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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 불법을 이어가는 속리산 "법주사" | 여행일자 : 2016년 00월 0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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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의 세월 불법이 전해져 오는 속리산 자락 법주사로 향한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니 일단 주차비가 4,000원이며, 입장료가 1인당 4,000원이다. 요즘 사찰 여행을 하면서 가장 부담스러운 것이 입장료이다. 입장료에는 장애인 1급과 2급에 한하여 보호자 1인 무료이며, 사찰 신도증이 없다면 무조건 입구 식당가 앞에 주차를 하고 사찰 탐방에 나서야 한다. 속리산 법주사는 사적 명승지 4호이다) ▲ 법주사 전경
의신조사가 553년 창건하였다 전하는 속리산 법주사는 전성기 당기 약 70여 암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하며, 60여 전각 중 오늘날 30여 전각이 전해져 오고 있을 만큼 우리나라 사찰여행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곳이 아닌가 싶다.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속리산 기슭에 자리 잡은 법주사(길상사)는 한때 무려 3만 명의 승려가 머물렀다 하니 대찰 중에서 대찰로 조선시대 태조가 상환암에서 기도를 한 기록 및 병을 얻은 세조가 복천암에서 용양하며 3일간 법회를 연 기록도 있다. 법주사는 의신 조사가 서역에서 돌아오면서 나귀에 불경을 싣고 법주사에 이르러 주변경치에 취해 사찰을 만들었다 하여 법주사라 부른다는 전설 및 불법이 머문다 하여 법주사라 전한다. 속리산 법주사 입구에서 만나는 속리산 조각공원 ▲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오른쪽 탐방로를 따라가면 1997년 조성한 조각공원이 자리잡고 있다. 조각공원은 숲속 넓은 공간에 걸쳐 이어져 있다. 속리산 법주사로 향하는 길목이자 여름이면 숲 그늘에서 쉬어가는 피서객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다. 숲길 끝자락 사찰의 첫 문이 활짝 열렸다. 보은 속리산 사실기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 속리산 법주사 여행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보은 속리산 사실기비는 현종 7년(1666) 속리산의 내력을 기록한 것으로 비석의 규모는 높이 163cm, 너비 65cm로 우암 송시열 선생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석에 기록한 비문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속리산이 명산임과 세조가 이곳을 행차한 사실 등을 적고 있다. 특히 수정봉 위에 있는 거북바위의 내력을 쓰고 있는데 내용은 당나라 태종이 세수를 하려는데 세숫물에 큰 거북 그림자가 비쳤다. 이상히 여긴 태종이 유명한 도사를 불러 물으니 도사가 대답하되 동국 명산에 큰 거북이의 형상이 당나라를 향하고 있어 많은 당나라 제물을 동국으로 들어가게 하고 있으니 거북 모습의 물형을 없애라 하였다. 사람을 파견하여 곳곳을 찾다가 마침내 속리산 수정동에 있는 돌거북을 발견하고 그 목을 자르고 돌거북 등 위에 10층 석탑을 쌓아 거북의 정기를 눌렀다.’ 한다. ▲ 속리산 사실기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 벽암대사비(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71호)
보은 속리산 사실기비 옆으로 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충청북도 유형문화제 제71호)가 자리 잡고 있다. 법주사 입구 수정교(水晶橋) 앞 바위 위에 있는 조선 중기의 승려 각성의 석비이다. 석비는 현종 5년(1664) 세워진 높이 210cm, 너비 110cm, 두께 35cm로 비문은 정두경(鄭斗卿)이 짓고 이우가 쓰고 이정(李禎)이 새겼다. ▲ 벽암대사비(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71호) 옆 비석 벽암대사비의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선승이며 승병장인 벽암대사는 임진왜란 때에 해전에 참여하였으며, 인조 2년(624)에 조정에서 남한산성을 쌓을 때 8도도충섭에 임명되어 승군을 이끌고 3년 만에 성을 완성시켰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전국 사찰에 격문을 보내 승군 3천명을 모은 후 항마군이라 이름 짓고 남한산성으로 향하였으나, 도중에 전쟁이 끝나 항마군을 해산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 금강문으로 들어서니 사천왕문이 보수중이었다. 사찰 내 국보.보물 불교문화재의 진수를 느끼다. 