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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심트레킹 - 부산 동래구 역사탐방 제2편 (동래향교-동래읍성지-복천동고분군)

허영꺼멍 2015. 9. 9.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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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래구 안락동 421-1      

부산 동래구 역사탐방을 떠나다

충렬사-동래시장-동래부 동헌-망미루-송공단-동래향교-서장대-동래읍성지-북문-장영실과학동산-동래읍성역사관-마안산-북장대-3.1운동기념비-인생문-복천동고분군-복천동박물관

 

 

 

동래향교를 만나다.

 

▲ 동래향교 입구 전경

동래향교는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6호이다. 동래향교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향교는 1392(태조 원년)에 교육진흥책으로 전국에 향교를 세울 때 설립되었다.

 

첫 건립은 동래읍성의 동문 밖(동래고등학교 자리)에 세웠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5(선조 38) 동래부사 홍준이 중건한 뒤, 여러 차례 장소를 옮기면서 중건되었으며, 1813(순조 13) 동래부사 홍수만이 지금의 자리에 옮겼다.

 

지금 이곳의 지명인 명륜동은 향교가 이곳에 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향교는 고려시대에 시작되어 조선시대 말까지 이어져 내려온 지방 교육 기관이다.”

 

▲ 강학공간인 명륜당

향교 건물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향교의 건물 구조는 유교의 성현을 모신 대성전, 학문을 강의하는 명륜당, 고생들이 기거하는 동.서재, 그리고 성현의 위패를 모신 동.서무, 제사의 기능을 도운 전사청 등의 부속건물이 건립되어 있다. 이것은 중앙의 성균관을 축소시켜 놓은 것 같다. 일반 향교의 건물배치가 대성전과 명륜당이 일직선 상에 있는 것과 달리 동래향교는 대성전과 명륜당이 2열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 명륜당에서 바라 본 반화루 전경

▲ 서재

▲ 동재

 

향교의 정문인 2층 문루를 반화루라고 한 것은 반룡부봉, 즉 성인을 따라 덕을 이루고 임금을 받들어 공을 세우기를 원한다는 뜻에서 따온 것이다. 조선 초기의 경국대전에 의하면, 동래 향교에는 종6품의 교수 1명이 있었고, 학생의 정원은 10명이었다. 또 향교의 유지와 관리를 위한 학전 7결이 지급되었다고 한다. 갑오개혁 이후 새로운 학제가 시행됨에 따라 향교의 교육적 기능은 없어졌다. 지금도 동래 향교에서는 음력 2월과 8월의 초정일에 두 차례에 유림에 의해 향사가 받들어지고 있다.”

 

 

 

사실 동래향교에 관하여 자세한 이야기는 가을 은행잎 노랗게 물들 때 다시 방문하여 동래향교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볼 생각이다. 동래향교는 여느 향교나 서원과는 달리 상당한 은행나무가 주변을 애워싸고 있는데 1760년경 심은 나무로 높이가 18m에 이른다.

 

▲ 강학공간 못지 않은 대성전 공간

동래향교 대성전은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호이다. 대성전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건물은 유교의 성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1392(태조원년)에 교육진흥책으로 전국에 향교를 세울 때 건립되었다. 임진왜란 때 불타고 1605년에 다시 세워진 후 여러 차례 옮겨졌으며, 1813(순조 13)에 부사 홍수만이 현 위치에 동래향교를 이건할 때 가장 먼저 지어졌다.

 

성현의 위패를 모신 동.서무

 

정면 5, 측면 3칸 규모로 익공식이며, 겹치마 맞배집이고, 부속건물로는 동.서무 가 있다. 건물 내부에는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 중국과 우리나라 유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동래향교 대성전은 19세기 초 익공식 건축의 세부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동래향교 내의 여러 건물 중 위계가 가장 높은 건물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축 문화재이다.”

 

 

 

동래읍성지로 오르다

 

▲ 자비암 입구에서 만나는 치성

동래향교를 나와 조금만 이동하면 자비암을 거쳐 동래읍성 치성을 따라 오르는 진입로가 있다. 200712월 성곽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성곽 내부와 외부를 쉽게 통과하도록 임의로 만든 암문을 거쳐 동래읍성지를 따라 오른다.

 

암문을 통과하면서 성내 산책길과 성외 산책길이 이어지며, 산책길 반환점이 되기도 한다.

