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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산책로 - 서악지구 문화유산 1부 서악산 자락에서 만나는 문화유산

허영꺼멍 2015. 8. 2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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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서악동 1125-1     

경북 경주시 서악지구 문화유산

태종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신라 무열왕릉(사적 제20호)-서악리고분군(사적 제142호)-서악동귀부(보물 제70호)-김인문묘-김양묘-도봉서당-서악동바위구멍유적-서악동삼층석탑(보물 제65)-서악동마애여래삼존입상(보물 제62)-서악서원(경남 기념물 19)

 

 

경주 시내를 들어서기 전 4번국도 태종무열왕릉(경북 경주시 서악동 1008-1 )에서 잠시 멈춘다. 해가 지기에는 아직도 제법 시간의 여유가 있었고 사실 선도산(390M) 정상에 있는 경주 서악동 마애여래삼존입상(보물 제62)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전에 한번 방문을 하였으나 보수작업 중이라 그냥 내려 선 후 매번 경주를 가면 다시 찾고픈 곳이었다.

 

▲ 선도산 중턱에서 바라 본 경주 남산 방향 전경. 안개가 잔뜩 몰려온다.

 

태종무열왕(김춘추, 재위 654661)은 김유신, 김인문과 함께 당나라 세력을 통해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진 인물로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재위기간 654-661)으로 등극한다. 김유신과 교분을 쌓은 김춘추는 김유신의 누이동생 김문희와 정략결혼을 하여 김유신과 처남 매부지간이 되며, 자신의 딸이 머물던 대양성이 642년 무너지면서 사위부부가 죽자 김춘추는 복수를 다짐하며 고구려 연개소문을 만나 동맹을 제의하지만 거절당하고 일본과 동맹 역시 실패하자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백제를 무너뜨린 후 고구려를 치려는 준비를 하던 와중에 죽음에 이르고 서악동 구릉 지역에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태종무열왕릉 주차장에 주차를 한 후 여행코스 동선을 따라 서악지구 내 태종무열왕릉-서악리고분군-김인문묘-김양묘-도봉서당-서악동바위구멍유적-서악동삼층석탑(보물 제65)-서악동 마애여래삼존입상(보물 제62)-서악서원순으로 여행을 시작한다.

 

태종무열왕릉 입구에 도착한다. 무열(武烈 603~661)왕은 김춘추이다. 재위 기간이 654~661로 진지왕의 손자로 이찬(伊飡) 용춘(龍春 또는 龍樹)의 아들로 태어났다. 진덕여왕이 승하하자 왕위계승자로 일천이 천거되지만 덕행이 부족하여 김춘추에게 천거하면서 52세 나이에 진골출신으로 최초 신라 제29대 왕이 되어 김유신과 함께 수많은 우여곡절을 통해 삼국대업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죽음 그 사후에 만든 태종무열왕릉비와 태종무열릉 그리고 누구의 무덤인지 알 수 없는 선도산 고분군이 한 울타리에 있는 태종무열왕릉으로 들어선다. (신라는 골품제도가 있었고 양가부모가 왕족이면 성골, 한쪽이면 진골로 분류하였다.)

 

 

경주 태종무열왕릉비

 

왕릉으로 들어서면 처음으로 만나는 태종무열왕릉비는 왕릉으로부터 조금 앞에 떨어져 세워져 있다. 국내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는 무열왕릉비를 세운 거북받침돌(龜趺 귀부)과 사라진 몸돌 위 세우는 머리돌(螭首 이수)에는 섬세한 용을 그려냈고 그 속에 태종무열대왕지비라 새겨놓아 이곳이 태종무열왕릉임을 말해주는 단서이기도 하다.

