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명예대표 축제 선정
“2014진주남강유등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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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진주 유등축제는 ‘물, 불. 빛 그리고 우리의 소망’이란 주재로 남강일원에서 열리는 대한민국 명예대표축제로 올해는 유등에 사용된 백열전구를 LED로 교체하여 유등이 한층 더 밝아 보인다. 고려조 명종 당시 문신이였던 이인로(1152~1220)는 그의 저서 ‘파한집’을 통해 ‘진주의 아름다운 산천은 영남에서 제일이다.’며 칭송하였는데 국내 시문 중에서 진주를 예찬한 최초의 시문이라 한다. 오늘의 여행은 영남 제일로 손꼽았던 진주시로 찾아가 본다.
▲ 사적 제118호 진주성으로 진입하기 위해 촉석문을 통과 첫 발을 내 딛는다.
전국 축제 중에서 유등축제는 우리나라 대표축제로 자리메김하고 있다. 논개의 혼이 숨쉬고 있는 진주성 일대와 남강변에 다양한 디자인의 유등이 10월 01일 오후 7시 30분 초혼점등식을 시작으로 7만여개 불 밝히면서 축제는 10월01일을 시작으로 10월12일까지 밤 하늘을 불 밝힌다.
▲ 촉석문을 통과하면 촉석루를 거쳐 남강변 의암이 있는 곳으로 향하게 된다.
삼국시대부터 이미 조성된 진주성은 고려 말 우왕 5년(1379) 당시 진주목사 김중광이 왜구의 침범에 대비하여 토성을 석성으로 쌓고 임진왜란 직후 성의 중앙에 남북으로 내성을 쌓았다. 진주성은 우리나라 임진왜란 3대 대첩지로 알려진 중요한 전략지로 선조 25년(1592) 10월 왜군 2만여 명이 전라도 진격을 위해 침략하지만 김시민과 3,800여명의 군, 관 ,민이 협력하여 물리치는 성과를 거두자 왜군 10만 명은 이듬해 6월 다시 재정비하여 침략 결국 7만의 군, 관, 민이 모두 순국하였고 성은 함락 당하였다. 현재의 성은 1972년 복원하고 1975년 전란에 허물어져 방치되었던 성곽 1,760m 및 높이 5~8m로 복원, 1979년 성 안팎의 민가를 정비를 시작으로 2002년 공북문 복원 공사를 마지막으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 촉석루 앞 유등행사 축제 기념 조형물
성내에는 촉석루, 의기사, 영남포정사, 북장대, 창렬사, 호국사, 서장대, 임진대첩계사순의단, 국립진주박물관, 야외공연장을 갖추고 서장대를 통해 의기사로 나오는 남강 산책로를 조성하였다. 진주성과 함께 촉석루를 올려두고 박물관 및 야외공연장을 두루 갖춘 조선시대 석축 평산성(촉석성)은 산등성을 따라 쌓아 올린 성벽만 하여도 4.000m로 성곽은 내성과 외성으로 천혜적인 지리적 자연조건을 이용하여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쌓은 성벽으로 내성은 1,930尺, 외성은 1만330尺에 성벽을 따라 수문, 임문, 장대, 장계, 포루 ,촉석루가 있다.
▲ 촉석루에서 바라 본 촉석문 전경
▲ 김시민 장군 전공비와 촉석정충단비이다. 김시민장군 정공비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이며, 촉석정충단비는 유형문화재 제2
호로 지정되어 있다. 촉석정충단비는 진주성 2차 전투 당시 순국한 김천일, 황진, 최경회 및 군관민 영령을 제사하기 위해 세운 것이
며, 김시민 장군 정공비는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성1차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시민 장군의 전공을 새긴 비이다.
▲ 촉성문 위 등으로 만든 병졸
진주성을 두고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진주목 성곽조에 촉석성은 주의 남쪽1리에 있고 석성으로 둘레가 4.359尺, 높이가 15尺으로 성내 우물이 셋, 군창이 있다고 기록되어져 있다. 광해10년(1618)에 재정비된 성곽은 전란을 겪으면서 일부 파손되었다가 오늘날의 성곽으로 완성시킨 때는 1970년부터 4년간 공사후 복원된 성에는 서쪽으로 의정문, 북쪽은 지제문, 남쪽은 예화문이라 부른다.