 

▲ 복원된 서장대

▲ 성루를 따라 이동하면 북문에 도착한다.

▲ 북문

동래 읍성지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성지는 조선시대 동래부의 행정 중심지를 둘러싸고 있었던 읍성이다.

 

충렬사 뒷산에서 미안산을 거쳐 동래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현재의 동래 시가지 중심지역인 평탄지를 일부 포함하는 지세에 전형적인 평산성 형식으로 쌓았다.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읍성이다.

 

삼한시대 이후 동래에는 독로국 등으로 불린 성읍국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 때 이미 성을 쌓았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동래성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에 보이는 1021(현종 12)에 동래군의 성을 수리한 것이 처음이다. 조선시대에 동래부는 대일 외교상 중시되어 관아의 규모도 크고, 격식이 높았다. 3품의 부사가 재임하는 왜적 방어의 제1관문이었다. 1592(선조 25) 4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1차 공격목표가 되어 동래부사 송상헌을 위시한 군..민의 장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최대 격전지이기도 하다.”

 

▲ 북문 앞에 위치한 내주축성비

 

내주축성비는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16호이다. 영조 7(1731) 동래부사 정언섭이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동래읍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1735년 세운 비석으로 비명에 의하면 읍성은 둘레가 약 1.4km, 높이 3.9m17311월 성터 측량 후 경상도 65개 군에서 52,000명의 인원이 동원되어 성을 쌓았는데 당시 완성한 성은 둘레 3.8km, 높이 5.1m였다 한다.

 

내주축성비 안내글 중 비에 관련된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비문의 앞면에는 축성에 관한 사실을 20행으로 기록하고, 뒷면에는 축성에 종사한 한 쌍의 이수가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비대에는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는데. 소박하다. 비문은 황산도 찰방 김광악이 짓고, 송광제가 썼으며, 전자는 현풍현감 유우기의 글씨이다. 이 비석은 동래읍성 연구의 정확한 자료가 되며, 조선 후기 축성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본래 이 비는 동래읍성 남문 밖에 세워졌는데, 1930년경에 금강공원 안의 독진대아문 뒤쪽으로 옮겼다가 201210월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겼졌다.”

 

▲ 산성애서 내려다 본 장영실 과학동산

▲ 장영실 과학동산 내 간의 앞 장영실 동상

▲ 혼천시계 혼천의

장영실 과학동산은 이곳 동래 출신인 조선시대 과학자 장영실을 기리기 위해 살아생전 만든 고천문 의기 19점을 만든 후 200911월 개장하였다. 장영실은 신분제도로 천민이나 관노가 벼슬하지 못하는 당시 동래현의 관노로 태종때 발탁되어 궁중기술자로 있다 세종 3(1421) 세종의 명을 받들어 윤시웅과 최천구와 함께 중국으로 유학길에 올라 다양한 천문기계를 익히고 돌아와 세종 5(1423) 왕의 특명으로 관노가 정5품 상의원 별좌가 되었고 이후 다양한 천문의기 제작을 감독한 인물이다.

 

장영실은 세종이 신병 치료를 위해 이천 온천으로 향하던 중 그가 감독하에 만든 왕의 수레가 부셔져 책임으로 곤장 80대 형과 함께 파직되었다.

 

▲ 북문에서 바라 본 복천동 야외고분군 전경

 

부산시 지정기념물 제5호 동래읍성지는 복천박물관을 품고 있는 곳으로 동래구 명륜동, 복천동(칠산동. 복산동), 안락동에 걸쳐 있다. 동래읍성지는 고려 말 우왕 13(1387) 수축된 성으로 추정하며 선조 25(1592) 임진왜란 당시 부산을 공격하던 왜군의 1차 목표가 되어 송상현 부사가 이끄는 군. . 민과 함께 최대 격전지로 알려져 있으며, 지금의 성곽은 영조 7(1731)에 부사 정언섭이 갱축하였고 일제강점기 당시 파손된 것을 2005년 새롭게 복원한 것이다

 

▲ 북문과 장영실과학동산 그리고 동래읍성 역사관

 

