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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 괘릉에서 의문을 품다.

허영꺼멍 2014. 10. 12. 21:35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무덤

"괘릉"

왜 석상에 카이즈수염을 한 중국인과 곱슬머리 서역인을 세웠는가? 이해하기 힘든 신라왕릉 풀리지 않는 의문의 괘릉 천년도고 신라의 또 하나의 미스터리 그 의혹의 중심 괘릉 그리고 괘릉을 둘러싼 이야기

 

▲ 괘릉 안내판. 주차장에서 곧장 석상군으로 이동하면 정면에 괘릉이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온통 소나무이다.

봉분으로 부터 왼쪽에 서 있는 무인 즉 무사의 모습이다. 보편적으로 무사를 두면 무인을 두기 마련인데 이곳에서는 무사만 존재할 뿐인데 복장 상태를 보면 갑옷을 입고 그 위에 옷을 걸쳐 무인으로 보이기도 한다. 무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대신급 서열이 아닐까 싶다.

 

 

▲ 신라 제38대 원성왕 죽음 그 후 화장하여 안치하였다는 의문의 괘릉

 

사적 제26호 괘릉의 주인은 신라 내물왕 12대손으로 알려진 신라 제38대 원성왕(785-798)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변 흥덕왕릉과 함께 시대적으로 장보고가 국제무역을 넓혀가던 시기라는 점을 통해 아랍인이 당시 신라와의 교역이 활발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원성왕은 발해와 통교했으며, 왕이 죽은 후 시신을 봉덕사 남쪽에서 화장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면 괘릉의 주인은 누구인가? 원성왕이 맞기는 한 것인가?

 

▲ 봉분을 정면으로 오른쪽 배치되어 있는 석조물 4기

 

괘릉은 좌우 화표석, 무인석, 문인석 각 1쌍과 돌사자 4마리를 배치하고 있다. 처음부터 그곳을 지키고 있었는지 이동을 한 것인지는 발견당시 누워있던 그 위치에 그대로 세웠다한다. 지금도 그 흔적으로 석상은 철분성분으로 물든 색상과 본래 색상이 얼룩져 있는데 땅속 철분이 석상에 물들어 색상이 변했다. 2005120일 보물 제1427호로 지정하였다.

 

▲ 넌 누구냐? 신라시대 고분을 지키는 외국인 ?

 

봉분을 중심으로 오른쪽 무인의 뒷모습. 앞으로 넘어져 뒷면은 철분성분이 없다. 갑옷을 걸친 무사의 옷임을 뒷쪽을 통해 알 수 있다. 봉분으로 부터 오른쪽 카이즈 수염을 한 중국인으로 추정되는 무인석으로 표정이 근엄하고 무사다운 눈빛을 가졌다. 봉분으로 부터 왼쪽에 서 있는 서역인의 모습으로 한쌍이 모두 손에 무기로 추정되는 긴 물건을 들고 있지만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서 있는 모습이 당당해 보인다. 봉분으로 부터 왼쪽 서역인의 얼굴에는 외국인의 얼굴 생김새 그리고 머리에 질끈 동여맨 터번이 잘 표현되어 있다.

 

▲ 서역인 정면, 측면, 뒷면

▲ 측면에 표현되어 있는 주머니

 

서역인의 뒷 모습. 옆에 찬 주머니가 잘 표현되어 있는데 일부 우리나라 복주머니라 주장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주장일뿐.. 우리나라 복주머니는 아닌듯 보여진다. 확인 당시 석상이 앞으로 너머져 앞면에는 철분으로 붉게 물들어 있다. 우리나라 복주머니라고 주장하지만 생긴 모습 그리고 주머니를 매달기 위한 끈의 굵기 등을 통해 복주머니가 아닌 어떤 장비일 가능성이 있다. 옛날에는 시계도 매달고 다녔듯.. 서역인이라면 당시 뭔가 매달고 다니며 사용하던..