거대한 쇠솥 철확(보물 제1413호) 석조에서 건너편으로 보면 무쇠밥솥이 자리 잡고 있다. 신라 성덕왕 당시 만들었다는 무쇠밥솥은 당시 이곳에 얼마나 많은 승려가 있었는지 짐작케 한다. 철학으로 불리는 무쇠밥솥의 크기는 높이1.2m, 직경 2.7m, 둘레10.8m, 무게 20톤이다. ▲ 사용했던 방법이 궁금해 지는 대형 솥 '철확' 철솥 또는 철확으로 부른다. 안내글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큰 사발형상을 하고 있는 이 철솥은 쌀 40가마를 담을 수 있는 규모로 법주사에 전하여 오는 말로는 법주사가 한창 번성하여 3,000 승도가 운집하여 있을 때 장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비교적 단순한 구조로 몸체에는 아무런 문양이나 기록이 없어 제조연대, 제작자 및 제조방법 등을 알 수 없지만 주철로 주조된 대형의 주물솥이라는 점에서 기술사적 측면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국내 유일한 목탑 팔상전(국보 제55호) 팔상전은 신라 진흥왕14년(553)에 초장, 벽암선사가 1626년 재건을 통해 오랜 세월 거친 후 1968 팔상전 전체를 해체, 복원하는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 목탑건축물인 팔상전은 국내 유일의 목조탑으로 전체 65m의 위엄을 자랑한다. ▲ 팔상전(국보 제55호) 목조탑은 불에 잘 타는 단점 때문에 거의 소실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쌍봉사의 경우 함께 목조탑으로 지정되었지만 신도가 촛불을 넘어뜨려 결국 전소 되는 비운을 겪고 이제 국내에서 유일하게 남아 이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겠다. 팔상전은 석가여래의 행적을 그린 그림이 남북으로 2장씩 봉안되어 8장이니 팔상전이라 부른다. 팔상전은 각 면마다 나한상과 부처를 모시고 1층과 2층은 정면5칸, 3층과4층은 정면과 측면3칸, 5층은 정면과 측면 모두 2칸으로 정방형이다. 팔상전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그 후 임진왜란 때에 불타버려 조선 인조 4년(1626)에 다시 지어졌는데 조선의 승병장인 사명대사가 주관하였다. 이후 1968년에 완전 해체 복원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팔상전은 5층 목조탑 건축으로 한국 목조탑의 유일한 실례가 된 중요한 건축물로 내부에 석가여래의 일생을 8장면의 그림으로 나타낸 팔상도가 모셔져 있어 팔상전이라고 부르게 된 듯하다. 1층과 2층은 정면 5칸, 3층과 4층은 정면과 측면 3칸, 5층은 정면과 측면 모두 2칸의 정방형으로 되어 있다. 처마를 장식하는 공포양식은 1층부터 4층까지는 기둥 위에만 공포를 짠 주심포식이고 5층은 기둥 사이에 공포를 짜 올린 다포식이다.’ 석조예술품의 걸작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 두 마리의 사자가 서로 맞잡고 석등을 떠받침 형태로 석등 중에서 가장 조각미가 우수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라 성덕왕19년(720)에 제작된 석등은 불교에서 칭하는 8난을 막기 위해 조성된 것으로 하나의 돌을 이용하여 8각의 지대석 위 하대연화석과 두 마리의 사자를 실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석등의 높이는 3.3m로 일반적인 석등의 양식을 크게 벗어난 경우로 다른 석등에서 보기 드문 형식과 화사석, 옥개석이 큰 것이 특징이다. ▲ 쌍사지 석등은 팔상전 뒷편으로 부터 대웅보전 중간을 잇는 일직선상에 자리하고 있다. 쌍사지석탑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 석등 중 뛰어난 작품 중의 하나로 조성 연대는 성덕왕 19년(720)으로 추정되고 있다. 높이가 3.3m로 널따란 8각의 바닥돌 위에 사자 조각이 올려져 있다. 사자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랫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 쌍사지석등(국보 제5호) 석등의 구조는 8각의 지대석에서 하대 연화석과 쌍사자, 연화상대석을 따로 조각하여 쌓아 올리지 않고 하나의 돌에 조각하였으며 다른 석등들에 비해 화사석과 옥개석이 큰 것이 특징이다.’ 독특한 모습의 석연지(국보 제64호) 석연지는 거대한 하나의 연꽃조각이다. 일반적인 연꽃조각이 아니라 붉게 피어나는 홍련의 아름다운 자태를 섬세하고도 큰 조각 솜씨로 거침없이 다듬어간 흔적이 역력하다. ▲ 석연지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석련지는 연꽃이 구름 위 떠 있는 형상으로 각 연꽃잎 마다 보상화문이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석연지는 높이 1.95m, 둘레 6.65m이다. 석연지는 신라 성덕왕 19년(720)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법주사 본당이었던 용화보전이 있었을 당시 장엄품을 설치했던 것으로 극락정토의 연지를 상징하고 있다.
