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마곡 추갑사"라는 말이 있다. 봄에는 마곡사가 으뜸이요, 가을에는 갑사가 제일이란 뜻이지만 꼭 런 것만은 아니다. 갑사에서 맞이하는 봄도 만만치 않다. 4월말 피어나는 홍매화의 아름다움이나 5월부터 짙어만 가는 녹음숲길은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갑사의 사계는 항상 풍족함을 누릴 수 있게 해 준다. 갑사는 국립공원 계룡산이 품은 또 하나의 사찰로 대조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동학사가 영혼을 달래는 곳이라면 신원사는 산신령께 제를 올리는 곳이요 갑사는 무사를 양성했던 사찰로 제각기 특색을 갖추고 있다.
백제 구이신왕 원년(420) 고구려 아도화상이 세운 것으로 화엄종 10대 거찰로 알려져 있는가 하면 임진왜란 당시 영규대사가 의승병 800명을 배출하는 등 갑사는 승려들이 무공이 세다는 것 때문에 일제당시 특별 관리를 할 정도였다. 오리숲에 들어서면 산책로를 따라 노거수가 에워싸고 계곡은 소리 내 어 중얼거린다. 가을에 만나는 계곡은 그야 말로 압권이다. 계곡이 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갑사의 계곡에는 찻집이 있다. 어느 사찰을 가봐도 찻집이 있기 마련이지만 갑사의 찻집은 뼈대가 있다는 점 이 다르다. 못 하나 쓰지 않고 조선후기 윤덕영이 지었기 때문이다.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눈앞에 갑사강당이 가로막고 길을 좌우로 열어 놓는다. 강당은 승려들이 불경을 공부하거나 법회를 여는 공간이지만 강당은 대웅전 뒤에 자리 잡는데 갑사는 유독 입구에 자리하고 오른편은 종각과 계곡으로 향하고 왼편은 범종각이 자리 잡고 부속 전각이 있다. 갑사의 본존인 대웅전은 정유재란(1597)에 불타고 선조37년(1604)에 다시 세워 고종12년(1875)애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은 원래 대적전 인근에 있던 것을 다시 세우는 과정에 옮긴 것으로 추정되며, 본존불로 석가여래불을 두고 좌, 우에는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불을 모셨고 건축은 다포계방식으로 외관을 화려하게 치장하였지만 특이하게 다포식 건물에서는 흔하지 않은 맞배지붕을 올려놓았다.
해탈문으로 들어서면 사모지붕의 종각이 자리 잡고 있다. 문을 열고서 종을 바라보면 갑사 동종의 위엄을 느낄 수 있다. 동종의 종신부는 두 마리의 용이 네다리와 몸체로 종을 매다는 고리를 만들어 놓고 그 아래는 다양한 표현이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선조17년(1584)에 제작된 것을 확인 할 수 있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당시의 갑사는 갑사사(岬士寺)로 불린 것을 알 수 있다. 동종은 일제수난을 통해 한차례 위기를 맞이한다. 당시 헌납이라는 명목으로 공출된 것을 광복 후 갑사로 옮겨온 것이다. 동종은 총 높이가 127cm, 입지름이 91.5cm로 신라이후 동종의 기법을 반영 하고 있지만 소리가 나는 융통이 없는 등 조선시대 특징도 함께 있다. 조선 선조 2년에 간행된 월인석보 판본31권은 세종29년(1447) 수양 대군이 만든 석보상철과 세종 31년 간행한 월인천강지곡을 합쳐서 엮은 것으로 석가의 일대기와 공덕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갑사에 소장된 월인석보는 전24권 중 21권의 목판으로 57장이었는데 현재 31 장이 전해진다. 판목은 원래 충청도 한산지 죽산리 백계만의 집에서 판각하여 논산군 불명산 쌍계사에 보관하여 왔는데 일제 강점기에 갑사로 옮겨왔다. 보관중인 전각은 일반인 출입이 금지되는 법당 내 건물로서 직접 목판본을 확 인할 수 없다. 절 뒤 팔상전 앞에서 보면 건물이 보인다.
팔상전은 석가모니와 신중탱화를 모신 곳으로 다포식 건물을 짓고 팔상전을 마련하였다. 팔상전으로 오르는 길은 사찰 왼편을 따라 오르면 되지만 보통 사람들이 찾지 않아 고너적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표충원이 팔상사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담장 끝이 이미 팔상전으로 가는 길목을 조성하느라 담벼락이 곧 도로가 되어 버렸지만 원만한 곡선미를 자랑하면서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모아 활약한 서산대사 휴정, 영규대사 영정을 모신 곳이다. 영조14년(1738)에 강시영이 전각을 만들고 대원군의 사원철폐령으로 폐쇄된 후 고종 31년(1894)에 복원하여 갑사에서 관리하고 있다. 경내 우측에는 정인보가 지은 글을 바탕으로 한 의승 장연규대사기적비가 있다.