 

  ▲ 카이즈 수염을 한 모습

 

봉분을 중심으로 오른쪽 카이즈 수염에 중국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석상을 두고 문인석인가 아니면 무인석인가 논란이 일고 있다. 일단 앞에서 보면 문인석으로 볼 수 있지만 뒤쪽에서 보면 갑옷을 입고 있어 무인석이다. 얼굴모습 역시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고대 중국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 정면, 측면, 뒷면 모습

정면에서는 손에 홀을 든 것처럼 보이지만 칼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모자에 그려진 곤충역시 매미가 아닌 벌로 확인되었고 입고 있는 옷 역시 무인이 입던 대수장포로 정밀분석결과를 내 놓아 무인석상으로 정리되고 있다. 모자에 벌이 그려진 유물로는 중국에서 당 예종의 아들 장혜태자 묘 벽화에서 확인되었다. 벌은 독침을 통해 무사의 상징으로 표현된 듯 보인다.

 

▲ 사자? 사자개? 귀 모습을 보면 사자개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석조물

돌사자를 옮겼다는 주장과 본래 있던 위치하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정확하게 정리된 것은 없다. 분황사 돌사자가 네 모퉁이를 장식하고, 불국사 역시 네 모퉁이를 장식하였기에 무덤주변 사각이 본래 위치라는 주장과 사자석의 바라보는 방향이 일정치 않다는 점을 들어 지금의 위치가 본래의 위치라 주장하고 있다.

▲ 조각 솜씨가 뛰어난 작품

 

▲ 봉문을 중심으로 오른쪽 서역인

 

통일신라 당시 국제무역에 관해 신라의 국력을 느끼게 하는데 미스터리한 것은 왜 왕릉 앞에 이방인인 서역인 이 서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국내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단 1기의 왕릉에서 말이다. 어쩌면 왕릉보다 규모가 작은 것으로 볼 때 왕릉이 아니라 서역인 중 고위층이 신라에서 죽음 그 이후 무덤을 조성한 것은 아닐까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 서역인 정면, 측면 그리고 문인석 측면

 

봉분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무기를 든 형태를 통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몽둥이처럼 생긴 무기 또는 다른 어떤 도구를 들고 있는 건장한 남성은 누가보아도 서역인으로 일부는 아리아 계통으로 추정하고 있다. 옆구리에 주머니도 달고 있으며, 머리에는 천으로 된 중앙아시아 또는 아랍권에서 사용하는 둥근 터번을 질끈 동여매고 있다. 왕의 무덤을 지키는 서역인은 실크로드를 통해 신라로 유리. 금속 공예품을 들여온 페르시아인?

 

▲ 박진감 엄치는 표정들

 

무인석은 괴량감과 박진감이 넘치는 석조물로 그 얼굴에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어 통일신라 당시 서역과 문물교류가 활발하였음을 말해주는데 왜 하필이면 이 릉에 외국 서역인이 릉을 지키는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또한 사자 4마리는 2마리씩 마주하고 있는데 동남쪽과 서북쪽의 것은 정면을 주시하고, 서남쪽과 동북쪽의 것은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려 남쪽과 북쪽을 지키고 있는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 봉분으로 부터 오른쪽 문인석 정면, 뒷면, 측면

 

▲ 봉문을 지키는 석조물

 

돌사자는 석상을 바라보면 주인을 향해 각자 편리한 자세를 잡고 있다. 사자의 당당하고 사나운 표정은 거의 없다. 특히 귀가 개처럼 제각기 다른 표현으로 사자개라는 주장과 함께 신라 귀면와의 실체가 바로 사자개 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가만 살펴보면 주인 옆에서 재롱을 떠는 듯한 자세가 사자개 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아 보인다.

 

 

돌사자의 얼굴 표정은 사납지 않다. 그리고 꼬리와 발의 표현력은 흡사 살아서 금방이라도 산천을 향해 뛰쳐 나갈 듯 표현력이 우수하다. 일제 강점기 당시 우리나라의 엄청난 석물과 문화재를 유출하였는데 일본이 왜 이 석물을 가져가지 않았을까? 오늘날 이 석조물들은 우리에게 어떤 메세지를 전하려 하는지 궁금하다.

