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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회 밀양아리랑대축제 2016 | 축제일자 : 2016년 05월 19일 -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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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경멀티미디어쑈
밀양 아리랑 대축제가 2016년 05월 19일을 시작으로 22일까지 밀양 영남루 앞 밀양강변 일원에서 축제가 진행되었다. 매일 밤 8시30분부터 10시까지 밀양 오딧세이 / 실경멀티미디어쇼를 통해 국내 최고의 멀티미디어쇼를 선보이기도 하였다, 양 아리랑 축제에는 3대 정신을 기초로 하고 있다. 충의, 지덕, 정순의 정신으로 충의는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한 사명당 임유정 성사의 충의정신, 지덕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태두이신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지덕정신, 그리고 정순은 죽음으로서 순결의 화신이 된 윤동옥 아랑낭자의 정순정신이다. 축제의 시작은 1958년 영남루 중수를 기념하기 위해 11월에 행하던 예술발표회를 종합문화제로 명명하고 제1회 밀양종합문화제를 개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밀양에는 음력 4월 16일 밀양 아랑제를 진행하였고 봄과 가을에 두 번의 큰 축제를 하나로 통합하여 일양아랑제로 개칭한 후 농사가 시작되기 전 농한기를 이용하여 음력 4월 16일 이전에 행사가 열렸다.
1974년 제15회 행사때 밀양아랑문화제 초야제를 개최하였으며, 1997년 밀양 아랑젫 이름을 변경, 2004년 밀양아리랑 대축제로 이어져 오고 있다. 날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 영남루를 오르면서 괜 서리 콧노래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밀양하면 강변과 영남루를 우선 떠올린다. 밀양시로 진입하는 밀양교 건너 오른편에 위치하여 오며가며 찾는 탐방객이 잠시 쉬어가던 영남루(嶺南樓)는 옛 객사의 부속 건물로 알려져 있으며, 아랑의 전설을 간직한 아랑각, 보물 제493호 석조여래좌상을 모신 무봉사, 경상남도 기념물 제167호 밀양읍성,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7호 천진궁, 가요계 큰 발자취를 남긴 박시춘 선생 생가 등이 있다. 영남루(보물 제147호)에 오르다 ▲ 밀양 영남루 전경 밀양 영남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익공식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2층 누각형식의 조선 후기 건물이다. 본래 이곳은 객사의 부속 건물로 귀한 손님을 맞이하여 연회를 베풀던 곳으로 1844년 다시 지어졌다. 영남루는 우리나라 3대 누각(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 밀양 영남루)이자 영남3루(진주 촉석루, 울산 태화루, 밀양 영남루)로 알려 진 유명한 곳이다.
신라 법흥왕 당시 영남사라는 절을 창건하였지만 고려 현종 당시 절이 사라지고 금벽루로 불리는 작은 누각이 있던 곳을 고려 예종 당시 영남루를 만든 후 공민왕 14년(1365) 당시 밀양 부사 김주에 의해 중수 된 후 지속적인 중건이 이루어 졌지만 선조 15년(1582) 병화(兵火)로 일부 소실되자 인조 15년(1637) 부사 심흥이 재건하였지만 헌종 8년(1842) 다시 소실된 것을 1844년 부사 이인재가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영남루는 1943년 서울 숭례문과 함께 국보 제245호로 지정되었다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47호로 지정되었다. ▲ 밀양 영남루 전경
영남루에는 많은 현판이 내걸려 있다. 정면에 보이는 구한말 당시 명필가 하동주가 쓴 영남루(嶺南樓)를 시작으로 고남명루(嶠南名樓), 이현석(이인재 밀양부사 작은 아들)이 7세때 쓴 영남루(嶺南樓), 강성여화(江城如畵), 강좌웅부(江左雄府), 영남루(嶺南樓. 송하 조윤형), 용금루(湧金樓),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 이인재 아들 이증석이 열 살에 쓴 글) 외에도 많은 시와 현판이 내걸려 있다. 영남루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밀양강가 절벽 위에 주위의 빼어난 경관과 잘 어울리게 지은 조선시대의 누각 건축물이다. 조선시대에 밀양군의 손님을 머물게 하던 밀주관의 부속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4칸에, 기둥의 간격을 넓게 하고, 마룻바닥을 높여, 웅장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을 주고 있다. 좌우의 건물이 층계와 복도로 연결되어 건물의 배치에 변화를 주면서도 균형을 유지하엿고, 전체적 규모는 한결 웅장해져 영남제일루의 명성에 어울리는 면목을 갖추게 되었다. 최초의 영남루는 고려시대 말91365)에 밀양군수 김주가 신라시대의 절 영남사터에 같은 이름의 누각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조선시대를 걸치면서 여러 차례 증축과 임진왜란 등 전란때에 화재, 역대 밀양부사의 중건 등을 거쳐 1844년에 다시 세워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영남루라 쓴 현판은 명필 성파 하동주가 쓴 것으로 유명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여러 문인들이 영남루를 읆었던 시가 전해지고 있다. 천진궁
