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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울주] 천전리각석 ~ 반구대암각화 2.4km 구간

허영꺼멍 2013. 8. 22.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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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아름다운 하천 100선

스토리 워킹 태화강 그 첫번째 길

"선사문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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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고서원 유허비(3기)는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3호로 반고서원 앞 계곡을 건너 언덕 위에

계곡천 주변에는 국보 제285호인 반구대 암각화를 비롯하여, 국보 제147호 천전리각석, 울산광

역시 유형문화재 제13호인 반고서원 휴허비와 함께 반구대암각화 박물관, 천전리박물관 등 많

은 이야기 꺼리가 길을 따라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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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전리각석에서 반구대 암각화는 2.4km 산길을 따라 산책을 하며, 옛 선사시대 이야기룰 나눌 수

있는 자녀와 함께 여행하기 좋은 코스이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가볍게 대곡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유물을 전시한 대곡박물관은 1999년~2004년에 걸

쳐 발굴조사 후 2005년 유물을 체계적으로 전시할 필요성을 느껴 2007년 10월 착공을 시작하여 20

09년 준공 2009년 6월 24일 개관, 1층은 제1전시실, 체험학습실,기획전시실을 두고, 2층은 로비전

시실, 제2전시실, 시청각실을 야외에는 하삼정유적의 무덤을 조성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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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코스는 천전리각석 입구에 주차를 해 놓고 천전리각석~천전리공룡발자국~천전리계곡을 둘러

본 후 공룡발자국 옆으로 나 있는 오르막 목재데크길을 따라 오르면 반구대 암각화로 이어진다. 숲

길이 끝나는 지점에는 반구대암각화 박물관으로 이어지며,  반구대암각화 박물관에서  반구대까지

간 후 되돌아 가는 약 5km 스토리 워킹 코스로 오르막이 없어 아이들도 쉽게 따라 이동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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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전리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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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미술관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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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 천전리 각석은 국보 제 147호로 1970년 12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암각화 유적이다. 천

전리 암각화는 대곡천변에있는 바위면을 다듬어 새겼는데 약 15도 가량 경사진 형태의 바위면에 각

종 동물모양과 동심원, 나선형, 음문, 마름모와 추상적인 문양, 역사시대에 새겨진 돛을 단 배, 말과

용 등의 가는 선 그림, 신라시대 명문 등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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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로 추정되는 날카로운 금속도구를 이용하여 그어서 새긴 암각화는 " 말을 끌거나 타고 있

는 인물상, 돛을 단 배, 말 등의 행렬" 을 이루고 있으며, 용그림 등도 확인되는  고대 미술의 진수

를 만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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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대 백악기 퇴적암류인 자색셰일층인 각석은 너비 9.5m, 높이 2.7m의 큰 암벽과 그 옆으로 작

은 암벽전면에 새겨놓은 암각화 중  제일큰 암반면은 상단과 하단으로 다소 다른모습의 기하학적

문양이 확인되고, 그 중에서도  신라화랑도가 각석 위 또 다시 그들의 흔적을 남겨놓아 시대를 달

리하면서 추가된 암각화로 역사적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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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여수 오림동에서 확인된 사람모양을 제외하고 우리나라 암각화에서는 거의 사람을 찾아보

기 드문데 이곳 천전리각석과 반구대암각화에 확인이 되고 있으며, 화랑도가 그린 그림은 날카

로운 철재류를 이용하여 가늘게 그린 반면 화랑도를 제외한 그림은 선이 굵고 정교하지 않은 것

으로 보아 화랑도 그 이전 날카로운 도구가 없던시절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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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전리 각석은  바위 위나 큰 절벽, 동굴 안 벽면 등에 사물이나 기호를 쪼기, 새기기, 칠하기 등

의 기법으로 그린 그림을 바위그림 즉,  암각화라 부른다. 바위그림은 후기 구석기 시대의 유적

에서도 발견되지만,  전형적인 사례들은 신석기 및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주로 확인되고 있는 풍

요와 다산 제의의 산물로 이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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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명문은 "을사, 기미" 등을 통해 6세기 초의 기록으로 추정되며, 명문은 크게 법흥왕 동생

인 사부지갈문왕이 을사년(525년) 6월18일 새벽에 천전리로 놀러와 새긴것과, 사부지갈문왕 부인

지물시혜가 남편이 죽자 그리움에 사무쳐 그의 흔적이 남은 천전리계곡으로 어린 아들(훗날 진흥

왕)과 함께 찾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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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화랑이 무술을 연마 하면서 남겨놓은 흔적으로 행렬도와 다양한 그림 그리고 글씨(명문)들