 

▲ 봉분으로 부터 오른쪽 석조물 2기. 석조물 간격이 넓다.

 

괘릉 석상 및 석주 일괄은 보물 제1427호로 통일신라시대 릉 중에서 가장 우수한 표현을 한 릉 주변에 세운 석물로 왕릉입구에는 남쪽으로부터 화표석, 무인석, 문인석 각 1쌍과 돌사자 4마리를 동서로 약 28m 거리를 두고 마주보고 있는데 발견당시 넘어져 있는것을 세웠다 한다.

 

▲ 화려한 봉분

 

괘릉은 밑둘레 70m, 지름 21.9m, 높이 7.7m의 중형급 릉에 십이지신상을 새긴 호석을 돌리고 돌난간을 감싸 경주 릉 중에서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봉분 앞에는 좌,우 일렬로 화표석, 문인석이 자리잡고 있는데 인물상이 국내에서 유일한 외국인이다. 무덤을 두고 괘릉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곳이 연못이였고 연못을 매워 능을 만들어 관이 물에 젖자 널을 걸어서 묻었다하여 괘릉이라 하나 아직 발굴을 하지 않아 알수는 없다.

 

▲ 봉분에 양각으로 새겨져 있는 12지신은 제각기 무기를 들고 있는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왕릉 주변을 따라 배치된 십이지신상의 조각 수법이 매우 뛰어나다. 그리고 지금도 봉분에서 물이 고여 있는지 알 수 없어도 뒷쪽에는 제법 틈새가 벌어져 있으며, 고분 주변으로 물길을 돌려 흘러 보내는 고랑이 지금도 있다. 새겨진 12지신상의 정교한 작업솜씨는 당대에는 최고의 조각가에 의하여 조성된 릉으로 상당한 심혈을 기울인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 신라고분 중에서 아주 특별한 왕릉의 모습

 

신라왕의 죽음은 고분으로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신라 30대 문무대왕 역시 화장하여 경주 앞바다에 수중릉을 만들고 안치하였다. 왕이 화장을 하였다는 부분과 물이 있는 땅에 봉분을 안치하였다는 것을 통해 과연 우리는 어떤 해석을 해야 할까?

 

왕릉에 관한 의문도 상당하다. 오늘날 원성왕의 능으로 추정하지만 당대 왕의 무덤이 연못을 막고 만들만큼 이곳이 명당 터인지 몰라도 우리조상은 물이 괘는 곳에는 절대 무덤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과 아예 능비조차 없다는 점, 괘릉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연못을 막고 무덤을 조성하여 관이 물에 닿자 그 당시 기술로 관을 돌 위에 올려 걸고 봉분을 만들어 걸괘자를 써 괘릉으로 불렀다 한다. 왕의 무덤에 물이 고여 있다는 충격적인 말이다.

 

▲ 왕릉 앞은 계단식 논으로 익어가는 가을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괘릉을 나오면서 아직도 천년고도 신라에 관해 이해가 부족하다. 이미 출토된 릉에서 많은 서역인의 형상을 한 인형이 출토 될 만큼 이곳 신라에 서역인이 상당수 존재했다는 것이다. 또한 괘릉을 지키는 서역인이 국적으로 따준다면 중국계와 유럽계라는 것이다. 외국인 두곳이 지키고 있다는 것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더욱 복잡하기만 하다. 또한 사자라는 돌석상 역시 사자의 특징은 거의 없다. 꼬리와 귀 그리고 독특한 입 모습을 통해 사자개가 아닐까 추정해 본다. 그리고 이 고분의 주인이 어쩌면 신라시대 해상을 누비던 장보고의 무덤은 아닐까 하는 별의별 상상을 다해 본다.

 

 

즐거운 여행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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