동래읍성 역사관은 동래사적 공원 내 동래읍성문화재 보호 구역을 정비하여 오늘날 동래읍성 역사관20073월 개관하였다. 역사관 내에는 동래구 역사와 함께 장영실과학공원, 야외공연장, 다목적 광장 및 산책로를 갖추고 있으며, 매년 10월 둘째주 동래읍성 역사축제 전투재현을 진행하는 주요무대이기도 하다. 동래읍성은 고려 현종 12(1021) 바다로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수영구 망미동 일대에 쌓은 성으로 왜구의 침략이 심해지자 1387년 오늘날 동래시장 일대로 옮겨온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철거되었지만 동쪽부터 북쪽의 일부 성곽이 남아있어 1979년 이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 백세계단 길

 

 

북장대에서 내려서거나 북문에서 올라가는 길로 백세의 계단으로 불리는 이 계단은 옛부터 이 계단을 밟고 가면 백살까지 무병장수하며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본래 100개의 나무계단이였으나 2001년 보행이 편하도록 높이를 낮추어 249개 돌계단으로 정비하여 백세가 아니라 249살까지 살아야 하는 계단으로 변해있다.

 

▲ 백세계단을 올라 만나는 북장대

동래읍성지는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5호이다. 성의 축성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었던 성을 1731(영조 7)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휠씬 규모가 큰 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 때의 성이 지금 흔적이 남아 있는 읍성의 기원이다. 증축된 성의 규모는 성곽의 둘레가 약 3.8km였다. 읍성에는 동서남북문과 인생문 및 암문이 있고, 각 문에는 문루가 있었다.

 

▲ 북장대에서 바라 본 복천동고분군

 

동문을 지회루, 서문을 심성루, 남문을 무우루, 암문을 은일루라고 한다. 중요한 문루였던 남문에는 익성을 두었는데, 앞쪽의 세병문과 뒤쪽의 주조문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었다. 나머지 3문에도 옹성을 부설하여 적이 성문을 쉽게 공격할 수 없게 하였다. 일제 시대에 시가지 정비계획으로 평지의 성은 철거되고, 산지에만 성곽의 모습이 남아있다. 지금 성내에는 복문, 인생문, 동장대, 서장대, 북장대가 복원되었고, 치성, 여장 등이 부분적으로 복원.보수중이다.”

 

▲ 3.15 의거 기념탑

 

동래구에는 3.1절 만세운동 재현을 할 만큼 1919년 동래지역 사람들이 일본에 맞서 일어난 3.1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마안산 정상 동쪽 산봉우리에 광복 50주년인 1995815일 공사를 시작하여 199631일 공사를 마쳤다.

 

탑은 부지 2,310이며, 높이는 6m이다. 기념탑에는 건립 취지문, 기미독립선언서 공약 3장과 독립운동의 간략한 역사 등이 새겨져 있다.

 

▲ 인생문으로 향하는 산길

 

동래읍성이 있던 일대를 인성문 또는 시시골이라 부르는데 이는 읍성의 성문과 관련이 있다. 동래읍성은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을 비롯하여, 인생문, 암문(비밀문)6개의 문과 각 문에는 문루를 설치하였는데 동문은 지희루, 서문은 심성루, 남문은 무우루, 암문은 은일루로 부르며, 둘레 39십 척 높이 13(둘레 1,962m, 높이 0.5~3m)으로 우물이 6개 있는 평산성형식으로 축조되었지만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읍성이다.

 

▲ 인생문

 

 

 

 

동래읍성 문 중에서 인생문은 임진왜란 당시 인생문을 통해 피신했던 백성이 목숨을 건진 후 사람을 살린 문이라 하여 인생문이라 하였고 피난했던 고개를 지금도 인성고개(인생고개)라 부르며, 인생문을 복원하면서 당시의 글씨를 복원하기 위해 부산시립박물관에 소장된 문명석을 탁본하여 조각하는 정성을 드렸다.

 

인생문은 동래읍성 6대문 중 하나로 본래 이름은 인화문이다. 동래읍성에서 죽은 사람의 시체를 내보던 곳으로 인생무상의 의미로 인생문이라 부른다. 성의 복원을 둘러싸고 말이 많다. 성벽이 헐리고 길이 뚫려버린 세월을 더듬어 복원한 인생문은 복원이란 의미를 상실하고 현실에 맞도록 성곽을 짜 맞추었다고 보아야 한다.

