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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금정] 범어사 출발 금정산성 둘러보기

허영꺼멍 2014. 10. 9. 21:39

 

 

선찰대본산 " 범어사 "

 

영남의 3대 사찰중 하나인 범어사는 신라 제30대 문무왕18년 의상대사에 의하여 창건되었다는 설과 홍덕왕 당시 세웠다는 설이 있지만 시대별로 연결해 보면 문무왕이 바다로 침입하는 왜구에 대항하기 위하여 창건하고 홍덕왕 때 중창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범어사는 대 사찰로 창건당시 요사 360방, 토지 360결, 노비 100여명 기록으로 보아 당시 상당한 규모를 엿 볼 수 있다. 범어사는 임진왜란에 소실되고 광해군 5년(1613) 묘전현감스님, 해민스님 등 중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범어사 주차장을 가로 질러 금정산으로 향하는 등산객

 

문무왕은 바다로부터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의상대사에게 명하니 문무왕 18년에 그 뜻을 받들어 678년 창건 해동 화엄종 십찰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 하였다. 범어사를 찾는 사람이라면 금정범어(金井梵魚)라는 말을 한 두 번은 들었음직 할 정도로 이곳은 범어와 관련 그 창건설화가 전해진다. 부산으로 상륙하여 해적질을 일삼는 왜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문무왕이 고심하는 와중에 현몽을 꾸게 된다. 금빛고기가 노니는 곳에 사찰을 세우라는 꿈을 꾼 문무왕은 당시 고승인 의상에게 명하여 부산일대를 둘러보니 금정산 정상에 범어가 노닐어 현몽에서 일러주신 그곳이라 범어사를 만들었다 한다.

 

▲ 범어사 보제루를 올라 대웅전을 향해 기도하는 불자

 

범어란 금정산 동래현의 북쪽 20리에 있고 금정산 산마루에 세 길 정도 높이의 돌이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고 둘레는 10여 척이며, 깊이가 7촌쯤으로 물이 항상 고여 황금색을 이루며, 한 마리의 금빛 물고기가 그 속에서 노니 금샘이라 산 이름을 부르고 하늘나라의 고기라 하여 "범어"라 한 후 범어사를 만들었다고 동국여지승람에서 전하고 3.1운동 당시 안용운 선생이 범어사에서 범어사 학림의거 독립만세운동을 할 당시 전국에서 사용할 태극기를 만든 곳이다.

 

▲ 범어사 보제루

▲ 범어사 대웅전. 보물 제434호

▲ 범어사 조계문 . 보물 제1461호

 

 

조계문(일주문)은 보물 제1461호로 범어사로 들어서는 첫 산문 역활을 하고 있는 일주문이다. 범어사 일부문은 자연암반 위 돌기둥 4개를 세워 3칸을 형성한 톡특한 형식으로 우리나라에 유일의 독창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일주문은 광해군 6년(1614) 묘전화상이 창건한 후 숙종 20년(1694)에 수리를 거쳐, 숙종 44년(1718)에 돌기둥으로 교체하였다 전한다. 대웅전은 보물 제434호로 범어사 중심법당이다. 본존불로 석가모니불과 협시불로 미륵과 제화갈라보살을 모시고 있다. 헌종 2년(1661) 조각승 희장이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을 제작하였는데 2007년 8월 18일 보물 제1526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전은 광해군 6년(1614) 묘전 화상에 의해 창건되었다.

 

금정범어(金井梵魚) 금샘

 

▲ 금정산 금어사 산다는 금샘

범어사를 찾는 사람이라면 금정범어(金井梵魚)라는 말을 한 두 번은 들었음직 할 정도로 이곳은 범어와 관련 그 창건설화가 전해진다. 범어란 금정산 동래현의 북쪽 20리에 있고 금정산 산마루에 세 길 정도 높이의 돌이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고 둘레는 10여 척이며, 깊이가 7촌쯤으로 물이 항상 고여 황금색을 이루며, 한 마리의 금빛물고기가 그 속에서 노니 금샘이라 산 이름을 부르고 하늘나라의 고기라 하여 "범어"라 한 후 범어사를 만들었다고 동국여지승람에서 전하고 있다.