보은 법주사 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 대적광전 앞에 자리한 석등으로 신라 성덕왕 19년(720)에 제작된 석등으로 우리나라 석등의 정형이라 할 수 있다. 단순해 보이는 석등이 보물로서 자리메김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지만 사천왕석등은 여느 석등과는 다르다. 밋밋하고 불안정한 대칭이 주는 석등과는 달리 안정감이 있다는 점과 석등에 새겨진 사천왕상은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 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 그 뒤로 대웅보전(보물 제915호) 사천왕석등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의 전형적인 팔각 석등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조각수법으로 보아 혜공왕(765-780) 때에 진표율사가 법주사를 다시 고쳐 지을 때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높이 3,9m에 이르는 대형 석등으로 화사석은 8각으로 4면에 창을, 나머지 면에는 사천왕상을 배치하였고, 지붕돌 정상에는 보주를 받치고 있는 받침이 남아있다. 사천왕이란 불교에서 수미산을 중심으로 사방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동쪽을 지국천왕, 서쪽을 광목천왕, 남쪽을 증장천왕, 북쪽을 다문천왕을 뜻한다.’ 대웅보전(보물 제915호) 대웅보전은 2004년 해체, 복원공사를 하였다. 신라 진흥왕14년(553)에 창건된 후 진표율사가 중창하고, 벽암대사가 삼창을 하였다. 대웅보전 앞에는 쌍사자석탑, 석등 등이 자리 잡고 있으며, 법당에는 화신의 삼신불인 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 법주사 중심건물 대웅보전 대웅보전은 12m기둥이 무려 315개로 부여 무량사, 구례화엄사를 비롯하여 국내 3대 대불전으로 삼존불의 높이가 5.5m, 허리둘레 6.6m로 벽암대사가 건조한 국내 최대 좌불상을 모시고 있으며, 건물의 구조는 전북 김제의 금산사와 흡사하며, 청동미륵대불 역시 금산사와 흡사하다. 이는 미륵불을 만든 사람이 동일인으로 알려져 있다.
