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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 전설의 사찰 황룡사지

허영꺼멍 2010. 8. 10. 16:16

 

 

 

 

 

 

 

 

 

천년고도를 상징하는 황룡사9층탑을 만들고 불심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던 선덕여왕의 의지가 담긴 황룡사는 천년고도의 몰락과 함께 긴 세월동안 침묵하다 금당지와 초석이 확인되면서 새롭게 천년의 꿈을 이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황룡사는 신라 제일의 사찰로 월성 동쪽 용궁의 남쪽(지금의 구황동)에 위치했다 전한다. 진흥왕 14년(553) 대궐을 짓기 위해 공사를 하던 중 황룡이 출몰하여 사찰을 만들고 황룡사로 불렀는데 무려 17년이 소요된 569년에 국찰의 면모를 완성했지만 사찰의 모든 전각이 소실과 파괴로 사라져 버리고 중문, 탑, 금당, 회랑, 강당 등의 주요 건물 초석만 확인되고 있다.

 

황룡사는 구층탑의 장륙존불과 솔거가 그린 금당벽화가 있었으며, 자장이 보살계본을 강설하고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을 연설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나라의 길흉화복이 있을 때면 왕이 친히 친행하여 백고좌강회를 통해 불보살의 가호를 빌었지만 효소왕 7년(698) 벼락으로 소실된 후 다섯 차례 중수를 하였지만 고종 25년(1238) 몽고군 침략으로 소실된 후 재건을 하지 못하고 영영 사라져 버렸고, 1064년 심초석에 있던 사천왕상이 조각된 사리함을 도굴 당했지만 회수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황룡사의 중심은 거대한 높이의 구층목탑(225척/ 81m)이 위용을 과시했다. 기록에 의하면 자장이 당나라 유학 당시 태화지를 지나갈 때 신인이 나서 “황룡사 호국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으로 돌아가 그 절에 9층 목탑을 세우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구한이 와서 조공하며 태평할 것이다”는 말에 따라 선덕여왕 12년(643) 귀국하여 왕에게 청하여 탑을 세웠는데 탑은 백제의 명공 아비지가 만들고 용춘이 주관하였다. 완공된 탑은 외부로부터 침략을 막기 위해 9개 나라를 상징하는 탑을 조성하였으며, 총 높이 225척이며, 탑에 진신사리 100립을 봉안했다. 9개 나라는 아래층부터 일본, 중화, 오월, 탁라. 응유, 말갈, 단국, 여적, 예맥 순이다.

 

황룡사 금당에 모셔진 장륙존상은 장륙의 석가여래삼존상을 중심으로 좌, 우 10대 제자상 및 2구의 신장상을 모시고 있다. 장육존상의 조성과 관련된 이야기로 서천축 아소카왕이 석가삼존불을 만들기 위해 철 5만근과 황금 3만 분을 모았지만 만들지 못하고 배에 실어 인연이 닿는 나라에서 장륙존상이 만들어 질 것을 발원하고 설계 모형을 함께 싶어 보냈는데 진흥왕 35년(574) 경주에서 주조하여 만들고 그 후 몽고군 침입으로 성덕대왕신종 보다 4배가 큰 범종과 함께 소실되어 버렸다.

 

최근 황룡사지 복원과 함께 의문이 남는 점이 있다. 문헌기록상 월성 동쪽에 있는 황룡사라면 지금의 위치는 월성 북동쪽으로 분황사지와 겹쳐 있고 바로 인근에 미타사지가 있어 그 중간에 황룡사가 있다는 것은 이해가 어렵고 불국사 사적기에 따르면 용궁(왕궁) 남쪽에 황룡사가 있고 북쪽에 분황사가 있다는 기록으로 볼 때 미탄사지와 분황사 사이에 황룡사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면 과연 지금의 황룡사지는 어떤 곳일까 하는 궁금증이 더해진다. 미탄사지의 일부이거나 분황사지의 일부로 보기에는 턱없이 넓은 공간이다 는 점은 곧 천년고도 경주의 궁궐에 의혹의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다. 불교로 나라를 다스린 신라에서 내불당이 함께하는 대궁궐이 있었다하여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황룡사는 처음부터 사찰로 만든 것이 아니라 궁궐을 짓기 위해 공사도중 황룡이 발견되었다는 점은 곧 궁궐에 내불당을 만들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사찰 공사기간으로는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다는 사실 또한 의문이다. 궁궐이 아니고는 오랜 시간이 소요된 공사는 옛 기록상 없다. 신라가 아무리 불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하여도 동양 최고 사찰 터로 추정될 만큼 경주 중앙 2만여 평에 사찰 터는 분명 아닐 것이다.

 

신라 진흥왕 14년(553)월성의 동북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사찰로 고쳐 짓게 하여 절 이름을 황룡사라 하였다고 한다. 574년 주존불인 금동 삼존불을 만들고, 선덕여왕 14년(645)에 자장의 권유로 백제 기술자인 아비지를 초청하여 9층 목탑을 완성시켜 4대 93년간에 걸친 공사를 마무리했다. 이후 고려 고종 25년(1238)몽고의 침입을 받아 불타버린 후, 옛 터만 남아있던 것을 사역내 민가 100여호를 이주시키고, 1976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서 8년간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원래 황룡사 대지는 25,000평에 달하는 늪지를 매립하여 마련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사찰의 건물은 남북으로 일탑식 절 배치를 기본으로 하고, 금당의 좌우에 거의 같은 규모의 건물이 나란히 세워져 이 건물 역시 금당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을 밝혀졌다. 출토된 유물은 4만여 점에 달하며 모두 우수한 작품들이다.(황룡사지 안내판 인용)

 

또한 분황사 앞(남쪽)에서 황룡사지를 잇는 곳에 1기의 당간지주가 있는데 이 당간지주는 분황사 당간지주로 추정하면서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유형문화재 제129호)로 기록되어져 있다. 즉 황룡사, 분황사, 미타사가 각기 하나의 독립된 사찰로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이상한 모습이 된다. 결론은 왕궁을 중심으로 미타사와 분황사 그리고 황룡사 및 주변에 많은 사찰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