 

 

금샘에 도착한다. 멀리 북문에서 동문으로 향하는 산성길이 한눈에 조망되는 바위 앞에 큰 잉어가 입을 벌린 모습을 한 바위에 신비스럽게도 물이 고여 있다. 금샘과 범어사 설화를 옮겨보면 금샘 설화는 부산의 진산 금정산이 예부터 신령스러운 영산임을 알려주는 것과 함께 금정산이란 산 이름과 범어사의 절 이름, 그리고 이 사찰의 창건 내력을 알려주는 것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 설화는 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금정산 산정에 세 길 정도 높이의 바위가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다. 둘레가 10(3m) 남짓하며 깊이가 7(21cm)쯤 된다. 황금색 물이 항상 가득 차 있고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한 마리의 금빛 나는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범천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고 하여 금빛나는 우물 곧 금정이란 산 이름과 법천의 고기 곧 범어라는 절 이름을 지었다. 이와 같은 내용이 범어사 창건 사적과 삼국유사에도 실려 있는데 신라 의상대사와 관련한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도 있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동해에 왜인들이 10만 병선을 이끌고 와서 신라를 침략하려고 했다. 대왕이 근심에 싸여 있는데 꿈속에 신인이 나타나 의상스님과 함께 금정산 금샘에 가서 칠일동안 밤낮으로 기도하면 왜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대왕이 의상스님과 함께 친히 금샘을 찾아가 기도를 하니 땅이 크게 진동하며 부처님과 천왕과 신중, 그리고 문수동자 등이 헌신하여 동해로 나가 왜적들을 격파했다. 대왕이 크게 기뻐하여 의상스님을 예공대사에 봉하고 금샘아래 호국사찰을 세웠으니 곧 범어사 이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금정산 정상 고당봉

 

▲ 금정산 정상 고당봉 위에는 크고작은 암석이 돌출되어 모여 있다.

 

고당봉(801.5m)은 금정산의 주봉으로 북문에서 언덕길을 따라 약 900m 거리이며, 범어사에서 오른쪽 산길을 따라 오르면 약 2.5km 거리로 산정상 아래 고모당이 있으며, 부산 앞바다와 낙동강이 한눈에 조망된다. 고당봉의 어원은 고려때까지 모든 산신은 여신으로 금정산 역시 할미신이 존재하여 할미 고(), 집 당()을 사용하여 고당봉이라 부른다고 한다.

 

▲ 정상 표지석 고당봉

▲ 계단길 옆 고모당

▲ 북문으로 향하는 나무데크

 

고모당 전설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에 밀양 사람인 박씨가 결혼에 실패하고 불가에 귀의, 범어사에서 화주보살이 되어 절의 살림을 꾸려가는데 신명을 바쳤다. 이 보살은 큰스님에게 제가 죽으면 화장을 하고, 저 높은 고당봉에 고모명신을 모시는 산신각을 지어 고모제를 지내주면 높은 곳에서 수호신이 되어 범어사를 돕겠습니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큰스님은 그 유언대로 고당봉에 산신각을 지어 해마다 제사를 지냈더니 과연 범어사가 아주 번창한 사찰이 됐다. 한때 젊은 스님들이 당제를 지내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당집을 훼손했는데 그 뒤로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 다시 고모당을 고쳐 지었다고 한다. 사실여부는 알 수 없지만 고모당의 신성함과 영험함을 일러주는 전설이다.

 

 

 

전통사찰 제19호 미륵암

 

 

▲ 미륵암 중심건물 대웅전

 

전통사찰 제19호 미륵사에는 예로부터 신비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금정산 미륵봉(712m) 아래 바위굴 속 연못에 옛날 이무기가 살다가 용으로 승천하였는데 바로 그 곳에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미륵암을 짓고(678) 신통한 도술로 동래를 수호하였다. 왜적 5만 병선이 동래 앞바다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첩자를 뭍으로 올려 보냈다. 미륵암의 원효대사는 사미승에게 호리병 5개를 구해오게 하여 탑 앞에 나란히 세운 뒤 가장 높은 바위에 신라 장군기를 꽂았다. 그 장군기를 보고 2명의 첩자가 미륵암까지 올라왔다. 대사는 호리병으로 신술을 부려 첩자의 목을 졸랐다. 첩자들이 살려 달라고 하자 호리병 3개를 대장에게 전해주라며 돌려 보냈다. 화가 난 왜적대장은 호리병을 단칼에 내리친 순간 그는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왜적들이 모두 놀라 그대로 달아났다. 대사가 신라의 장군기를 꽃았다는 바위에는 지금도 독성각 옆에 움푹 패인 자국을 그대로 남기고 있다. 독성각으로 오르는 좁다란 돌 계단길의 중간부분에는 석간수가 솟아 나오는 작은 샘이 있는데 그 곳 바위 구멍에서 쌀이 나와 스님이 끼니를 잇게 했다고 한다.

