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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래구 안락동 421-1 부산 동래구 역사탐방을 떠나다 충렬사-동래시장-동래부 동헌-망미루-송공단-동래향교-서장대-동래읍성지-북문-장영실과학동산-동래읍성역사관-마안산-북장대-3.1운동기념비-인생문-복천동고분군-복천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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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렬사 입구 배롱나무 길 전경
전통있는 문화관광 도시 부산 ‘동래구’ 여행을 위하여 충렬사를 시작으로 동래읍성지, 복천동 고분군, 동래부 동헌 등 도심속에 스쳐가며 만나는 문화유산을 찾아 여행을 시작해 본다. 여행코스는 충렬사-동래시장-동래부 동헌-망미루-송공단-동래향교-서장대-동래읍성지-북문-자영실과학동산-동래읍성역사관-마안산-북장대-3.1운동기념비-인생문-복천동고분군-복천동박물관 순이다.
충렬사
충렬사에 주차를 한 후 배롱나무 활짝 피어있는 길을 따라 들어선다. 임진왜란 당시 부산을 지키기 위해 목슴을 아낌없이 내던진 민관군의 영령을 모신 곳으로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이다. 조선 선조 38년(1605) 동래부사 윤휜이 처음 동래읍성의 남문 내 충렬공 송상현을 모시고 송공사라 불렀는데 인조 2년(1624) 충렬사 사액을 하사받고 효종 3년(1652) 오늘날의 자리로 옮겨와 사원과 서원의 역활을 하고 있으며, 매년 5월 25일 제향을 올리고 있다.
충렬사는 뷰산광역시 유행문화재 제7호이다. 충렬사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충렬사는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 장렬히 순절하신 부산지방 순국선열의 영령을 모신 곳이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전국시대를 무력으로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의 안정과 영토욕을 채우기 위하여 일으킨 침략전쟁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에 대한 정보가 어두워 이들의 침략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있던 터에 조총이라는 새로운 무기로 무장하고 몰려오는 왜적을 막기에는 중과부적이엇으나 우리 선열은 의연한 기개로 적과 싸우다 최후를 맞았다.”
▲ 충렬사 정문에서 바라 본 전경
1709년(숙종 35년)에는 충렬공과 충정공이 순절할 때 함께 전사한 양산군수 조영규, 동래교수 노래방, 유생 문덕겸, 양조한, 비장 송봉수와 군관 김희수, 겸인 신여로, 향리 송백, 부민 김상 등의 위패를 모신 별사를 옛 송공터에 건립하였다. 1736년(영조 12년) 별사에 모셨던 분을 충렬사에 합향하였으며 1772년(영조 48년)에 다대첨사 윤흥신공을 추배하고 임란때 송상현공과 정발장군을 따라 순절한 금섬과 애향을 위해 충렬사 동문 밖에 사당을 세웠다. 충렬사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와 보수를 하여 현재의 경역에 본전 외 15동의 건물이 있으며, 부산지방에서 순절한 93인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5월 25일 온 시민의 정성으로 제향을 올린다.”
▲ 송상현공명언비
송상현공명언비이다. 왜적의 침입 그리고 목숨을 던지며 지켜야 하는 결의가 잘 나타나는 ‘戰死易假道難(전사이가도난)’ 즉,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는 내용을 새겨 놓았다. 이는 일본이 저항하지 말고 길을 터라는 답변 내용이다. |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 충렬사는 전국에 걸쳐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민관군의 영령을 모신 곳으로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위치한 동래 충렬사 역시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선열을 모시고 있다. 조선 선조 38년(1605) 동래부사 윤휜이 처음 동래읍성의 남문 내 충렬공 송상현을 모시고 송공사라 불렀는데 인조 2년(1624) 충렬사 사액을 하사받고 효종 3년(1652) 오늘날의 자리로 옮겨 오늘날까지 사원과 서원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매년 5월 25일 제향을 올리고 있다.
▲ 소졸당
소줄당은 임진왜란 당시 왜적과 싸우다 순국한 선열의 위국충절과 호국정신을 후세에 알리기위해 효종3년(1652) 세운 강당으로 소줄당이란 한유의 이제송에 나오는 "소호일월 부족위명, 줄호태산 부족위고"의 머리글로 임진란 선열의 충정은 일월보다도 밝고, 태산보다도 높다는 뜻이다.
▲ 소졸당과 마주하고 있는 기념관
기념관 내에는 임진왜란 당시 상황을 그려놓은 기록화 6장면과 당시 갑옷과 투구 외 고서와 유품 102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비록 현재 남아 잇지 않지만 안락서원 모형도를 제작해 놓았다.
▲ 네명의 여인을 모신 의열각
▲ 충렬사 정화기념비
▲ 충렬사 본전으로 오르는 입구 ▲ 충렬사 본전 건물
▲ 본전에서 바라 본 충렬사 로터리 방향 도심 전경
임진왜란 당시 동래지방 출신으로 창의모병하여 왜적과 싸우다 장렬히 순절한 선무원종공신녹권에 등재된 공신 가운데 역전토적에 전공이 혁혁한 24ㅁ별전공신의 공적비로 1988년 5월1일 제막하였다.