현종 5년(1665) 세워진 천진궁은 영남루 마주하고 있다. 역대 왕조 시조의 위패를 모신 공진관의 부속 건물 이였으나, 경종 2년(1722) 공진관을 대신해 위폐를 보관하는 객사의 기능을 담당, 일제에는 헌병대에서 감옥으로 사용하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천진궁에는 단군의 영정과 위폐고려 태조의 위패, 신라와 백제의 시조 왕과 발해 고왕 조선 태조의 위폐를 모시고 있다. 지금 천진궁은 1957년 수리 후 천진궁으로 바꾸고 정문에 만덕문이라 하였다. ▲ 천진궁 출입하는 만덕문 천진궁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7호이다. 영남루 건물 앞에 위치한 공간으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천진궁은 1665(현종 6)에 건립되었다. 원래 이 건물은 역대 왕조 시조의 위패를 모신 공진관의 부속 건물로 사용되었으나, 1722년(경종 2)부터 공진관을 대신해 위패를 보관하며 객사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헌병대가 이 건물을 감옥으로 사용하였다. 천진궁은 남쪽을 향해 중앙에 단군의 영정과 위패를, 그 왼쪽 벽에 부여, 고구려, 가야의 시조 왕과 고려 태조의 위패를, 오른쪽 벽에는 신라 백제의 시조 왕과 발해 고왕, 조선 태조의 위패를 각각 모시고 있다. 1957년에 대대적인 수리와 함께 천진궁으로 이름을 바꾸고, 정문을 만덕이라 하였다. 이후 매년 봄. 가을로 어천대제(음력 3월 15일)와 개천대제(음력 10월 3일)를 지내고 있다. 천진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의 주심포식 건물로, 대리석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높은 기둥을 세워 건물의 권위와 웅장함을 더하였다. 그러나 이 건물은 건축적 가치에 앞서, 일제가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말살하기 위해 역대 시조의 위패를 땅에 묻고 감옥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민족의 수난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해방 후 이를 복원하려는 지역민의 노력도 단지 옛 건물의 복원이 아니라 민족의 정통성 회복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이 지방민의 민족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밀양아리랑 비석
밀양 아리랑은 동부지역 대표적 통속 민요로 1968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에서 장려상을 수상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아랑의 전설로 만들어 졌다는 밀양아리랑은 아랑의 슬픈 사연은 어디로 갔는지 노래 전체 분위기는 활달하게 진행된다. 밀양아리랑이 나오게 된 것은 아랑의 정절을 흠모한 밀양의 부녀자들이 노래로 찬미하여 세마치장단에 맞추어 불렀다고 한다. 아리랑은 보편적으로 느린 것이 주류를 이루는 반면 빠른 진행을 보이고 있어 아랑을 통한 아리랑은 아니지 않는가 싶다. 밀양아리랑은 5음계로 "라도레미솔"이다. "라"로 시작해서 "라"로 끝맺는다.
우리나라 아리랑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 유래를 밝히는 주장이 있다. 아리랑은 "나는 사랑하는 임을 떠난다."는 설,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때 고생하던 민중들이 반가운 말은 못 듣고 괴로운 말만 듣게 되니 "차라리 귀가 먹었으면 좋겠다."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밀양 영남루 아랑낭자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라는 설, 신라 박혁거세의 아내 알영부인을 찬미하는 말이라는 설, 등 다양한 설이 있지만 근거는 없어 보인다. 아리랑은 대중이 쉽게 아무나 따라 부르는 노동민요이다. 어떤 악보나 악기의 반주가 필요 없는 단순 암기에 의존하여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뿐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아리랑으로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이 있다. 무봉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의 말사인 무봉사(무봉암)는 영남루에서 밀양아리랑 비석 오른편 아랑각으로 내려서기 전 언덕길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헤공왕 9년(773) 법조(法照)가 큰 봉황새가 날아가 앉자 상서로운 곳이라 여기고 절을 창건하였다는 창건설화와 고려 고승이던 범률국사가 하안거를 하다 이곳 지형이 봉황이 춤추는 형국이라 하여 무봉사라 하였다고 한다. ▲ 밀양강변에서 바라 본 무봉사 전경
공민왕 8년(1359) 영남사가 소실되면서 무봉암은 재건 후 무봉사로 부르지만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고 이후 중창과 중건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 현재 절에는 지형상 협소한 공간에 대웅전, 삼성각, 종루, 요사채가 있으며, 중심건물인 대웅전에는 보물 제493호 무봉사석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무봉사에는 특별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통일신라 말기 나라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을 당시 무봉사가 위치한 아동산에 태극무늬가 잇는 나비 떼가 몰려들었다 사라진 후 고려가 세워지고 삼국이 통일되었다하여 이후 태극나비가 나타나면 경사로운 일이 생길 것이라 여기며 ‘국성접’이라 부르며 보호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1954년 4월에는 정부에서 태극나비 우표를 만들어 기념하였다고 한다.