사찰 경내를 벗어나 동학사로 넘어가는 계곡으로 접어들면 약사여래가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 갑사의 약사여래불이 영험하여 많은 신도가 찾는 곳으로 고려중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래 갑사 사자암 뒤편에 있던 불상을 옮겨 놓은 것으로 한 손에 약병을 들고 있어 약사불임을 알 수 있으며, 무속인 마저 자주 찾아 이 일대가 어수선하다. 갑사 대적전은 공우탑을 돌아 나와 갑사 부도 앞에 자리 잡고 있는 전각으로 석가모니불과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모시고 있다. 원래 대적전의 자리는 대웅전이 있던 자리로 지금도 전각 좌측 편에 당시 사용했던 한 단의 쇠시라가 새겨진 주춧돌들이 제 위치에 일부 남아있다.
갑사부도탑은 뒤편 계룡산자락에 쓰려져 있던 것을 1917년 대적전으 로 옮겨 놓은 것이다. 다른 부도와는 달리 파손이 심하지만 조각의 형태가 뚜렷하고 세부 양식이 잘 표현되어져 고려시대 부도탑 중 우수한 부도탑으로 평가된다. 중사자암에 방치된 부도를 옮겨다 놓았지만 정확하게 누구 부도탑인지 명문이 새겨져 있지 않아 확인할 길이 없다. 부도탑에는 강한 표현을 하단부에 집중적으로 시작하여 상승하면서 강직함은 줄어들고 보편화된 부도탑의 특성을 따르고 몸돌 4면에 자물쇠가 달린 문과 사천왕입상이 새겨져 있다.
부도탑을 내려서면 대나무 숲이 우거져 터널을 이루고 앞을 가려 놓는다. 건너편에 뭐가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길을 따라 대나무 숲을 빠져나오면 하늘을 금방 뚫어 버릴 것 같은 큰 기둥이 서 있다. 도대체 무슨 기둥이 저리도 높을까 싶어 다가서 보면 목조로 만든 당간지주도 아니요, 돌로 만든 석당간지주도 아닌 무쇠로 만든 철당간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철당간은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현재 24개 마디만 남아 있지만 33범천을 형상화 하는 33개의 마디를 올렸다 하니 지금보다 더 높다는 것이다. 철당간은 절 입구에 깃발을 세우는 장대로 당간이라고 부르며, 당간을 고정하는 부분이 지주로 당간지주라 부른다. 사라진 철당간 부분은 고종 30년(1893) 7월 25일 벼락으로 네 마디가 소실되었다. 철제당간은 직경이 50cm로 서로 연결하여 높게 쌓아 올렸다. 철당간은 오랜 세월을 거쳐 오면서 신기하게도 계곡의 습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녹슬지 않는 점이 신비로울 따름이다. 철당간의 조성은 문무왕 20년(680)으로 추청하고 있지만 정확한 근거가 없다.
갑사길을 내려서면서 서둘러 가을을 만나고픈 충동을 느낀다. 맑은 계곡을 따라 수놓는 붉은 단풍잎의 아름다운 모습을 상상하면서 계곡에 잠시 머물러 본다.
불교유적으로 갑사삼신불괘불탱(국보 제298호), 갑사철당간및지주(보물 제256호), 갑사부도(보물 제257호), 갑사동종(보물 제478호), 선조2년간월인석보판목(보물 제582호), 갑사석조약사여래입상(충남시도유형문화재 제50호), 갑사석조보살입상(시도유형문화재 제51호), 갑사사적비(충남시도유형문화재 제52호), 갑사강당(충남시도유형문화재 제95호), 갑사대웅전(충남시도유형문화재 제105호), 갑사대적전(시도유형문화재 제106호), 갑사소조삼세불(시도유형문화재 제165호), 영규대사묘(충남시도기념물 제15호), 갑사표충원(충남문화재자료 제52호), 갑사삼성각(충남문화재자료 제53호), 갑사팔상전(충남문화재자료 제54호), 갑사중사자암지삼층석탑(충남문화재자료 제55호), 영규대사비(충남문화재자료 제56호), 천진보탑(충남문화재자료 제68호)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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