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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벚꽃나무 이제는 자연으로 돌아가려 한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짓밟고 그 흔적의 땅위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기억하려는 듯 심은 벚꽃나무는 오랜 세월 왜성이란 이유로 방치되다시피 하면서 나무는 늙고 노쇠하여 일부는 썩어 사라지거나 겨우 밑동에서 자란 몇몇 나뭇가지에 꽃을 피울 따름이다. ▲ 일부 가지들이 썩어 떨어져 버린 고목이 된 벚꽃
선진리성은 한때 왜성이라는 이유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는데 전국최고의 벚꽃군락지로서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선진리성은 과연 왜성일까? 잘은 알 수 없어도 그곳에서 피 흘리며 산화한 이름 없는 병사는 분명 선진리성을 사수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던졌으리라……. ▲ 선진리성 진입 구간 벚꽃길 선진리성은 이순신 장군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당시 옥고를 치루고 나온 후 거북선을 건조한 아군은 1592년 05월 28일 이곳 선진리성 앞 바다에서 처녀출전을 통해 왜선 12척을 격파하는 승과를 거둔다. 정유재란 당시인 1598년에는 조. 명연합군과 왜군간의 처절한 전투를 통해 명나라 장수인 팽신고가 대패한 뼈아픈 현장이기도 한 이곳에는 100년이 가까운 벚꽃이 지천에 널려져 그날의 처참한 기억들을 뒤로한 채 아픈 역사의 현장을 지키고 있다. 성이 있는 산등성에서 내려다보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삼면이 바다인 탓에 지리적 요건으로 중요한 요새역할을 하여 왜군과 조선수군간 치열한 자리다툼을 한 곳으로 충무공 해전승첩비와 토성이 아직도 남아있다. 선진리성은 왜장 가토가 만든 울산 학산산성, 서생포성을 비롯하여 기장 묵성리성, 부산진 지성, 웅천 안골포성, 김해 죽도성 그리고 선진리성이 왜성으로 알려져 있다. ▲ 주차장에서 바라 본 선진리성 많은 자료에 의하면 선진리성이 왜군이 만든 왜성으로 기록되어져 있다.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1597년 12월에 왜군 시마즈가 수축. 성곽주변을 토성으로 쌓고 일부 중요한 곳에는 석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면 왜 왜군이 토성을 쌓았을까? 예외로 가까운 곳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지 않나 싶다. ▲ 왜성 특유의 건축수법 퇴각하는 왜군의 거점으로 급하게 만들려면 그곳 지형에 널려있는 자재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선진리성은 흙으로 이루어진 성으로 거의 돌을 찾아보기 힘들다. 결국 시간에 쫒긴 왜군은 임시방편으로 흙을 이용했다는 주장이다. 당시 여러 갈래로 나누어 왜군과 전투를 벌려온 명군은 시마즈가 있는 사천을 향하였고 왜군은 주력부대 1만여 명을 이미 선진리성에 주둔시킨다. 이 사실을 모르는 명군 팽신고 부대는 이곳에서 무려 3000여명의 시상자를 내면서 승리하게 되지만 이내 성을 내 놓게 된다. 싸워서 성을 함락시킨 것이 아니라 선진리성을 손에 넣은 시마즈는 뜻밖에 본국으로부터 철수명령을 받게 되고 싸움을 통하지 않은 채 성을 손에 넣었다고 한다. 이 사실들이 왜성임을 굳게 확신하게 만드는 대목이지만 이와는 좀 더 먼 이야기를 하고 싶다. 정유재란 당시 이곳에 왜군이 전략적 요충지로 교도부를 확보하면서 왜성으로 불리는 비운을 격지만 정작 왜군이 아무것도 없는 땅위에 스스로가 토성을 쌓고 요새로 만들었나 하는 것이다. 퇴각하는 왜군의 집결지로 급하게 쌓았다는 것은 분명 뭔가 기초가 되는 것이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러면 이곳에는 왜군이 점령하기 전에 뭐가 존재하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진리성은 일본 측의 기록인 도진가기에서 밝혀둔 것이 전부이다. 