▲ 군관청으로 향하는 산길에서 만난 이정표
군관청으로 오르는 길은 충렬사에서 따로 통제하는 곳이다. 입산통제구역으로 매년 11월 1일~ 다음 해 5월 31일까지 통제가 되며, 입장시간은 오전 09:00~16:30분 까지이며, 산길을 따라 오르면서 군관청을 거쳐 동래읍성지로 오른다.
▲ 군관청 건물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1호 군관청은 충렬사 내 위치한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한 조선시대 동래부사청 건물 중 하나로 군관들이 군사일을 보던 곳으로 1982년 오늘날의 자리로 옮겨졌다.
▲ 군관청
1675년(숙종 1)에 동래부사 어진익이 중창하였고. 이루 숙종 연간에 두차례 고쳤으며, 1982년 해체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1812년(순조 12)에 동래부사 조정철이 다시 증축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는 관아 건물로서의 기능을 잃고 오래동안 방치되었다. 해방 이루 주변의 도시화로 고층 건물들에 가리게 되어 좁은 공간에 다시 보수하더라도 보존과 활용이 어려워지자, 1982년 충렬사 경내로 옮겼다. 규모는 정면 6칸, 측면 2칸이며, 부연이 없는 흩처마로 된 팔작 지붕의 단층집이다. 정관청과 함께 부산지방에 남아 있는 대표적인 관아 건축 가운데 무청으로서 희소가치가 큰 건물이다. 원래 수안동 신한은행 자리에 있었으나, 훼손되고 활용이 곤란하자 1982년 충렬사 경내로 옮겼다.”
▲ 동장대 전경
▲ 충렬사 내 연못 의중지
충렬사에서 도로를 따라 동래고등학교를 지나 동래시장으로 향한다. 그리고 동래시장에서 만나는 동래부동헌과 망미루, 독진대아문을 만난 후 다시 동래시장 뒷편 주차장 방향으로 따르면 송공단이 자리잡고 있다.
동래시장 내 동래부 동헌
동래의 역사를 이야기 하기 이전에 동래는 아주 오랜시절 부터 장산과 아울러 주거 및 장례의식이 있던 곳으로 삼한시대 변진독로국의 옛 터로 신라에 병합되면서 거칠산군으로 그리고 신라 경덕왕 16년(757) 동래군으로 개칭되었다. 동래의 지명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고려 현종 9년(1018) 동래헌, 조선 태조 1년(1392) 동래진, 명종 2년(1547) 도호부 승격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최초 패전지라는 이유로 "현"으로 강등 선조 32년(1599) 다시 도호부 직위를 되찾기도 했다.
▲ 동래구 동헌은 지금 많은 건물이 재건되고 있다.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60호 동래부 동헌은 조선시대 동래부사가 공적인 업무를 보던 곳으로 아헌 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수령이 직접 업무를 처리하던 이곳은 정3품 당상관인 부사가 재임하였고 인조 14년(1636) 동래부사 정양필이 창건, 숙종 37년(1711) 동래 부사 이정신이 충신당 현판을 내 걸은 조선 후기 관아 건축을 잘 반영하고 있다.
동래부 동헌에 관한 건물구조에 관하여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동래부 동헌에는 충신당과 좌우의 연심당과 독경당, 바깥대문이었던 망미루, 외삼문인 독진대아문 등 많은 관아 건물들이 부속되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충신당과 연심당을 제외한 건물들은 철거되었으며, 망미루와 독진대아문은 온천동 금강공원 일원으로 옮겨졌다. 2014년 독경당, 찬주헌을 복원하고, 망미루와 독진대아문을 현재의 자리로 다시 이전해왔다. 동래부 동헌 일곽은 조선시대 부산(동래)의 행정, 국방, 외교, 교역 업무를 도맡았던 제일 관방의 위상을 함축하는 관아시설일 뿐 아니라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한 개혁성론에 따라 근대적 읍성의 축조가 최초로 구현되는 등 조선시대 관방역사와 문화를 함축하고 있는 역사적 장소이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동래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크게 인식되어 효종 6년(1655) 경주진관에 속해 있던 것을 독진으로 독립시키고, 관아도 대대적으로 복구하였다. 동래부 관아는 대원군 집권기까지 빈번히 증.개축되다가 고종 3년(1866) 병인양요를 겪고, 부사 정현덕의 주도로 일본의 침공에 대비해서 읍성과 관아를 대대적으로 증.개축하였다. 그러나 1910년 10월 일제는 오랜 행정중심으로서의 위상과 정통성을 말살하고 일본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부산포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동래부를 없애고 동래군으로 격하시켰다. 동헌의 중심 건물인 충신당은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동래군청 청사로, 1973년 동래군이 양산군으로 편입된 이후에는 양산군 보건소 동부지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 동래부 동헌 충신당
동래부 동헌 충신당은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이다. 충신당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에 동래부사가 공적인 업무를 보던 곳이다. 1963(인조 14) 부사 정량필이 창건하였고. 1711년(숙종 37) 부사 이정신이 충신당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동래군청 청사로, 1973년 동래군이 양산군으로 편입된 이후에는 양산군 보선소 동부지소로 사용 되기도 하였다.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원래는 좌우에 방이 있고 가운데 대청을 두어 수령은 대청에서 공무를 처리햇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군청 등 관청 건물로 사용되면서 벽면, 천장, 마루 등이 개조되었다. 현재 부산지방에 남아있는 조선시대의 단일 건물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유일한 동헌 건물로서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관아건축 양식을 짐작할 수 있는 문화재이다.”
