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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심트레킹 - 경주 오릉~ 대릉원(천마총)

허영꺼멍 2015. 8. 27.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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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경북 경주시 오릉, 대릉원이야기

 

 

신라 오릉

 

▲ 숭덕전으로 향하는 길에서 본 홍살문(지금은 정문이 폐쇄되어 있다.)

 

경주IC를 통과하여 제일먼저 만나는 문화유산 신라오릉은 사적 제175호이며, 경주 남산 자락 서북쪽 평야에 위치한 신라 초기의 박씨 왕들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이 릉에는 5명의 왕릉이 모여 하나의 릉처럼 보이는 독특한 구조로 신라시조였던 시조 박혁거세왕,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 등의 초기 네 분과 박거세왕의 왕후 알영부인의 릉으로 알려져 있다.

 

▲ 오릉 안내판, 한자 투성이다.(안내문 조차 한문으로 할 이유는 무엇인지 묻고 싶다.)

 

▲ 오릉으로 향하는 초입길 주변 수목

왕릉으로 향하는 첫 문은 아름드리 숲 사이 버티고 있는 삼문이다. 삼문을 열고 들어서면 정면 5칸에 맞배지붕을 올린 규모가 큰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공간인 삼도가 릉 앞에 자리 잡고 앞으로 오릉 중 가장 큰 묘가 보인다.

 

국내 릉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소나무이다. 특히 오릉에서 만나는 소나무의 모습은 신비스럽기조차 하다. 릉을 향해 알현하는 듯 자라는 소나무는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릉의 모습도 다양하게 그려져 경이롭기까지 하다.

 

 

오릉으로 향하는 길 좌우 숲길이 오랜세월 이 구역을 신성시 해 왔음을 말해주고 있다. 팔월말에 방문한 신라오릉은 길을 따라 붉은 배롱나무가 도열하고 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으며, 초록 나뭇잎은 가을이 코 앞에 와 있지만 여전히 푸르기만 하다.

 

▲ 오릉 전경

19690827일 오릉(五陵)의 크기를 측정하는 작업 결과 크기순으로 높이가 제110m, 29m, 37.2m, 43.6m, 51.8m로 확인되었다. 측정 당시 1기의 고분 형태가 표주박형 모습이다. 삼국사기에는 시조 혁거세를 담암사(曇岩寺 *삼국유사는 담엄사(曇嚴寺)로 기록하고 있다.) 북쪽 사릉(蛇陵)에 장사지냈으며, 2대 남해차차웅, 3대 유리이사금, 5대 파사이사금을 사릉원(蛇陵園) 내 장사지냈다는 기록과 삼국유사에는 혁거세왕 혁거세신화조에 61년간 왕으로 있다 승천한 뒤 7일 만에 왕의 유체(遺體)가 흩어져 떨어지고(世傳王升天七日後五體散落), 알영왕후도 따라 돌아가니 신하들이 각각 흩어진 유체를 모아 장사를 지내려니 큰 뱀이 나타나 방해하여 흩어진 대로 매장하니 5개의 오릉이 되었다 하며, 구렁이 관련된 능이라 하여 사릉(蛇陵)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한다.

 

▲ 삼문(오릉 구역 내 삼도 앞에 위치한 삼문)

▲ 삼도(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건물)

 

묘가 이처럼 함께 모여 있는 경우는 초기 신라 매장 풍습으로 유복한 사람이 묘 곁에 매장하면 후손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가족장이 당시 성행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오릉은 정확한 기록에 근거하면 시조 혁거세를 시작으로 2,3,5대왕 까지 확인이 되는 것으로 볼 때 오늘날 오릉이 아니라 사릉이어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알영부인까지 합치면 오릉이 되는 것인가? 경주에서 만나는 수많은 고분은 왜 고분 내 표시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아직 원형봉토분 형식의 고분에 관한 발굴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정확하게 누구의 무덤인지 밝혀진 내용은 없다.

 

▲ 고분 주변 숲

 

고분군 옆 소나무 숲이 수풀로 무성하다. 왜 고분 주변을 말끔하게 단장하지 않느냐 반문하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역대 시조의 능침(陵寢)에 밭을 일구거나 나무하는 것을 금했다 하는데 조선 영조36(1760) 편찬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당시 경주부 관하에서 혁거세왕릉역에 관하여 나무를 베거나 밭갈이 하거나 땔나무 벌채를 일절 금지하였다 한다.