원통보전(보물 제916호) ▲ 원통보전(보물 제916호) 법주사 창건 당시 의신조사에 의해 창건된 건물로 776년 진표율사가 중창하고 임진왜란 당시 소실된 것을 1624년 벽암대사가 복원한 건물로 원통보전에는 목조 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1)이 봉안되어 있다. 석조희견보살상(보물 제1417호) 희견보살상을 바라보면 무거운 향로를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으로 당찬 여인의 공양하는 자세이다. 희견보살은 성불의 서원을 가지고 몸과 뼈를 때우며 아미타불 앞에 향로를 공양하는 보살로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이 밥그릇이라고 하지만 밥그릇 보다는 돌로 만든 향로에 가까워 보인다. 희견보살상은 높이 약 2m이다.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의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보살상의 전체 높이 213cm규모로 크게 신체, 공양물, 대좌의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연 암반으로 이루어진 지대석 위에 가로 네모반듯한 모양의 받침돌을 그 위로 중심부에 해당하는 몸통을 세워 고정시켰다. 얼굴 부분은 마멸이 심하여 자세히 볼 수 없지만, 잘록하고 유연한 허리와 대조적으로 그릇받침을 받쳐 든 양팔은 힘겨운 듯 한 모습을 꽤 사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옷은 속옷 위에 가사를 걸쳤고, 띠매듭과 옷자락이 무릎 위에서 투박하게 처리 되었다. 향로를 받쳐 든 두 팔의 모습이나 가슴부위의 사실적 표현과 함께 배면 옷의 표현기법은 절묘하여 같은 경내의 쌍사자석등을 제작한 동일한 시기인 720년 전후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법주사 능인전과 세존사리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 능인전 법당 뒤편에 위치한 높이 3.5m 사리탑이다. 법주사세존사리탑은 공민왕 11년(1362) 공민왕이 홍건적을 격파하고 법주사에 들러 통도사에 봉안되어 있던 석가모니 사리 1과를 옮겨 팔각원당형 형식의 사리탑을 만들고 봉안하였다. ▲ 법주사세존사리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 법주사세존사리탑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이 사리탑은 1362년 공민왕이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으로 환도하는 중 법주사에 행차하여 경남 양산 통도사에 있던 부처님 진신사리 1기를 법주사로 옮겨와 봉납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고 전한다. 이 탑은 8각을 기본 형태로 하여, 상.중.하 세부분으로 나누어진 기단부의 탑의 몸체에 해당하는 탑신부 그리고 탑의 꼭대기를 장식하는 간략한 상륜부로 구성된 팔각원당형의 사리탑으로 높이는 3.5m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형식의 사리탑은 고려말기~조선 초기의 승탑에서 유행한 형식으로 탑신의 몸체가 공 모양으로 바꾸기 지붕은 처마 끝이 둔중해지며 지붕 위의 경사도 날로 심해지는 경향을 띠는데, 이러한 특징은 조선시대 사리탑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 보은 법주사 능인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2호) 법주사세존사리탑이 있는 전각으로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의 제자를 모신 곳이다. 능인이란 부처님을 가리키는 모든 중생들을 교화하여 널리 이로움을 주는 분이라는 뜻으로 석가여래불을 중심으로 협시불은 미륵보살과 갈라보살을 두고 있으며. 좌우 8구씩 16나한을 배치하고 있다. 능인전은 조선인조 2년(1624) 벽암대사가 중창한 것으로 목조와가이며, 약 8.9평의 작은 공간이다.
법주사 석조(충북유형문화재 제70호) ▲ 능인전 입구에 있는 석조 한 귀퉁이에 버려진 듯 자리 잡고 있는 석조는 한 때 3천명의 승려들이 수시로 찾아와 갈증을 해소했을 것으로 본다. 석조는 하나의 돌을 이용하여 정방형으로 만든 화강암석조로 높이 94cm, 길이 446cm 폭 240cm, 두께21cm로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고 있다. 철당간 ▲ 철당간 어느 사찰에 가더라도 당간지주는 거의가 존재하지만 철당간은 보기 드물다. 법주사 당간은 고려 목종10년(1007) 주철로 조성하였으며, 당시 높이가 16m이었다고 한다. 철당간은 조선 고종 3년(1866)에 들어 파손되고 순종때 다시 재건립하였지만 또 다시 파손되어 1927년 높이 약 22m의 당간을 설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철당간을 고집하면서 높게 세우는 것은 속리산의 형국이 배 모양이라 돛대를 세워 올바른 법리를 상징하려는 의미를 가졌다. 