 

▲ 인생문 전경

 

동래읍성지 인생문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동래읍성지는 조선시대 동래부의 행정 중심지를 둘러싸고 있던 읍성이다. 충렬사 뒷산에서 마안산을 거쳐 동래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현재의 동래 시가지 중심 지역인 평탄지를 일부 포함하는 지세에 전형적인 평산성 형식으로 쌓은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부산의 대표적인 읍성이다. 1387(고려 우왕 13) 박위가 왜구를 막기 위해 동래읍성을 쌓은 후 임진왜란 때 많이 허물어졌다.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었던 성을 1731(영조 7)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휠씬 규모가 큰 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때의 성이 지금 흔적으로 남아 있는 동래읍성의 기원이다. 이 성의 규모는 성곽의 둘레가 약 3.8km이고, 6개문과 4곳의 장대가 있었다. 동래읍성 6개문 중의 하나인 인생문(人生門)은 문루 1칸이고, 옹성 한 곳에 보루가 1칸의 시설로서 일제강점기에 없어진 것을 2005년에 복원하였다. 이 문에 대한 전설은 임진왜란 때 이 문을 통해 피난 간 사람은 모두 목숨을 거져 사람을 살린 문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하여 조선전기부터 문()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 문의 편액 글씨는 부산광역시립박물관에 조장된 문명석을 탁본하여 걸었다.”

 

복천동고분군

 

▲ 네모 사각으로 되어 있는 의미는 고분의 위치를 표시하고 있다.

 

동래의 철기문화는 기원전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발굴된 고분은 4-5세기 가야 왕의 무덤이 집단으로 발견되는 동래를 중심으로 북쪽 마안산{대포산)자락에 위치하며 남쪽으로 길 게 뻗어 내린 지형으로 출토된 유물만 하여도 92백여 점 발굴되어 가야사 연구의 초석이 되기도 한다.

 

무덤은 덧널방식부터 다양한 구덩식돌덧널무덤, 앞트기식돌방무덤, 독무덤 등 시대를 막론하고 출토되고 있어 마치 무덤의 박물관으로 착각 할 정도이다.

 

처음 발굴된 퇴기는 경남 함안 도항리고분군(아라가야 고분군), 말산리고분군의 토기와 일본 하지기계토기를 시작으로 창녕토기가 출토되었으며, 철기 출토품이 대량으로 나와 주목받고 있다.

 

철기 출토품으로 미루어 당시 가야사는 철의 왕국임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창원 성삼패총의 경우 철을 만드는 야적장을 비롯하여 발굴된 유물이 철의 종류로 갑옷, 투구, 칼 등 무기류가 단연 압도적으로 당시 철을 이용한 기술은 신라 그 이전부터 상당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복천동 고분군

 

복천동 고분은 현재 박물관을 통해 유물을 전시하고 무덤 일부를 아치형 돔을 만들어 직접 관람하도록 조성해 두었다. 가야사는 삼국시대에 있어 자료가 없는 잊혀진 왕국으로 알고 있지만 최근 복천동 고분을 통해 당시 이곳의 집단세력이 신라권에 소속된 집단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동안 정설로 굳혀온 4세기 김해 대성동 고분군 세력과 연합하여 전기가야의 맹주인 금관가야를 성립하고 5세기에 고구려의 남정으로 김해세력이 쇠퇴하자 금관가야의 패권을 장악 6세기에 이르러 신라에 정복당했다는 것.

 

 

동래 또는 부산지역은 3세기 중반까지 독자적으로 세력을 형성한 존재를 두고 족로국, 거산칠국으로 존재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데 3세기 후반부터 4세기 중엽에 신라에 편입되었기에 복천동 고분군은 4-5 세기고대 부산은 가야가 아니라 신라였다는 주장. 삼국유사를 살펴보면 신라는 3세기 후반(늦어도 4세기 중엽) 동남해안, 북쪽으로 동해안, 낙동강 중류 등 소국들에 대한 복속을 마무리 했다는 것과 5세기 초이래 줄곧 출토되는 신라양식 토기, 신사 금관을 닮은5세기 초의 출자형금동관, 경주 특유의 적석목곽묘와 유사한 4세기 말의 분묘를 증거로 내세우고 있다. 복천동 고분군을 통해 시대를 달리한 무덤문화를 만나면서 인간의 사후세계에 관하여 관습 및 인식 연구에 중요한 전기를 이룬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복천동고분군 야외전시장으로 내부에는 구덩식 돌덧널무덤(53호)과 딸린덧널이 있는 덧널무덤(54호)의 내부를

발굴한 모습 그대로 전시하고 있어 당시 가야의 매장풍습을 엿볼 수 있다.