 

▲ 전각에 보호중인 경주 태종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

신라 무열왕릉으로 향하는 입구 오른편에 위치한 경주 태종무열왕릉비(국보 제25)는 받침돌 길이 330m, 너비 248m, 높이 88cm, 머릿돌 높이 110cm이다. 경주 태종무열왕릉비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비석은 신라 태종무열왕(재위 654~661)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무열왕릉의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비의 몸돌은 없어지고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용을 새긴 머릿돌만 남았다.

 

받침돌에 조각된 돌 거북은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으로 신라인의 진취적인 기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머릿돌의 좌우에는 여섯 마리의 용이 서로 세 마리씩 뒤엉켜 여의주를 물고 잇는 모습을 조각하였다. 앞면 중앙에는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이 쓴 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글이 돋을새김 되어 있어 비의 주인공을 밝혀주고 있다. 이 비는 표현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있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양권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이다.”

 

 

 

사라진 비문은 태종 무열왕의 둘째였던 김인문이 글을 적었다하지만 사라져 버렸고 오늘날 국보 제25호로 지정되어 있다. 거북모양의 귀부와 세 마리씩 총 6마리의 용이 측면을 장식한 이수가 전해지는데 귀부의 거북은 금방이라도 동해바다로 성큼 나아갈 듯한 기상을 보여주며, 거북 목 부분에 보상화문을 조각하여 신분을 말해주고 있다.

 

▲ 비석 지붕인 이수 정면 부분 하단 중앙에 새겨져 있는 명문을 통해

이 비석이 태종무열왕릉비임을 밝혀졌다.

▲ 태종무열대왕지비

 

▲ 이수 뒷부분 조각

이수부분이 두 동강이나 있는데 중심에 보면 전서형식으로 양각하여 신분을 명확하게 기록 해 놓은 82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는 양각으로 새겨진 두전(頭篆)의 글씨로 삼국시대 이전에는 그 예가 없는 서체이다.

 

김인문의 글씨라 하지만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를 통해 무열왕 사후 그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귀부(龜趺)의 길이 약 3.33미터, 2.54미터, 이수(螭首)의 높이 약 1.1미터이다.

 

비석 받침돌로 거북 형상을 하는 것은 장수를 상징하며 5천살 먹은 거북을 신귀(神龜), 1만살 이상을 영귀(靈龜)라 하며 거북 모습을 주로 사용한다. 1936년 인근 서악서원에서 일부 비석 파편을 수습하여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 발가락 5개 모습

▲ 발가락 4개 모습

 

거북돌에서 이상한 조각을 만날 수 있다. 앞발은 발가락이 다섯 개, 뒷발은 네 개다. 거북 발가락이 앞 뒤 동일한데 왜 이런걸까? 석공의 실수였을까? 이에 관하여 일부 주장으로 뒷발 발가락 하나가 무거운 이수를 받치기 위함이거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뒷발에 힘을 주는 형상으로 발가락 하나를 안으로 집어넣었다는 것이지만 이 또한 의문이다. 여기서 한가지로 무덤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신분이 확인되면 으로 부르며,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지만 누군지 모르면 그리고 당시 큰 인물이면 라 부른다.

 

 

왕릉 앞에는 국내최고 걸작으로 알려진 태종무열왕의 비(국보 제25)를 모신 건물이 있다. 생동감이 넘치는 거북등에 정교한 조각으로 귀갑문과 비운문 등 다양한 문양을 새기고 비신은 사라져 버렸지만 이수는 6마리용이 양쪽 3마리씩 반결쟁주하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화려함과 정교함을 더해주며, 피장자의 신분을 과시하는 한편 중앙부에 높이 42 cm, 33 cm 네모공간을 만들고 전서체로 "太宗武烈王之碑(태종무열대왕지비)"28자로 양각해 놓고, 비신은 무열왕 둘째 아들 김인문이 글씨를 적었다 전해지며, 사라져 버린 비신은 숭불정책에 의하여 파괴된 것으로 추정되며, 일부 비신의 조각은 경주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태종무열왕릉비에서 주목할 것은 용의 머리에 거북형상을 한 것이 아니라 거북모양을 하고 비석을 짊어진 상태로 이수를 올리는 중국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최초의 비로 기록되고 있다. 귀부 높이는 1.03 m, 길이 3.8 m, 2.49 m, 이수() 높이 1.06 m, 1.36 m, 두께 0.36 m, 비좌(碑座) 1.73×0.86 m이며, 도로 건너편 김인문의 비와 거북이 발가락 숫자만 다를 뿐 거의 유사하다.

