿈치에 유독 풍경소리 낭랑한 사찰하나 자리 잡고 "無" 를 외치고 있다.
얼마나 많은 스님이 숲에서 자란 장작 위 연기되어 열반에 드시고, 계절의 길목을 지켜 왔을까. 한때는 1천여 명의 스님이 머물렀지만 그 세월도 잠깐이라 폐허가 되니 불심이 사라질 법도 하지만 광해군 2년(1610) 혜정이 중창하여 또다시 불심이 부흥을 꾀하지만 현종 연간에 이르러 또다시 폐사 지경에 이르니 영정사의 업보이련가. 신아 흥덕왕 4년(829) 서역승이 맑은 물을 이용해 환자를 고쳐주며 주민들이 뜻 모아 만든 영정사는 일년스님이 머물기도 하였지만 그 생명을 다하고 사라지는가 싶더니 현종5년(1839) 사명당의 법후손 월파스님이 예조의 승인을 받아 무안의 표충사를 옮겨 "표충사"라 부르니 오늘날 모습을 비로소 가지게 되었다.
표충사가 옮겨간 텅 빈 그 자리는 표충비만 남아 지금도 나라의 힘든 일이 생기면 땀을 흘리니 이것이 바로 사명대사의 영험한 예언이 아닐까 싶다. 무안은 표충사와 가까운 거리로 사명대사의 고향이다. 표충사는 유교서원과 불전이 공존하는 특이한 사찰이다. 표충사 경내에 자리한 표충서원에는 사명대사 유정, 서산대사 휴정, 기허대사 영규 세분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무열왕 원년(654) 원효대사가 창건 후 이름을 죽림사(竹林寺)라 불렀다. 흥덕왕 4년(829) 인도스님 황면선사가 석가여래 진신사리를 모시고 한반도를 유람하던 중 재약산 오색서운을 보고 삼층석탑을 세워 사리를 봉안하게 된다. 당시 홍덕왕의 셋째 왕자가 풍병으로 고생하며 영산약수를 찾던 중 죽림사에 머물게 되고 황면선사의 법력으로 병이 완쾌되자 왕이 사세를 확장하고 절 이름을 "영정사靈井寺"라 한다. 1592년(선조 25)임진왜란으로 사찰은 폐허로 변하자 현종5년 사명당 법후손 월파스님이 무안의 표충사를 표충서원으로 옮겨 임진왜란 당시 의승대장인 사명, 서산, 기허 세분을 모시면서 영정사는 "표충사"로 고쳐 부르게 된다.
표충사는 고려시대 일연선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탈고 하였으며, 충렬왕은 "과연 천하명산"이라 감탄하여 동방제일의 선찰이라 불렀다 한다.
대표적으로 전해지는 유물로서는 "사명대사금란가사와 장삼" ,"표충사 삼층석탑, "청동향은향완"이 있다. 표층사에 있는 고려시대 향로인 청동함은향완은 절에서 사용되는 향로로 청동향로에 무늬를 음각하고 그 음각 홈 속에 은사를 에워 장식한 은입사 기법으로 중국에서 발달한 기술이다. 1962년 12월20일 국보 제75호로 지정되어 있는 향로의 예술성은 당시 고려시대의 뛰어난 은입사기법을 대법하고 있다. 받침 안쪽을 살펴보면 원래 이 향완은 표충사가 아닌 창녕 용흉사로 기록되어져 표충사로 오게 된 전래는 알 길이 없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신라 석탑형식을 가진 표충사 삼층석탑은 기단은 단층이며 면석은 5매로 구성되고 우주와 탱주1주가 있어 각면을 2구로 구분하고 있으며 보물 제467호로 지정되어져 있다.
표충사에서 눈여겨 볼 것으로 사명대사 금란가사와 장삼이다. 황금색 단으로 된 승려의 법의로 사명대사가 입었던 옷이다. 중국 비단으로 가로 270cm, 세로 80cm 조(條) 넓이 3.5cm, 조와 조 사이 6.5cm이고 모두 28조이며, 장삼은 베로 만든 것으로 장삼 길이 144cm, 파장143cm, 뒤품 55cm, 진동 85cm, 수구 85cm, 깃 넓이 13.5cm, 안단 6.8cm, 곁바대 길이는 18.5cm, 곁바대 넓이 3cm, 끈 길이 18.5cm, 끈 넓이 2.5cm, 치마 1폭 넓이 34.5c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