 

 

▲ 코끼리가 보인다는 바위

▲ 미륵암 입구

▲ 독성각에서 내려다 본 전경

 

 

▲ 독성각 마애불

 

미륵암이란 염화전법당 뒤 암봉에 마치 화관을 쓴 미륵불처럼 생겨서 사람들에게 신령한 기운을 준다고 하는데서 이름 지어졌다 한다. 암봉을 자세히보면 코끼리 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가 7개가 있는데 코끼리는 상사로운 동물이어서 마음이 맑아야 다 보인다고 한다.

 

 

 

금정산성 북문에서 원효봉 ~ 의상봉

 

▲ 금정산성 북문

 

부산을 지키는 신령한 명산 금정산에 위치한 금정산성은 한때 국내 최고의 산성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지금은 겨우 복원된 성벽일부와 성문만 있다. 사적 제215호 금정산성은 총 면적 830370.24, 전체길이 17,337m로 현재는 4km만 남아 있다.

 

▲ 북문을 따라 고담봉까지 이어디는 성벽 

 

▲ 북문 성루

▲ 북문을 잇는 성벽

 

▲ 북문 성루에서 바라 본 고담봉 정상

 

▲ 금정산성 북문 앞 습지보전지역

 

금정산 북문에 도착하면 주변 일대 습지지역으로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수영강(온천천)과 낙동강(대천천)으로 연결된 지류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지만 훼손되었고 오늘날 자연습지를 복원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곳이다.

 

▲ 성급한 단풍이 가을을 애타게 부르고 있다.

  

▲ 원효봉으로 오르는 성벽 

▲ 원효봉에서 도심을 조망하는 등산객

 

 

북문에서 성벽 옆으로 이어지는 숲길 따라 원효봉에 오른다. 탁틔인 전망과 함께 금정구를 배경으로 멀리 회동수원지까지 한눈에 조망된다. 원효봉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금정산 동쪽 가장 높은 봉우리로 먼저 어둠을 헤치고 동해에 떠오르는 햇빛을 받아 갓 피어난 매화처럼 화려한 자태의 빛깔로 수놓아 으뜸의 새벽원료봉(887m)이라 불렀다. 금정산성 제4망루 위쪽에 자리잡고 있어 동해 망망대해를 한눈에 바라 볼 수 있고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는 봉우리다.

 

김유신장군이 원효봉에서 낭도들을 훈련시킬 때 바위에서 부동자세로 오래 서 있어, 선 채로 소변을 보았는데 어느 낭도가 그 자리에 소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이 땅달보소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비바람을 이겨내고 그 푸르름을 뽐내고 있어 사람들은 김유신 솔바위라고 불렀다고 전해져오고 있으나 현재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 원효봉에서 바라 본 제4망루

 

▲ 의상봉으로 향하는 산성길이 눈에 띈다.

 

금정산성은 사적 제 215호이다.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금정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인 1703(숙종 29)에 국방을 튼튼히 하고 지킬 목적으로 금정산에 돌로 쌓은 산성으로 성벽의 길이는 18.845m, 성벽높이 1.5~3m, 총면적은 약 8.2에 이르는 국내 산성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산성이다. 처음 산성을 쌓은 시기는 문헌상으로 확실하지 않으나, 남해안과 낙동강 하류에 왜구의 침입이 심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신라시대부터 성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1667(현종8) 통제사 이지형이 왕에게 금정산성을 고칠 것을 건의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703년 이전에 산성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 원효봉에서 내려서는 길

 

▲ 원효봉에서 의상봉으로 내려서는 길과 그 옆으로 성벽이 따라 이어지고 있다. 성벽 보행 금지구간

 

 

 

▲ 의상봉 앞에 자리한 무명바위(용바위)

 

▲ 용의 형상이 불리는 용봉으로 가는 길

 

 

▲ 의상봉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산길 등산로를

잠시 벗어나야 한다. 

▲ 의상봉

 

원효봉에서 산성길을 따라 내려선 후 또 다시 오르는 산성이 큰 바위를 만나 잠시 끊어지는 구간으로 의상봉은 620m 로 금정산성 제4 망루에서 바라 보이는 언덕 위 바위산이다.