 

 

신라 무열왕릉

 

▲ 신라 무열왕릉 (사적 제20호)

▲ 측면에서 바라 본 신라 무열왕릉 전경

구역 내 제일 앞에 뚝 떨어져 있는 1기의 릉으로 이를 신라 무열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 무열왕릉은 사적 제20호이며,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능은 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재위, 654~661 김춘추)을 안치 한 곳이다. 경주 북서쪽에 있는 선도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구릉의 말단부에 위치해 있다. 김춘추는 신라 중대의 첫 진골 출신의 왕으로 삼국통일을 이룩하려고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병합하고 통일 대업의 기반을 닦았으나 통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능은 밑둘레 114m, 높이 8.7m 로 비교적 큰 편이며 능 아래쪽은 자연석을 쌓고 드문드문 큰 돌로 받쳤으나 지금은 흙 속에 묻혀 있다. 동쪽에는 비석을 세웠던 돌 거북과 머릿돌이 나왔는데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이 쓴 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글씨가 돋을새김 되어 있어 이곳이 무열왕의 능임을 알 수 있다.”

 

 

서악리고분군

 

▲ 신라 무열왕릉을 지나 오르는 서악리고분군

 

무열왕릉을 지나 산자락을 따라 자연스럽게 지형이 조금씩 높아진다. 제일 위 큰 무덤1기와 그 아래로 3기 그리고 오늘날 무열왕릉이라 부르는 1기 등 총 5기의 고분이 일직선상에 조금 거리를 두고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 제일 높은 지점에 위치한 고분

서악리 고분군은 사적 제142호이다. 신라 태종무열왕릉비를 거쳐 들어서면 만나는 고분군으로 이 고분군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고분은 선도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의 능선에 위치하는데, 흙으로 원형이나 타원형이 되도록 둥글게 쌓아 올린 대형고분이다. 이곳에 있는 고분들이 누구의 무덤인지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무열왕릉 뒤편에 잇는 것으로 보아 무열왕과 가까운 왕이나 왕족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된다.

 

봉분 높이는 15m 미만이지만 밑둘레가 110~140m 로 비교적 큰 편이다. 여기처럼 구릉지에 있는 봉분들은 대게 돌방무덤으로, 평지에 있는 고분들이 돌무지덧널무덤인 것과 비교된다.”

 

 

무열왕릉비를 지나 곧장 만나는 릉이 태종무열왕릉이며, 그 뒤로 4기의 대형 고분이 줄을 잇고 있어 궁금증을 자아낸다. 묘를 조성할 때 부모님 앞으로는 묏자리로 잡지만 뒤로는 잡지 않는 게 우리나라 전통 묘 방법이고 보면 제일 앞에 있는 것이 무열왕릉이라면 뒤에 세 개의 고분은 무엇이란 말인가. 제일 앞에 있는 고분 역시 정확하게 무열왕의 고분임을 100% 주장할 수 없는 것이 무열왕릉비로부터 가장 가까운 은을 무열왕릉으로 지정하였기에 어쩌면 무열왕릉을 보호하기 위해 헛무덤이거나 가장 위에 있는 무덤이 무열왕릉의 무덤일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는 상황으로 오늘날 이 무덤을 서악고분이라 한다.