일본이 우리의 많은 부분을 왜곡시켜온 것으로 볼 때 한번쯤 짚고 넘어갈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 왜성 담장 밖으로 이어지는 벚꽃길 선진리성의 지명은 조선 후기 수군이 전선소를 설치하면서 선진, 선소로 불리게 된다. 구한말에는 화계, 1914년 행정구역 재편성때 선진이라는 지명을 다시 되찾게 되었다. 여기서 선진이 화계로 불리운것은 당시 만개한 벚꽃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고려 초 기록을 보면 동국여지지 사천현 고적조에 고통양창이라는 것이 나온다. ▲ 이충무공 사천해전 승첩기념비 인근에서 거둔 조세를 조정에 받치기 위하여 모우는 12조창 중 하나로 그 규모가 3.086척이라는 기록을 볼 때 이미 이곳은 비록 성곽의 규모를 갖춘 성은 아니지만 거두들인 조세를 모우고 지키기 위해서 큰 건물과 외곽을 경비할 성곽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냥 가져온 조세를 창고에 넣어두고 병졸 몇 명으로 지킨다는 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모든 정황을 근거로 볼 때 당시 조세창을 경계하기 위하여 일부 토성이 아니거나 토성을 겸한 바깥 담장이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일본은 패전을 통해 퇴각하는 과정에서 집결지를 물색하는 도중 일본과 가깝고 바다와 바로 연계되는 이곳에 적당한 방패역할을 하는 담장까지 갖추고 있으니 금상첨화가 아니었을까? 선발된 왜병은 이곳 기존 담장을 따라 토성을 보충하거나 더 연장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선진리성 출구에서 바라 본 벚꽃터널 지금의 벚꽃은 무술전투 당시 왜장 도진의홍(島津義弘)의 후예(後裔)들이 이곳을 매입해서 공원을 만들고 정상에 사천신채첩지비라 새긴 비석을 만들고 주변에 벚꽃을 심었지만 해방직후 주민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지금은 사천해전승첩비가 서 있고 전몰자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충령비와 매향비가 산 정상에 우뚝 서 있다. 선진리성 벚꽃은 노쇠하나 이제 선전리성을 향하는 도로변 벚꽃이 화려한 터널을 연출하면서 탐방객을 맞이하고 있다. 선진리왜성에서 조금 떨어진 사천 대방진굴항 남일대해수욕장을 빠져나와 연륙교 입구에서 굴항을 잠시 찾아간다. 거북선 처녀출전지 사천해협과 선진리성 그리고 거북선과 함께 알려진 사천 선소는 외지인이 잘 모르고 스쳐가는 코스 중 한곳으로 사천 각산 자락 200년 이상 된 팽나무와 소나무가 숲을 이룬 병선의 정박지로 만든 인공항이다. ▲ 대방진 굴항 전경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3호 대방진 굴항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시대 말에 남해안에서 극성을 부리던 왜구를 막기 위해 설치한 군항시설의 하나이다. 왜구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설치한 구라량영의 소속으로서, 임진왜란 때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수군기지로 이용 하였다 한다. 현재의 굴항은 조선시대 순조 때 진주병마 절도사가 진주목 관하 73개 면의 백성을 동원하여, 돌로 둑을 쌓아 만든 1820년경에 완공한 것이다. 남해 창선도와 적향첨사와 군사적 연락을 취하던 기지로, 당시에는 300여의 수군과 전함 2척이 주둔하고 있었다 한다.” ▲ 대방진 굴항에는 주민의 배들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 선박의 보수와 특수 목적의 선박 대피 및 정박을 하는 군사적 목적의 바다내 내륙으로 물길을 끌어들여 만든 것이 굴강(掘江)이며, 전국적으로 5~6곳에서 확인되지만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은 대방진이며, 선소가 아닌 굴항으로 부르고 있다. 대방진 굴항은 해안에서 눈을 씻고 바라봐도 찾을 수 없을 만큼 육지 안으로 물길을 끌어다 만들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거북선에 달라붙는 굴을 제거하기 위해 민물을 채우고 숨겨 놓았던 곳이라고도 하지만 정확한 근거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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