▲ 임진대첩 계사순의단에서 내려다 본 촉석루
진주성을 함락한 왜군은 자축연을 벌리기 위해 촉석루에서 기생을 불러다 술판을 벌리니 오늘의 여행 인물인 논개가 등장하게 된다. 논개는 진주성 2차 전투를 위해 내려온 병마절도사 최경회의 첩으로 함께 진주성으로 내려와 전투를 치루지만 중과부족으로 수세에 몰리게 되고 결국 함락 당하자 최경회는 남강으로 투신하여 스스로 죽음을 맞는다. 논개의 이야기는 최경회가 죽음으로서 원한을 갚기 위해 칠석날 치러진 연회석에 기생으로 분장하여 찾아가 왜장을 유인하여 위암(危巖/ 위험한 바위)에서 최경회를 따라 투신하니 그 죽음을 의롭게 받들기 위하여 논개 사후 전설로 떠돌던 논개에 관한 사적비와 사당을 세워줄 것을 진주에서 요청하며 구전으로 전해지던 논개의 일화는 1620년 유몽인(柳夢寅)에 의하여 비로소 활자로 새겨지니 이가 곧 문제의 어우야담(於于野談)이요, 인조7년(1629) 원성 정대륭이 위암 위에 의암(義巖)을 세기니 이를 근거로 훗날 중종1년(1721) 경상 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이 비변사에 포상할 것을 건의하고 영조 16년(1740)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가 의기사(義妓祠)를 세우고 논개추모제를 치르게 되었다. 논개 사후 무려 100년 넘게 지난 후 일이다.
▲ 촉석루에서 바라 본 남강에 띄워진 유등
성벽을 두고 거열성지(백제가 주로 만든 석성/거열성이 남아있다)였고 고려 공민왕때 7차례에 걸쳐 중수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진주성은 임진왜란을 통해 3대 대첩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는 중요한 곳이다. 진주성의 위상이 높아진 것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3800여명의 군사로 10배 가까운 왜적을 물리치는 대승을 거두지만 1593년 2차 진주성싸움에서 민. 관. 군 7만여 명이 왜군 12만 명을 맞아 11일간 대 전투를 치르게 된다. 이때 왜군의 조총과 아군의 지원력이 차단되어 아군은 순국하게 된다.
▲ 촉석루 암문을 통해 남강변으로 내려선 후 남강에 띄워진 부표를 따라 이동할 수 있다.
▲ 진주교 방향으로 바라 본 남강에 띄워진 유등
▲ 논개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의기사
촉석루 위쪽은 조선말 만든 의기사가 있다. 의기사는 중건된 지 44년만인 1868년 다시 중건하고 매년 6월 논개에 대한 제향을 올리는 곳으로 의암별제를 탄생시킨 곳이기도 하다. 의기사는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서 친일파 김은호가 그린 논개의 영정이 걸려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1962년 사당보호를 위해 모의당을 세웠다. 걸려 있는 영정은 본래 김은호가 그린 미인도를 이승만이 이곳에 선물한 것으로 김은호가 전라도 사람이 의뢰하여 만든 것으로 이승만에게 선물하였다고 전한다.
▲ 의기사에 모셔진 논개 영정
논개의 초상권은 대표적인 친일파 김은호가 그린 그림이다. 의기사에 봉안된 논개영정은 초상화의 대가로 대동아 전쟁 비용 충당을 위해 골몰하는 조선총독에게 조선여성의 상징인 비녀, 반지 등을 헌납하는 모습을 담은 "금차봉납도"를 그린 친일파로 이승만 대통령이 복원하는 진주 촉석류에 들러 논개의 영정이 없는 것을 보고 자신이 선물 받은 미인도를 선물하게 되었는데 그 문제의 그림이 1856년 전북출신인 정치가가 김은호에게 의뢰한 미인도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어우야담에 의하면 논개는 진주 관기였다고 기록되어져 있지만 논개가 죽은 백년 후 진주 선비들이 조정에 사적비와 사당을 세워줄 것을 청하고 의기사가 만들어 진다. 의기사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의로운 기생"으로 분명 신분을 확인할 수 있지만 의기사는 시대를 달리하면서 기생신분을 벗게 되는데 그 과정은 의기사를 순조때 중건하는 과정을 통해 의랑사(의로운 낭자의 사당)로 바뀌게 되지만 6.25전쟁 후 다시 복원하는 과정에 "의기사"로 다시 기록된다. 의기로 기록된 부분은 어유야담 뿐 아니라 영조때 만든 여지도서와 순조때 만든 진주목읍지에서도 논개는 진주의 의기로 기록되지만 기생신분이 최경회의 후실인 첩으로 기록되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 기록을 살펴보면 최경회 사후에 영부사 김재로가 최경회의 포상을 호남 절의록을 근거로 1751년 건의하게 되며, 해주최씨 문중의 일휴당실기에는 "공의 부실이 공이 죽던 날 좋은 옷을 입고 강가 바위에서 거닐다가 적장을 유인해 끌어안고 죽어 지금까지 사람들은 의암이라 부른다고 기록되어져 있다.