 

죽음 그 사후의 세계를 전생에 누린 권력을 내세까지 연장시키려는 한 방편으로 한반도 전역에는 다양한 무덤이 지역에 따라 생겨난다.

 

인류가 생긴 이래 처음 만든 것이 고인돌의 역사이고, 외국의 경우 대형급 피라미드가 당시의 엄청난 인력까지 동원해 가면서 만들 정도로 자신의 영화를 알리려고 하는 지배층의 잘못된 판단은 무덤을 무조건 크게 하려고 하였다.

무덤의 크기가 점점 늘어만 간 것은 무덤 속에 안치된 부품속인 보물의 유출 등으로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는데 중국의 진시황의 경우는 아예 그 무덤이 어디 있는지 조차 후세에 알려져 있지 않아 궁금증을 더해주고, 우리나라도 이와 다를 봐 없는데 알려진 경주의 대형급 무덤 외 고령, 함안 등 많은 무덤이 대형화 추세였다. 그 중에서 경북 의성군과 산청군에 있는 돌무덤은 우리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든 돌로 무덤을 세운 특징이 있다.

 

▲ 54호 고분군

▲ 53호 고분군

 

무덤은 고인돌을 시작으로 돌널무덤(석관묘), 독무덤(옹관묘),돌덧널무덤(석곽묘),토광묘가 나타나는데 주로 평지에 사용했던 고인돌과는 달리 점점 산 정상의 높은 지역으로 무덤이 이동하게 되는 과정을 밟게 되면서 화려한 무덤이 등장하게 되지만 우리나라 무덤은 반타원형으로 만들어 졌고 또 지금도 계속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 한국식 무덤의 일반적 특징이다.

 

[덧널방식] 신석기말 중국에서 발생. 목판재 또는 목각재를 4벽과 뚜껑을 만들고 바닥에도 판재와 각재를 깐 무덤 / 덧널무덤은 내부에서 외관과 내관이 들어가기도 하며, 여러 개 덧널이 들어가는 다실묘도 있다. 구덩이를 5미터 이상 파서 부장품을 함께 넣고 있다. [독널무덤] 흙으로 빚어 구운 항아리를 사용한 무덤. 하나 또는 두 개의 독을 연결한 삼한시대의 무덤구조 박물관에 가보면 흔히 있음. [구덩식 돌덧널무덤] 장방형 구덩이를 파고 벽면을 돌과 흙으로 보강하고 그 위에 뚜껑돌을 얹지 않은 것과 얹은 경우가 있다. [앞크기식 돌덧널무덤] 앞 시기의 돌 덧널에 굴식 돌방무덤이 결합한 것으로 가야지역 특유의 무덤. 장방형 구덩식 돌덧널무덤을 만든 후 단벽 한쪽은 추장을 위해 드나들 수 있도록 벽을 헐고 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출입구 돌을 기대어 놓은 무덤.

 

 

 

복천동박물관

 

복천동 고분군은 한때는 보잘 것 없는 마을 뒷동산 정도로 여겼던 곳으로 다양한 시대의 무덤이 발견되면서 소중함을 일깨워준 곳이며, 고분군에서 발굴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복천동 박물관이 고분이 있는 마안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 동래 복천동박물관

 

복천동고분군은 실내전시실 및 야외전시실을 갖추고 가야시대를 비롯한 다양한 유물을 지하2, 지상 3층의 건물에 1전시실, 2전시실, 조사보존실을 두고 지하에는 기획전시실 및 유물보존처리실을 두고 소장유물로 총 7,575점이 있다. 유물 중 발굴유물 6,969, 수탁유물 504, 기증유물 102점이며, 이 중에서 토기 자기류가 229, 금속류 196, 유리 보석류 21, 기타 36점이 전시되고 있다.

 

▲ 고분군 아래 칠산동과 복천동 마을

 

이번 동래지역 문화유산을 따라 탐방을 하면서 여러 가지 아쉬운 것이 많이 있었다. 충렬사에서 군관청을 거쳐 동장대 그리고 인생문을 지나 북장대로 이어지는 동장대 뒷 통로가 열리면 역사탐방 코스가 일직선상에 놓여 접근이 편리하지만 어떤 이유에서 인지 동장대 뒷 통로가 막혀 버렸고, 탐방지에서 만나는 담당직원은 동래부 동헌 담당의 친절과는 대조적으로 휴대폰을 만지작꺼리거나 탐방객이 오던말던 관심도 주지 않는 등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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