로 글씨를 통해 화랑이 무술을 연마하는 이곳을 왕과 왕비가 행차 후 기념으로 기록한 암각화를

 보면 을사년(법흥왕 12년/525)에 갈문왕이 이곳을 유람할 당시 이름이 없어 "서석곡"이라 부

르고 글자를 적게 하자 사각형의 책모양을 만들고 300여자를 통해 당시 근황을 옮겨 놓고, 그 후

갈문왕 사후에 지몰시혜비가 그리움에 글씨를 남긴곳을 찾아 기록을 남긴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화폭에 담겨질 정도로  울산에서 뛰어난 절경을 자랑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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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전리각석 바로 앞

대곡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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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곡천은 천전리각석을 휘감고 곧장 넓은 계곡을 형성하면서 반고서원 앞을 거쳐 반구대암각화

앞으로 흘러가는데 천전리각석과 반구대암각화 그 중간이 옛날 수렵활동하기 좋은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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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전리 각석 앞

천전리공룡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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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전리 공룡발자국 화석은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6호로 약 1억년 전 전기 백악기시대에 중대형

공룡의 발자국으로 울트라사우르스 급인 한외룡을 비롯 용각룡 열마리의 발자국, 중형 초식공룡인

조각류 이구아나룡에 속하는 고성룡(고성사우르스) 한 마리의 발자국 등 200여 발자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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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로 거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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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전리각석과 공룡발자국을 거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산길을 따라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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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로 접어들기 전 나무목재 데크에서 바라본 천전리 계곡의 늣여름 풍경으로 오른쪽에 천전리

암각화가 있는 바위가 경사면을 따라 깍여 있고, 중간에 물이 흐르며, 건너편 암반지층에는 공룡

발자국이 산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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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을 따라 이동 시작하려는데 반구대암각화로 이동하는 여행객이 거의 없어 이동로 안전 확보

가 쉽지 않다. 특히 뱀이 나올까 걱정을 하면서 조심스레 이동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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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하면서 내려다 본 천전리각석의 모습. 비바람을 잘 피해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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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곡을 벗어나면서 만나게 되는 반구대암각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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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암각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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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대암각화로 가는

길목에서 만나는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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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을 빠져 나오면 건너편으로 고래형상 지붕을 하고 있는 반구대박물관이 나온다. 우선 박물관에

들러 암각화 조형물을 먼저 관람하는게 좋다. 정작 반구대암각화에 도착하면 그림을 볼 수 없기 때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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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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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청정은 원래 고려 말 정몽주(1337~1392)선생님께서 한번 시를 쓴 후, 이름난 구역이 천고에

깊이 감추어진 것을 애석히 여긴 경주최씨의 정자로 운암 최신기가 세운 정자로 세월이 흘러

최신기의 14대자손(장손 최원식)들이 한국 효 정신을 가르치는  예절방으로 장소를 제공하여

집청정을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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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고서원 앞 계곡 암반에 옛 시인과 묵객이 즐겨 찾아 수많은 이름과 비문을 남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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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고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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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고서원 유허비(3기)는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3호로 반고서원 앞 계곡을 건너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어 일반인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다. 비는 고려 말 충신 정몽주(1337~1392)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있다. 비석이 이곳에 위치하게 된 것은 고려 우왕 1년(1375)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을 당시 중국 명나라를 배척하고 원나라와 친하게 지내려는 친원배명 정책에 반대하다 언양

으로 귀양살이를 하게되었는데 그 당시 반구대를 자주 찾아 "중양절감회" 라는 시를 남기는 등

그 흔적이 남아있어 반구대를 포은대로 부르기도 하였다.   반고서원은 고종 8년(1871) 홍선대

원군에 의하여 철폐되었으며, 그 후 유림들이 포은대영모비(1885), 포은대실록비(1890), 반고

서원유허비실기(1901) 3기를 세웠으며, 1965년 오늘날 자리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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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 대곡이 연로개수기는 차 한대가 겨우 너머 갈 수 있는 벼랑길 언덕에 위치해 있다. 대곡천 가

장자리 바위면에 새겨진, 일종의 마애기로 훼손이 심한편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명문을 통해 길의

이름이 연로였다는 것과 더불어 1655년 이전에 이미 길이 개설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옛 지명 연로

는 벼루길로 주변 바위가 벼루처럼 미끄러운 바윗길, 벼루에서 음차 한 벼랑길, 사대부들이 수시로

드나들던 학문길 등의 의미로 해석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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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 대나무 숲길을 지나자 마자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계곡 앞 바위에 공룡 발자국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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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곡리 공룡발자국 화석은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 13호로 약 1억년 전의 전기 백악기시대에

하천평야지대에 살았던 공룡의 발자국으로  용각류 팔용과(Brachiosauridac) 에 속하는 60톤급

공룡과 조각류 이구아나과에 속하는  고성룡족 등 24여 개 발자국이 경상계 하양층군 사연리층

중회색 사질이암층에서 확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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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발자국을 떠나