▲ 남강 의암 앞에 있는 논개 의암사적비
의암사적비는 의암 바로 앞 언덕에 세워져 있다. 조선시대에 만든 비석으로 경남유형문화재 제353호로 가로60cm, 새로145cm, 두께 15cm의 석비로 임진왜란 2차 진주성전투에서 남강으로 뛰어든 논개를 기리는 공적비로 비석을 만든 후 18년 뒤 진주 우병사 남덕하가 왕의 명을 받아 비를 세우고 비각을 만들었다. 비문에는 논개에 관한 내용이 처음으로 실려 있는 유몽인의 설화집 어우야담의 내용이 기록되어져 있지만 어우야담의 정확한 신빙설은 입증할 길이 없다.
▲ 논개가 뛰어 들었다는 의암
진주성안 우뚝 솟은 촉석루 밑으로 향하면 절벽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바위가 자리 잡고 있다. 쉽게 뛰어서 건너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리 만만한 위치가 아니라서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바위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약간씩 움직여 운 좋은 날이면 접근하기가 쉽다. 바위에 관한 전설이 내려오는데 의암이 바위 쪽에 와 닿게 되면 전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 바위가 가까이 붙어 있지나 않았나 싶은 생각입니다. 의암에는 큰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조정에 논개의 순절을 기리는 탄원을 내자 경종은 1722년 의롭다는 말(義)을 하사하니 원래 위암으로 불렸던 바위를 의암으로 정대륭에 의하여 표기하였다. 의암에서 촉석루를 바라보면 촉석루 절벽에는 천추의열(一帶長江 千秋義烈)"글귀가 새겨져 논개를 추모하고 있다.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모아 싸우다 전사한 제말장군과 그의 조카 제홍록의 공을 새긴 비석을 모신 곳
유등축제 관련 유등 전시작품
촉석루 담장 앞에는 대한민국등공모대전 출품작 40여기가 전시되고 있으며, 작품을 관람하면서 공복문으로 이동하여 공북문 주변 수호장군과 군졸의 모습 그리고 유등터널을 통과하여 북장대를 거쳐 화포 앞에 도착하면 사색의 존과 연인의 존이 이어진다. 계속 성벽을 따라 이동하면 서문을 거쳐 서장대에 오르게 되고, 서장대에서 남강을 조망하면서 국립진주박물관을 거쳐 이동 후 남강변 방향으로 열려진 성문을 따라 내려선 후 남강 위 이어지는 부표길을 따라 유등을 관람하면서 남강 반대편으로 계속 진행하면 된다.
▲ 대한민국등공모대전 출품작 우수상 / 조윤숙 / 천상의 소리
▲ 대한민국등공모대전 출품작 입선 / 이성순 / 겨울나무 등
▲ 대한민국등공모대전 출품작 최우수상 / 윤선미. 이장임 / 염원
진주성 내에서 유등을 만나다.
축제는 ‘한국의 풍습’을 주제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하지만 유등축제를 몇 번 찾은 사람이라면 약간 실망을 할 수 있을 만큼 새로운 유등이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지난해 사용하던 유등이 다시 등장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축제답게 진주성의 역사적 스토리텔링을 통한 보다 다양하고 작품성 있는 진주성을 공격하는 왜군과 방어하는 민.관.군의 모습을 재현한 전투 장면 유등이나, 임진왜란 당시 성내 민.관,군의 절박했던 마음을 담은 유등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 영남포정사문루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호로 조선시대 경상남도 관찰사가 업무를 보던 영남포정사의 정문 역활을 하고 있다.
본래 망미루로 불러던 건물로 경상남도 도청을 부산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도청의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 영남포정사문루
▲ 진주성의 주요 통로 역활을 하였던 공북문 전경
▲ 진주성을 지키다 끝내 순국한 김시민 장군 동상
1592년(선조25) 영남을 유린하고 곡창지대인 전라지역을 넘어가기 위해 하시바를 필두로 10월5일 3만 왜병이 진주성을 포위하고 공격하니 당시 진주목사인 김시민과 대치하자 최초의 의병장인 홍의장군 곽재우가 의령에서 지원하니 왜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진주성 1차 싸움에서 퇴각한 후 1593년(선조26년) 6월 가또오, 고니시, 구로다 등이 재차 2차 공격하니 병력만 10만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성 싸움에서 1차 전투의 설욕을 잔인한 피의 대가로 왜장에게 "전주성의 모든 군관민을 몰살 하라"는 명을 내렸다.