 

(赫居世陵官禁田柴)

 

▲ 뒤에서 바라 본 오릉

오릉은 제1호 봉분을 전방으로 자리 잡고 뒤편에 표주박형 봉분이 2개인 무덤, 그리고 뒤편에 작은 봉분 2기가 있으니 총 5기이다.

 

그럼 이곳에 묻혀 있다고 추정되는 인물로 박혁거세와 알영부인,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이라면 각각의 무덤으로 추정 할 수 있지만 이 또한 정확한 근거는 없어 보인다.

 

▲ 얼영이 탄생하였다는 연못

▲ 알영정

오릉을 지나면 시조왕의 위패를 모신 숭덕전과 알영부인의 탄생지로 알려진 알영정 터가 자리 잡고 있다.

 

숭덕전은 조선 세종 11(1429) 지어졌지만 임진왜란 당시 소실된 후 선조 33(1600) 재건, 숙종 20(1694) 수리, 경종 3(1723) 숭덕전 사액을 받았으며, 영조 35(1759) 혁거세왕과 숭덕전 내력을 세긴 신도비를 세웠다. 숭덕전 뒤로 박혁거세 부인인 알영부인이 태어났다는 전설의 알영정이 자리하고 있다.

 

▲ 알영정

 

알영정(閼英井)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알영정은 신라시조왕비 알영(閼英)부인께서 탄생한 곳이다. 기원전 69년에 한 노구가 이 우물에 물을 길러 갔더니 우물가에 큰 용이 있어 놀랐다. 그 용 옆구리에서 귀녀가 탄생하기에 수양(修養)한바 용모가 단미(端美)하고 총명. 지혜하여 시조왕비가 되었다. 신라 시조왕 재위 61년간 내보(內輔)가 지대하였고 권유농상(勸諭農桑)하고 무흘빈민(撫恤貧民)하여 이성(二聖)으로 존경을 받았다. 천강성배(天降聖配)하였다.” 안내하고 있다.

 

▲ 숭덕전

▲ 숭덕전 입구 삼문

 

 

 

숭덕전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4호이다. 숭덕전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숭덕전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한 건물로 조선 세종 11(1429)에 지었으나 선조 25(1592)에 불탔다. 동왕 34(1601)과 광해군 1(1618)에 다시 지었고 숙종 30(1704)에 고쳤다. 경종 3(1723) 숭덕전이라 편액을 걸었는데 현재의 모습은 영조 11(1735)에 고친 것이다.

 

 

홍살문 안쪽으로 영승문과 숙경문을 지나면 숭덕전이 위치하고 있다. 숭덕전은 앞면 3칸 옆면 2칸인 맞배집이다. 왼쪽에 상현재, 오른쪽에 동재가 있다. 영숭문의 왼쪽에 시조왕의 신도비와 비각이 있다. 숭덕전 옆에는 연못이 있고 그 뒤에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라는 비와 비각이 있으며 뒤에는 알영정이 있다.”

 

▲ 팔월 말에 만난 오릉 전경

 

신라오릉을 나서면서 경주에서 만나는 릉에 관하여 정확한 매장자의 확인없이 한결같이 누군가의 릉으로 추정하는 그럴 것이다 ~ 라는 추정을 할 뿐이지만 일부 찾은 방문객은 거의 단정적으로 신라오릉은 초기신라 왕의 무덤이라 말한다. 아직까지 고분에 관하여 발굴기록도,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통해 단지 담암사(曇岩寺)에 장사를 지냈다는 기록에 의존 할 뿐이다. 우리의 문화재는 우리 스스로가 호기심을 가지고 한발 가까이 다가서면서 이해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자료가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신라 대릉원(천마총)

 

대릉원을 방문하기 위해 주변 공터에 주차를 한 후 걸어서 매표소로 향한다. 신라 왕릉 중에서 정원을 거닐 듯 산책하며 문화유산을 탐방할 수 있는 곳으로 오릉과 대릉원 그리고 계림을 빼 놓을 수 없다. 특히 가을철 단풍든 고분 샛길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무더운 여름 열기가 마지막 기승을 부릴 즈음 배롱나무 꽃에 반하여 팔월 마지막 주 대릉원 빗장을 열어본다.

