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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양] 군자정

허영꺼멍 2010. 8. 17. 09:39

 

 

 

 

 

 

군자정은 쉽게 찾지 않는다. 주변에 많은 정자들로 인하여 작고 볼품없어 보이는 탓도 이유겠지만 정자에 딸린 작은 공간 정도로 이해할 정도로 화림계곡 정자 중에서 가장 작은 규모를 하고 있다.

 

군자정은 정여창 선생이 수양한곳으로 전세걸, 세택이 정여창 선생을 기리기 위해 1802년 정면3칸, 측면2칸으로 바위 위에 올라앉은 형상을 하고 조선시애 대학자인 정여창이 이곳을 찾아 운치를 즐겼다 하여 사람들은 군자정으로 불렀다.

 

정여창 (1450 - 1504)은 조선 성종 당시 대학자로 그의 본관은 하동(河東), 자(字)는 백욱(伯욱), 호는 일두, 시호(詩號)는 문헌공(文獻公)으로 18세에 부친을 여의고 혼자서 학문을 익혀오다 김굉필과 함께 함양군수로 부임한 김종직 문하생으로 들어간 후 지리산에서 3년간 학문을 매진하여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 예기, 춘추(春秋)등 5경(五經)에 밝게 되었고 노론(魯論)에 정통하게 되자 여러번 벼슬길에 천거되지만 매번 사양하다 1490년 소격서 참봉이 되었으며 그해 문과별시에 합격하여 예문관 검열을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를 지내며 연산군을 보필하지만 무오사화로 유배되고 1504년 죽음에 이르지만 1504년 연산군의 생모 윤씨 폐비사건을 알게 된 연산군은 갑자사화를 통해 이미 고인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를 자르는 부관참시를 당해 두 번 죽는 일이 발생, 1506년 중종반정으로 도승지로 증직되고 1517년 우의정에 추정되며, 1757년 문헌공이란 시호가 내려져 명예회복을 하게 되었다.

 

군자정은 크게 보면 정자이지만 작게 보면 감옥이나 다름없는 공간이다. 무모사화에 연류 부관참시를 당하는 수모를 겪은 정여창을 기리는 후학들은 넓고 화려한 큰 누각보다 작고 아담한 공간을 통해 혼자만의 독백을 할 수 있는 마음의 배려로 작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