 

의상봉에 관해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의상봉은 금정산성 제4망루가 있는 위쪽의 봉우리로 동해의 망망대회를 한눈에 바라보는 망대의 역활을 할 수 있는 봉우리이다. 늠름하고 고고한 자태로 웅크린 호랑이가 동해를 바라보며 부산을 지키는 지혜로운 모습이다. 전설에 따르면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을 하여고 하는데 갑자기 산신령 호랑이가 나타나 승천을 저지하기 위해 한참 격렬한 몸싸움을 하게 되었다. 마침내 무승부가 되어 두 봉우리로 변해 위쪽에는 용을

저지하는 형상의 호봉이 되고 아래쪽에는 용을 닮은 용봉이 되었다. 이 두 봉우리를 합쳐 용호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970년대 산악인들이 의상봉이라 명명하여 오늘에도 부르고 있다.

 

▲ 원효봉에 10월 중순을 향하는 지금 철쭉이 피어있다.

 

 

금정산성은 지형지물을 잘 활용하여 성을 쌓았다. 산성길을 딸라 이동하다 보면 의상봉 같이 풍화작용으로 돌출산 토르(Tor . 똑바로 서 있는 돌탑)를 만나면 자연환경을 성벽의 일부로 포함시켜 놓았다.

 

▲ 제4망루 주변에는 갈대가 일부구간 피어나 가을을 이야기 하고 있다.

 

▲ 부채바위와 나비바위

 

▲ 부채바위

 

 ▲ 제4망루에서 낙동강 조망

 ▲ 제4망루에서 제3망루로 향하는 내리막 구간

 

 ▲ 부채바위 너머서면 제3 망루이다.

 

▲ 의상봉에서 바라 본 제4망루

 

▲ 의상봉에서 바라 본 용봉

 

금정산성은 삼국시대 또는 그보다 앞선 시기로 추정되는 옛 성으로 현종 8(1667) 통제사 이지형이 왕에게 금정산성을 수리할 것을 건의하는 기록을 바탕으로 이미 1667년 이전에 성벽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숙종 29(1703) 성벽을 보수하였다. 숙종 33(1707) 성이 너무 넓어 관리가 힘들자 성 중앙을 남북으로 구분하고 성을 쌓았지만 영조 50(1774) 지키기 어렵다는 이유로 폐지하고 순조 6(1806) 성을 고쳤지만 일제 강점기 당시 파괴되어 성곽의 형체가 불분명해져 버렸고 그 후 1974년부터 동문과 서문, 남문, 북문을 차례로 복원하였.

 

 

범어사로 하산 

▲ 북문으로 오르는 등산로 일부 구간은 데크가 설치되어 있다.

 

▲ 범어사를 떠나 300m 오르면 만나게 되는 금강암

 

 

▲ 범어사 돌바다(암괴류)

 

범어사에서 왼편 계곡을 건너 북문으로 오르는 길목부터 크고작은 돌이 길을 열고 산정상을 향하고 있다.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범어사 등나무 군락지에서 범어천을 따라 올라가면 금강암을 지나 금정산성 북문으로 가는 길까지 지천으로 널려있는 엄청난 바위 천지를 만날 수 있다.

 

돌바다(암괴류)의 폭이 70m 정도 되고 산사면 방향으로 길이 2,500m 족히 넘어 보이는 바위들이 많이 쌓여 이루어진 것이다. 돌바다(암괴류)는 주로 바위가 물리적 화학작용에 의해 절리(바위에 갈라진 틈)를 따라 물이 스며들면 얼고 녹고하는

 

과정을 통하여 깨어지고 오랜 시간에 걸쳐 중력에 의해 주저않으면서 만들어 진다. 돌바다(암괴류) 밑으로 물이 흘러 대성암 각해선림 구들장 나래로 숨어 졸졸 흐르는 물소시를 신의경지에 불심을 듣는다 해서 금정 8중 하나인 대성은수라 하였다

 

 

범어사를 출발하여 오른쪽 등산로를 이용, 그리고 금샘을 거쳐 고당봉에 오른 후 고당봉에서 미륵사로 하산 후 다시 길을 잡아 북문을 거쳐 원효봉과 의상봉 그리고 제4망루를 지나 제3망루 앞까지 갔다 동문 못미처 차량회수를 해야 하기에 되돌아 범어사로 내려서야 했다. 범어사로 내려서면서 왼편 자락에 있는 금강암을 거쳐 하산을 마무리 하였다. 다음번에는 제3망루에서 동문을 거쳐 계속 산성을 따라 이동 해 볼까 한다.

 

 

 

 

 

 

 

즐거운 여행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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