조금 이동하면 눈 앞에 펼쳐지는 오늘의 마지막 여정이자 목적지에 도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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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대암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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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강의 물줄기 대곡천 중류 기슭 한반도 암각화를 대표하는 울산광역시 반구대암각화는 현재까지

밝혀진 자료만 무려 75종 200여점으로  다양한  당시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 대백과사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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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각화는 가로 8m, 세로 2m, 높이 3.6m의 암면에 "ㄱ"자 형태로 1965년 울산시의 공업용수 공급을

위해 사연댐을 만드는 과정에 물속으로 수장되어 인근의 천전리각석 보다 훼손이 덜한 상태로 고래

, 개, 늑대, 사슴, 호랑이, 여우, 곰, 멧돼지, 토끼, 여우, 거북, 물고기, 사람이 새겨져 있는데 암각화

를 세분화 하면 동물 중  멧돼지의 교미중인 모습과 임신한 모습, 성기를 노출한 사람, 그물에 걸려

든 고기,  작살에 찔린 고래, 내장을 그린 모습, 탈을 쓴 무당 등 당시의 시대상을 윤곽선을 돌출하

기,  안쪽 파내기를 통해 입체적으로 쪼아낸  흔적을  통해 더욱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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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암각화 중 고래가 유독 많이 그려져 있는데 단순한 고래가 아니라 다양한 고래종류를 새겨놓은

것으로 지금은 찾기힘든 향고래를 2마리 새긴것은 학술적으로도 중요한 자료이며, 다양한 방법으로

고래를 포획하는 장면은  선사시대에 이미  장승포 부근은 고래잡이가 성행하였음을 말해주며, 우리

나라가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고래잡이를 하던 포경국가 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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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영도구 동삼동패총에서도 고래뼈가 조개더미에서 발견과 함께 기원전 6000년 도구를 이용하여

포경을 하였음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암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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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는 북방긴수염고래, 흑등고래, 귀신고래, 범고래, 돌쇠고래, 돌고래, 향고래 등으로 우리나라를

회유하는 고래가 주종을 이루며, 추가로 발견된 암각화를보면 동일 크기의 두 마리 고래와 누워있는

호랑이 그림으로 고래2점, 호랑이 2점, 사슴 1점, 인물 1점 등 6점이 추가되어 세계 암각화에서 가장

표현력이 뛰어나고 고래 종류까지 파악되는  유일한 암각화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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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대 암각화에서 고래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다.  그만큼 암각화에  50여 마리에 이르는 고래의 다양

한 모습이 놀라움 그 자체로 고래의 종류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고래수염과 이빨, 머리모습, 등

지느러미 등 상세한 기록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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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고래는 목 아래 짧은 홈을 25개 표현하였고, 혹동고래는 폭이 넓은 주름을 그렸으며, 북방긴수염

고래는 수증기를 내 뿜고, 향고래는 사각형의 머리를, 범고래는 등과 배를 암각 돌출로 명암을 주었는

가 하면,  돌쇠고래는 등지느러미를 앞쪽에, 돌고래는 등 중앙에 지느러미를 상세하게 새겨놓고 고래

등에 새끼를 업고 다닌다는 암각화는 새끼라는 표현보다는 지나가는 큰 고래 위에 작은 고래가 지나

가는 모습을 수면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 아닐까 싶은데 그 이유로는 새끼를 등에 업고 다니는 고래

로서 돌고래에 속하는 살쾡이가 있지만 고래 그림은 앞면주둥이가 상당히 뾰족하다는 점으로 미루어

살쾡이는 머리가 둔탁한 모습을 한 둥근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고래가 새끼를 업고 가는 것은 해당

되지 않고 임신한 고래로 상상한다는 것은 고래 머리에 새끼를 임신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상식선

을 벗어나는 것으로 수면 위에서 아래로 본 고래의 모습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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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울산에는 많은 고래가 살았던 것으로 짐작하게 하는 암각화로 1899년 근대포경의 역사가 열리

지만 이미 앞선 시대에 무기를 가지고 고래를 잡았던 것을 증명하고 있다. 한반도 포경은 경남 거제

도, 장생포, 함경도, 강원도에서 포경업이 1947년까지 성행하였지만 미국의 압력에 의하여 1978년

국제포경위원회인 I. W. C에 가입하며 고래잡이는 중단되고 동해 앞바다에는 고래가 거의 멸종위기

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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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마치고 다시 출발점에 도착하니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하늘이 어둡고

빗방울이 굵어졌다. 집중호후에 갇혀버린 상태로 겨우 빠져 나오니 언양시내는 빗방울 하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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