 

▲ 대릉원 주변 역사탐방 지도

 

경주 고분을 대표하는 대릉원은 미추왕릉, 황남대총, 천마총 등 촐 23기의 고분이 모여 있는 일대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이 사후 대릉에 장사 지냈다 하여 대릉원이라 한다. 대릉원 내 고분 중 유일하게 개방된 고분이 천마총으로 1973년 발굴하면서 자작나무 껍질에 천마를 그린 유물이 확인되면서 천마총이라고도 부른다.

 

▲ 신라 미추왕릉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만나는 전경

 

대릉원은 1970년 복원을 통해 공원화 사업으로 아름다운 능선 사이로 고분산책로를 조성하고 잔디를 심었다. 주변 길을 따라 배롱나무와 소나무를 옮겨 심는 등 최대한 무덤의 능선이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조경하였으며, 2000년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경주역사유적지구 5곳 가운데 하나로 등록되었다.

 

▲ 미추왕릉

 

대릉원 내 유일하게 담장으로 보호하고 있는 신라 미추왕릉은 사적 제175호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능은 신라 제13대 미추왕(재위 262~284)을 모신 곳으로, 대나무가 병사로 변하여 적군을 물리쳤다는 전설에 따라 죽현흥이라고도 한다. 미추왕은 김알지의 후예로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이며, 여러 차례 백제의 공격을 막아내고 농업을 장려하였다. 높이 12.4m, 지름 56.7m로 둥글게 흙을 쌓은 형태이며, 경주시내 평지고분 가운데에서도 대형분에 속한다. 내부 구조는 돌무지덧널무덤일 것으로 추정된다. 능 앞에는 화강석으로 만든 혼이 머누는 자리인 혼유석이 있다. 특이하게 담장을 둘러 무덤 전체를 보호하고 있으며 조금 떨어진 무덤 앞쪽에는 위폐를 모신 숭혜전이 있다.”

 

▲ 천마총

 

경주 대릉원 일원 사적 제 512경주 황남리 고분군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경주시내 황남동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신라초기의 무덤들로 일부는 대릉원 구역 안에 있다. 일제강점기에 붙여진 일련번호 50~114, 151~155호인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30기의 무덤이다. 큰 무덤은 돌무지 덧널무덤이고 주변에는 봉분이 없어진 작은 무덤이 있다. 대릉원 안에는 미추왕릉을 비롯하여 천마총과 황남대총 등이 있다. 1973년에 발굴조사된 천마총은 지름 47m, 높이 12.7m로 금관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나왔다. 당시 천마도가 그려진 말안장 드리개가 출토되었기 때문에 천마총이라 이름하여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또한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조사된 황남대총은 남북길이 120m, 동서길이 80m, 높이 23m의 거대한 쌍무덤으로 남쪽 무덤에서는 금동관과 남자의 뼈 일부 및 많은 유물이 나왔다. 북쪽 무덤에서는 금관과 부인대라는 글씨가 있는 과대 등 많은 유물이 나왔다. 남쪽 무덤의 주인은 남자, 북쪽 무덤의 주인은 여자로 부부의 무덤으로 붙여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천마총과 황남대총을 발굴 할 당시 박정희 대통령 및 김종필 총리가 직접 방문하여 발굴을 독려했다. 당시 하루 인건비로 600원이였지만 발굴에 투입된 인원만 무려 1200명이였다. 발굴 중간단계에 금관을 막 들어 낼 무렵 맑은 하늘에서 뇌성과 벼락이 치면서 비가 내려 인부들을 공포로 몰아가면서 김씨문중은 미추왕릉 옆을 훼손하는 것에 반대하였고 결국 천마총만 공개하였다. 발굴 당시 해프닝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발굴 중 금이 나오면 청화대로 들고 가서 대통령 금잔에 술을 따라 마시는가 하면, 금관도 일단 박정희 대통령에게 먼저 보여줄 정도라고 전하며, 대릉원 현판도 직접 내걸었다고 한다.

 

 

첨성대 주변 전경

 

 

▲ 첨성대 주변 금계국이 활짝

 

경주 여행 힌트 하나. 대릉원 주변 여행시 문제는 주차전쟁. 요즘은 대로변도 주차비 받음. 조금 넉넉하게 여행을 하고자 한다면 대릉원 주차장 옆에보면 착한가계와 경주할매집 쌈밥집 사이 골목으로 들어가면 주차공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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