 

태종무열왕(김춘추, 재위 654661)은 김유신, 김인문과 함께 당나라 세력을 통해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진 인물로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재위기간 654-661)으로 등극한다. 김유신과 교분을 쌓은 김춘추는 김유신의 누이동생 김문희와 정략결혼을 하여 김유신과 처남 매부지간이 되며, 자신의 딸이 머물던 대양성이 642년 무너지면서 사위부부가 죽자 김춘추는 복수를 다짐하여 고구려 연개소문을 만나 동맹을 제의하지만 거절당하고 일본과 동맹 역시 실패하자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백제를 무너뜨린 후 고구려를 치려는 준비를 하던 와중에 죽음에 이르고 서악동 구릉지역에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김인문의 묘 그리고 귀부, 김양묘

 

무열왕릉을 나와 4번 국도를 건너면 김양 묘(808~857), 김인문 묘(629~694), 서악동 귀부(보물 제70)가 위치하고 있으며, 김인문의 묘비가 1931년 서악서원 영귀루 서편 근처에서 원형 크기의 3분의 1 크기인 잔석(殘石)으로 발견되어 현재 경주 국립박물관에서 소장되어 있다. 비문에는 28행 약 4백자가 새겨진 3.3cm 크기에 해서체로 음각해 놓았다. 

▲ 김인문 비로 추정되는 귀부

 

김인문(629694)은 문무대왕의 친동생으로 삼국대업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한 능력자이기도 하다. 20대에 당나라에서 좌령군위장군이 되는가 하면 신라로 돌아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킬 당시 당나라 협조를 얻어 내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로 신라가 아닌, 당나라에서 관직을 거치다 효소왕 3(694) 죽음을 맞이하였고 당 고종은 신라로 시신을 수습하여 보내니 효소왕은 태대각간이란 벼슬을 내리고 서악에 장사를 치렀다고 한다.

 

▲ 보물 제70호 경주 서악동 귀부

 

경주 서악동 귀비는 보물 제 70호이다. 통일신라시대(7세기)로 추정되는 경주 서악동 귀부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거북 모양의 받침돌은 신라 태종무열왕(재위 654~661)의 둘째 아들로 삼국통일에 큰 고을 세운 김인문(629~694)의 묘비를 세웠던 것이다. 받침돌에 있는 돌 거북은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와 비슷한 양식으로 네 발을 힘 있게 나아가면서 목을 앞으로 길게 빼고 있다.

 

앞 뒷발의 발가락이 모두 다섯 개인 것이 다를 뿐 기교면에서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와 쌍벽을 이루고 있으며, 목에 새겨진 다섯 가닥의 목주름은 사실적이면서도 자연스럽다. 거북의 등에 새긴 큼직한 육각무늬 역시 조각솜씨가 뛰어나며, 등 주위에 구름무늬를 새긴 것과 그 바깥쪽에 구슬을 꿰놓은 듯한 무늬를 돌린 것은 독특하다. 등에는 비석을 받쳐 세웠던 직사각형의 구멍이 뚫어져 있다. 비의 몸돌과 머릿돌은 없어졌는데, 1931년 서악서원에서 비석 조각이 발견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귀부는 7세기 귀부 양식의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용머리로 변화되기 이전 귀부의 원형을 지니고 있어서 한국석비 받침돌의 초기 양식이라 할 수 있다.”

 

▲ 김인문의 묘

김인문 묘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32호이며,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무열왕릉 동쪽 평지에 위치하고 있는 이 무덤에는 김인문(629~694)이 안치되어 있다. 김인문은 신라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며 문무왕의 친동생으로, 23세에 당나라에 가서 벼슬을 하다가 돌아와, 무열왕을 도와 김유신 장군과 함께 삼국을 통일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당나라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요소왕 때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 태대각간이라는 관직을 추중하고 서라벌의 서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1931년 서악서원에서 김인문의 비석 조각을 발견하여 이곳이 그의 무덤임을 확인하였다. 무덤 밑둘레 82m, 지름 29.9m, 높이 6.5m로 겉모양은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형태이며, 부근에 비석을 세웠던 거북모양 받침돌이 있다.” 김인문의 묘는 한 때 김유신의 묘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서악서원에서 발견된 비석의 크기가 현재 서악동 귀부로 불리는 거북돌과 확인한 결과 비신 홈과 비촉의 크기가 일정하여 거북돌의 주인이 김인문으로 추정하며, 이로서 가까운 무덤이 김인문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 김인문의 묘 앞에 자리 한 석비