무봉사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 말 국운이 기울어 사회혼란이 가중되던 어느 해, 고려 태조 왕건이 삼한을 통일하기 직전 후백제 견휜과 밀고 밀리는 격전을 거듭하고 있던 시기였다. 어느날, 춘삼월도 아닌 음력 2월에 갑자기 한 무리의 나비가 떼를 지어 날아와 무봉산(아동산)을 뒤덮으며 날아다니다가 갑자기 흔적도 없이 홀연히 자취를 감추는 괴이한 일이 있었다. 무봉사를 감싸고 날아 다녔던 나비의 날개에는 태극무늬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이상하게 여겼다. 당시 통일신라는 국론이 분열되는 등 모신 혼란에 휩싸여 있던 때라, 사람들은 어떤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려가 건국되면서 어지럽던 사회 혼란은 멈추고 마침내 태평성대를 맞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가끔 이 태극나비가 무봉산에 나타나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라에 경사가 있었다. 그래서 고려 초에는 이 나비를 보호하라는 왕면과 함께 국성접이라 부르게 하였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 나비는 조선조 5백년과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앗다가 1945년 8월 15일 오후 3시쯤 태극나비가 무봉사 법당에 날아들었으며. 그해 8월 19일과 10월 25일에도 각각 나타났다고 하며 그래서 무봉사를 참배하고 나면 경사스러운 일이 생긴다고 전해진다.” ▲ 무봉사 석조여래좌상
혜공왕 9년(773) 법조가 영남사의 암자로 창건했다는 무봉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석조 여래불좌상은 본래 영남사 터에서 광배와 대좌가 없이 발견된 불상으로 높이가 97cm의 좌상이며,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봉사 석조여래좌상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773년(혜공왕 9)에 법조가 영남사의 암자로 창건했다는 무봉사 대웅전에 모셔져 잇는 높이 97cm의 앉은 불상이다. 원래 불상 뒤의 광배와 앉는 대좌가 없는 채로 영남사 터에 있었던 것을 근처에서 출토된 광배와 대좌를 맞추어 여기에 모셨다. 네모난 얼굴에 가는 눈과 입, 넓적한 코, 짧은 목 등이 다소 평면적으로 표현되었으나, 전체적으로 단정한 인상이다.
둥글고 부드러운 어깨에 알맞은 가슴이다. 목에는 세 줄의 삼도가 뚜렷하고 양어깨에 걸친 법의는 두텁게 표현되었다. 부처의 빛을 나타내는 광배는 두 줄의 불룩한 선으로 머리의 빛과 몸의 빛으로 구분되었고, 안에 넝쿨과 연꽃을, 밖에 불꽃을 아름답게 새겼다. 다시 정면에는 다섯의 작은 부처를 새겼고, 뒷면에는 드물게 약사여래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광배 뒷면에는 드물게 약사여래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광배 뒷면에 불상이 새겨진 것은 경주 남산의 미륵곡석불좌상에서 보이는 정도로 드문 예이다. 한 개로 된 사각형의 대좌에는 두꺼운 연꽃무늬가 단순 명료하게 새겨졌다. 부처는 단정하고 양감 있게 표현되었으면서도, 법의의 주름이 간략해지고, 광배의 꾸밈이 화려하고 복잡해진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축제의 밤을 기다리며 밤이 찾아들기 전에 찾아간 축제의 현장은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았으며, 주차장도 여유가 있어 쉽게 주차를 한 후 행사장을 떠나 밀양 영남루를 비롯 일대를 한바퀴 걷고 내려서니 축제시작 다양한 공연이 시작되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축제를 즐기는데 저녘이 되자 빈 공간이 없는 사람들 그리고 보행로까지 사람들이 차지하여 사람이 밟히는 소동까지 벌어졌지만 누구 한사람 통제하는 사람이 없었다. 큰 사고가 없기 다행이지 밀양 시민들의 건전한 질서문화가 안타까웠다. 어둠이 찾아들고 늣은시간 멀티쑈는 진행되었지만 날씨가 몸시 춥고하여 불꽃쑈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자리를 이탈하였다.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축제의 현장이지만 젊음과 노년층을 아우러는 프로그램이 없어 무척 아쉬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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