▲ 1872년(고종 8) 제작 '경상도지도' 제2첩에 수록(현 규장각 소장)
동래 동헌 내 공간으로는 독진대아문으로 불리는 외대문을 지나 내대문을 거쳐 충신당을 잇는 일직선상과 동래부동헌의 중심건물 충신당을 중심으로 오른편에 관아 안실림을 맡아하는 동익랑과 왼편에 공물을 보관하는 서익랑을 두고 있다. 내대문 오른쪽으로는 관아 각종 문서를 보관하는 지통고와 관아 관속이 기거하는 내행랑 그리고 죄인을 호송하기 위해 드나들던 염문을 두었다.
▲ 망미루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4호 망미루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누각은 1742(영조 18) 동래부사 김석일이 동래부 청사인 동헌앞에 세운 문루이다. 옛날 한양으로부터 부임해 온 어느 동래부사가 임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이 누각을 망미루로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1919년 동래의 3.1운동은 이 누각에서의 만세 삼창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전면에는 동래도호아문이라고 쓰여진 큰 편액이 걸려 있고, 후면에는 망미루라는 큰 편액이 걸려 있다. 1895년(고종 32) 동래도호부가 동래관찰사영으로 승격됨에 따라 일명 포정사라고도 불렀다. 누각 위에는 동래성 4대문의 여닫는 시각과 정오를 알리는 큰 북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본래 이 누각은 동래부 동헌 앞에 세워졌는데, 1930년경에 금강공원 주변으로 옮겨졌다가 2014년 12월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겨졌다.”
▲ 망미루와 동래부 동헌 중간에 자리한 독진대아문
독진대아문은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5호이다. 이 문은 인조 14년(1636) 동래부사 정양필이 동래부 동헌을 건립할 당시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오늘날 건물은 고종 7년(1870) 동래부사 정현덕이 중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솟을삼문으로 둥아에는 동래독진대아문이라는 현판이 내걸려 있다.
독진대아문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솟을 삼문 중앙에는 동래독진대아문이라 쓴 현판이 중앙에 걸려 있다. 이것은 1655년(효종 6) 동래부의 군사권이 경상좌병영의 지휘 아래 있던 경주 진관 소속에서 독립하여 동래 독진이 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또 아래 좌우의 기둥에는 진변병마절제영과 교린연향선위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 뜻은 동래부가 진변의 병마절제사영이고, 대일외교 때 일본사신을 접대하는 관아라는 뜻이다. 이 문은 우리 고장에 남아 잇는 전형적인 관아 대문이다. 규모는 작으나, 3문형식의 흔하지 않은 건물이다.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1칸이다. 지붕은 솟을대문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천정의 밑에 홍살이 설치된 것으로 보아 원해 외삼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래 동래부 동헌의 대문으로 망미루 뒤쪽에 있엇는데, 1930년경에 금강공원안으로 옮겼졌다가 2014년 8월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겨졌다.”
동래시장 내 도 하나의 건물 송공단
▲ 송공단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11호 송공단은 영조 18년(1742) 동래부사 김석일이 세운 추님 제단으로 임진왜란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이 순절한 정원무터에 설치하였던 것을 송상현을 비롯 동래성을 지키다 순절한 분을 모신 곳이다.
송공단은 처음에는 동서남북의 4단으로 되어 있었다. 북단에는 송상편, 조영규, 노개방 등을, 동단에는 유생 문덕겸 등을, 서단에는 송상현의 첩 금성 등을, 남단에는 향리 송백 등을 모시었다. 매년 음력 4월 15일 관에서 제사를 올렸다. 1760년(영조 36)에 동래부사 홍명환이 사림의 공의에 따라 부산첨사 정발과 함께 전사한 이정헌을 모셨다. 1766년(영조 42)에는 다대첨사 윤홍신을 모셔와 함께 제사를 지냈다. 이후 동래성에서 전사하지 않은 분들은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되었다. 이에 다대포에서 순절한 분은 윤공단, 부산에서 순절한 분은 정공단으로 옮겨 배향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부터는 매년 순절일인 음력 4월 15일에 동래기영회에서 향사를 지내고 있다. 2005년 11월에 1767년 충렬사지 기록의 모습대로 복원하여 현재 7단 16기로 구성되어 있다. 정단에는 충렬공 송상헌 순절비, 동단에는 조영규.노개방을 , 서간에는 문덕겸 등을, 별단에는 송상현의 첩 금섬 등을 모시고 있다.”
이어서 제2편 동래향고 그리고 동래읍성지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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