금동미륵대불 속리산 금동미륵대불은 신라 혜공왕 12년(776) 진표율사에 의해 7년간 노력의 결과물이기도 하였지만 조선조 고종9년(1872) 홍선대원군은 경북궁 공사를 준비하면서 당백전 주조를 위해 미륵대불을 몰수하게 된다. 1939년 주지 장석상(張石箱) 스님은 80척 미륵상 조성을 시작한다. 전북 태인에 살던 김수곤(金水坤) 거사가 시주를 하였고 당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불상 조각가 김복진(金復鎭)이 맡았지만 한국전쟁으로 한때 공사가 중단되었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이 이 사실을 알고 희사를 하였고 그 결과 1964년 5월 시멘트미륵부처가 완성을 하였다. ▲ 금동미륵대불 1986년 시멘트미륵부처가 붕괴될 처지에 이르자 다시 해체되고 4년 후인 1990년 4월 청동미륵부처로 다시 모셔졌다. 시멘트로 조성되었던 크기로 복원한 청동미륵불상에는 2002년 검푸른 청동녹을 벗겨내고 개금불사를 진행하여 2002년 6월 7일 금동미륵대불로 거듭난다. ▲ 금동미륵대불 정면 전경 당시 개금은 건식전기도금공법으로 순금 3미크론 두께로 황금 30kg이 소요된 공사였지만 2016년 들어 청동미륵불은 현재 99% 금박지 개금불사가 아니라 가금됐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청동미륵대불은 108평의 지하석실 위에 1989년 4월 160톤, 33m에 이르는 거대한 불상을 올려놓았다. 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 마애여래의상 암각화는 알고 찾지 않으면 잊어버리고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 할 만큼 외진 곳에 있다. 석조를 돌아 계곡으로 향하다 보면 바위 산자락 끝에 새겨진 마애여래의상은 경주 남산 및 여러 지방의 암각화가 주로 연화문양 위나 구름 위 서 있거나 간혹 바위에 걸터앉은 자세를 취하기는 하지만 이곳 여래좌상은 아예 의자에 앉아 있다. ▲ 마애여래의상 둥근 얼굴에 화려한 선율이 따라 돌면서 양각으로 입체성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 도공의 흔적이 역력하게 표현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마애여래의상은 높이 2.84m, 평면 연화석 폭 2.27m 이다. ▲ 주변 전경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마애불로 높이가 약 6m나 되는 큼직한 바위에 불록 새겨진 이 여래 좌상은 보기 드물게 의자에 앉아 있는 의상으로 옆에 조각된 지장보살과 함께 법주사의 성격을 알려주는 미륵불상이다. 둥글고 온화한 얼굴, 길고 큼직한 코, 둥근 눈썹, 뚜렷한 눈두덩, 꽉 다문 두꺼운 입술 등은 길다란 귀, 삼도의 표현 등과 함께 고려 초기 마애불의 특징적인 양식을 잘 보여준다. 넓은 어깨에 비해서 유난히 잘록한 허리는 비사실적인 수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점은 거의 수평적으로 처리한 조각수법에서도 나타난다.’ 한국의 전통산사’는 봉황산 부석사(영주), 천등산 봉정사(안동)를 비롯하여 영축산 통도사(양산), 속리산 법주사(보은), 태화산 마곡사(공주), 조계산 선암사(순천), 두륜산 대흥사(해남) 등 7개 사찰로 구성되어 있다 전국을 유람하던 최치원이 속리산을 비켜 가지 않았다. 신라 헌강왕 당시 최치원은 이 곳 속리산에 들러 ‘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도불원인인원도, 산비이속속이산)’ 즉,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사람은 도를 멀리 하고/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으나/속세는 산을 떠나는구나"이라 칭송했다. 불교유적으로 국보(3점)는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 팔상전(국보 제55호), 석연지(국보 제64호)가 있으며, 보물(12점)으로 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 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 신법천문도 병풍(보물 제848호), 대웅보전(보물 제915호), 원통보전(보물 제916호), 법주괘불탱화(보물 제1259호), 소조삼불좌상 3구(보물 제1360호),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1호), 철확(보물 제1413호), 묵천암수암화상탑(보물 제1416호), 법주사 희견보살상(보물 제1417호), 북천암 학조등곡화상탑(보물 제1418호) 그 외 지방유형문화재 22점과 문화재자료 2점, 천연기념물 2점이 있으며, 사적 제503호이자 명승 제61호, 사적 및 명승지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 법주사 전각 배치도 1.대웅보전 2.석조희견보살입상 3.원통보전 4. 팔상전 5.쌍사지 석등 6. 사천왕 석등 7. 마애여래의좌상 8.세존사리탑 9.능인전 10.석조 11.석련지 12.당간지주 13.사천왕문 14.철솥 15.벽암대사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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