 

김인문(진평왕 51(629)-효소왕 3(694))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 문무왕의 친동생으로 외교관 역할을 하였는데 공으로 65123세 나이로 좌령군위장군 직함으로 당나라에 파견되고 658년 나당연합을 결성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공을 인정받아 효소왕은 태대각간에 추증하였다. 그 후 당나라에 머물면서 분쟁을 해결하는 중재역활을 맏아온 인물로 효소왕 3(694) 4월 당나라 수도에서 죽음을 맞아하자 유해를 신라로 호송 하였으며 태대각간으로 추증하고 경주 서악동 서쪽에서 장례를 치렀다.

 

▲ 김양 묘

 

김양은 태종무열왕의 9세손이자 충신으로 현재 김인문묘를 김양의 묘로 알려져 있다가 서악서원에서 비문 파편이 수습된 후 가장 가까운 묘를 김인문 묘 그리고 뒤에 있는 작은 봉분의 묘를 김양의 묘라 부르고 있을 뿐 정확한 묘의 주인은 알 수 없는 상태이며, 김양의 묘가 왜 이곳에 있는지도 의아할 따름이다. 태종무열왕과 아들인 김인문 묘 사이에 9세손의 무덤이 있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지 않는가.

 

만약 이 고분이 김양의 고분이라면 그 앞에 있는 오늘날 김인문의 묘가 김유신 묘라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김양의 장례를 놓고 문성왕은 장례식을 김유신과 같이 하라는 명을 내리게 된다. 가정을 한다면 김유신과 태종무열왕 그 사이 들어선 것은 왕손이 신하였던 김유신 앞으로 묘가 들어서는 것은 신분적 이유로 이 두 사람 사이에 들어선다면 이해가 되지만 지금은 도대체 정확한 근거도 없이 무작위로 고분이 지정되어 있는 듯하다.

 

▲ 주차장에 본 전경. 왼편으로 서악동 귀부, 김인문의 묘 그리고 김양 묘 가 자리잡고 있다.

 

김인문의 묘 뒤에 잇는 김양 묘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 33호이다. 김양의 묘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무덤은 김양(808~857)묘로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형태이다. 무영왕릉 동쪽에 김인문묘와 나란히 위치해 있다. 김양은 무열왕의 9세손으로 여러 벼슬을 지내면서 나라에 공헌하였으며, 신무왕이 된 김우징을 도와 민애왕의 뒤를 잇게 하였고, 다음 왕인 문성왕도 받들었다. 그 후 헌안왕 때 김양이 세상을 떠나자 대각간을 추증하고 무열왕릉 곁에 장사 지냈다고 한다.”

 

경주시 서악동에 자리한 신라 왕족 김양은 태종 무열왕 9대손으로 흥덕왕 3(828) 고성 태수로 부임 한 후 무주도둑을 거쳐 830년 장보고 세력에 힘입어 민애왕을 죽이고 신무왕을 추대하고 신무왕이 죽은 뒤 문성왕을 다시 모셨지만 문성왕 19(857) 50세 일기로 죽음을 맞이하고 무열왕릉 앞에 묘를 조성하지만 일제 강점기 당시 철도로 도로를 내면서 무열왕릉과 김양의 묘 사이를 반으로 갈라놓았다.

 

제1편 무영뢍릉 그리고 주변 고분편
제2편 도봉서원 그리고 만나는 마애석불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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