2차 싸움은 경상우병사 최경회 장군과 소식을 듣고 달려온 김천일, 충청병사 황진, 의병장 이잠, 고종후, 사천현감 장윤 등 분발하였지만 결국 성벽은 15일 만에 무너지고 함락 당하게 된다. 이 싸움에서 도원수 김명원과 전라순찰사 권율이 의령에 도착하였지만 의령 의병장 곽재우, 고성 의병장 이달(李達;1561-1618) 등 함께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1차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의병장이 왜 2차 전투에서 이처럼 방조하며 뒷짐을 지었는지 의문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의병이 왜군의 수적 우세에 기가 죽어 성안에서 죽어가는 백성을 나 몰라라 할 그런 위인은 아니지 않는가.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군의 무차별 살육이 진주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을 통해 여자들은 남강으로 투신하고 남자들은 자결하는 등 그야말로 처참한 패전의 결과를 치렀다.
▲ 진주성 공북문 앞 둘레길의 출발점
▲ 조롱박터널을 유등으로 만들어 놓았다.
▲ 병사들이 훈련하는 유등작품
▲ 천연기념물 유등공예작품
▲ 암문
▲ 천연기념물 유등공예작품
▲ 조선조 선조37년(1604) 합포(마산)에 있던 경상도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긴 병사 겸 목사 이수일의 유애비를 비롯, 효종 10년(16
56) 목사 성이성의 청덕 유애비 등 조선시대에 세워진 30여기의 비석군으로 진주성 주변 시내 각처에 있던 것을 1973년 옮겨 왔다.
▲ 북장대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호이며, 조선중기 건축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락집형태 건물로 내성과 외성에 포
진한 성의 병력을 지휘하던 곳으로 진남루라고 부른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618년 병사 남이흥(1576~1627)이 중건한 후 19
64년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 민속놀이 유등 작품
▲ 소 한마리 내걸고 씨름하는 장면을 연출한 유등
▲ 진주성 포루이다. 선조40년(1607) 병사 김태허(1555~1620)에 의해 진주성 내, 외성에 포루 12좌를 설치하였다 한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내성의 포루는 3곳이니 삼가, 의령, 곤양 등 3읍의 소속이고 외성의 포루는 9곳이니 진주, 단성, 초계, 거창, 사천, 함양, 남해
, 합천 등 8읍 소속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진주성 포루는 복원하는 과정에서 상징적으로 1개소만 복원을 하였다.
▲ 서장대로 향하는 길목
▲ 연인의 사랑을 이루게 한다는 연인 유등존
▲ 서장대 길목 호국사 앞 전경
▲ 서장대 오르는 길
▲ 서장대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호로 진주성 서문에 속하는 장군의 지휘소이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회룡루'라 부르며, 1934년
허물어진 건물을 새로 지었다. 본래 규모가 작은 촉석루 같은 다락집이였다 전하지만 새로 짓는 과정에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을 한 목조 기와집 형식을 하고 있다.
▲ 서장대에서 바라 본 진주
▲ 서장대에 설치된 작품
▲ 남강변 성벽을 통해 바라 본 남강건너 중앙광장 방향
▲ 6.25전승비 앞에 설치된 십이지상
▲ 국립진주박물관
▲ 촉석루 맞은 편 유등 터널
▲ 촉석루 건너편에서 바라 본 촉석루 전경
▲ 진주성 서장대 끝자락으로 바라 본 전경
▲ 남가람공원에 세워진 유등축제 등
▲ 등 배치도
▲ 진주성 안내도
유등은 진주성 둘레길 약 1.2km 구간을 따라 연인의 길, 사색의 길, 충절의 길로 이어지며, 진주성을 배경으로 남강 위에서 유등의 행렬이 이어진다. 유등의 역사는 1592년 임진왜란 1차 진주성 전투에서 비롯되었다. 김시민 장군은 3,300여명의 군관민을 지휘하여 왜군 2만대군을 격퇴하는 승과를 올리자 성 밖에 있던 홍의장군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이 남강에 햇불을 띄워 도주하던 왜군을 저지하는 전술로 사용되었으며, 개천예술제에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민관군 약7만여명의 진혼의식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행사로 유등을 띄우기 시작하면서 2002년 자체 행사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러고 있다.
유등축제 차량의 번잡함을 피하기 위해 외부에서 진입하는 차량은 IC 국도 진입로 주변 만들어 둔 임시주차장에 주차를 한 후 무료 셔틀버스로 행사장에 진입하는 것이 편리하다. 임시주차장은 진입하는 입구에 안내 유도표시를 따라 진입하면 된다. 또한 행사기간 중에는 천수교에서 진양교 입구 강변도로가 전면 통제되며, 성수장 앞에서 동방호텔을 잇는 길 역시 부분통제 된다.
즐거운 여행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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