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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단양] 천추태후 & 태왕사신시 촬영지 "온달테마파크"

허영꺼멍 2010. 6. 3. 23:49

바보온달이 평강공주를 만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온 구전동화이지만 충청남도 단양군 영춘면 하리에서 석회암 종유석 천연동굴이 발견되었는데 무려 길이가 586m에 이른다. 동굴에서 온달장군이 수양하였다 하여 온달동굴로 불리며 특이하게도 동굴에서 흘러나오는 물길이 작은 하천과도 같아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동굴로서 총 면적이 34만 9485㎡이다.

 

 

 

 

 

 

 

석회동, 종유동이라 불리는 석회암 동굴은 카르스트지형의 일종으로 이산화탄소가 섞인 빗물, 지표수가 석회석의 틈으로 침투, 복류수(伏流水)중 이산화탄소가 녹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동굴에서 발견되는 물방울이 자라는 모양은 탄산수소칼슘 이 물방울 된 후 이산화탄소를 함유한 수분을 방출하면서 탄산칼슘이 생기게 되고 이 과정에서 천장에 매달린 종유석은 계속 자라게 된다. 이 과정은 천장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떨어진 물방울이 바닥에서 자라는 석순이 되기도 한다. 오랜 세월동안 거치면서 자라난 석순과 종유석은 석회주로 불리며 여러 형상의 석회화단구를 만들기도 한다. 과연 옛날 우리의 조상은 이 종유동을 두고 뭐라 불렀을까? 바로 신농답(神農沓)이다.

 

카르스트지형(Karst topography)이란 암석의 조직이 치밀하고 절리가 많으며 수량이 풍부하여 하천이 잘 발달된 탄산칼슘이 물에 용식되어 이루어진 지형으로 고생대 전기에 주로 형성된 지층이다. 한반도에는 황해도, 강원남부지역, 충북 북동부, 경북 북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카르스트지형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온달동굴에서 잘 나타나 있는 것처럼 하천이 잘 발달하여 아름다움을 더해준다는 부분이다. 석회암 동굴은 지구상 엄청나게 많이 발견되는데 유고슬라비아, 유럽 중남부, 중국, 동남아시아, 소련, 남아메리카, 오스트리아 지역 등 고루 분포되어져 있다. 우리나라는 문경 단양일대를 선두로 제천, 영월, 평창, 정선, 삼척, 명주, 강릉 등으로 우리나라 동굴의 40%가 밀집되어 있다.

 

온달동굴은 온달산성이 있는 성산 자락 지하에 생성된 것으로 4억 5천만 년 전으로 추정한다. 온달동굴에 관한 기록은 이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지만 조사는 1966년을 시작으로 인근의 동굴에 비하여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며 석순과 종유석이 잘 발달된 곳이다.

 

동굴은 남강강과 인접하여 여느 동굴과 달리 동굴의 수위변동이 잦다. 수위가 높을 때면 작은 배를 이용 할 수 있을 정도로 물이 풍부하고 담백색의 종유석과 석순은 복잡한 모양을 띤 주변의 동굴보다 아름다우며, 동굴이 복잡하여 사람이 기어서 이동하여야 하는 코스가 반환점 지점부터 시작되어 동굴탐험이 힘든 지역이기도 하다. 한때 이곳 동굴도 전쟁을 피해 주민의 피난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동굴의 기록을 살펴보면 남굴, 산성굴 등으로 불린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충청도 영춘현 고적조에 남아 있다.

 

온달동굴 위에는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온달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산성에서 내려 보면 남한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지형으로 성산의 정상일대를 석성으로 쌓은 산성으로 조선 전기에 성산성으로 불린 산성을 지방자치제 이후 관광 상품화에 힘입어 온달산성으로 바꾸었다.

 

온달산성은 누가 언제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었는지 정확한 근거가 불확실한 산성으로 둘레 922m의 작은 산성이지만 성 안에서 출토되는 그릇조각 유물이 삼국시대가 주류를 이룸으로 인하여 바보온달 일화를 접목시킨 것으로 보인다. 성안에는 성에서 가장 중요한 우물터가 남아있고 동문의 돌출부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양식으로 주목된다. 산성은 반월형으로 성벽을 이루는 돌을 아주 짜임새 있게 짜 맞춘 것으로 보아 신라와 고구려의 영토 확장 전초기지로 예측하며, 온달장군이 신라군을 방어할 목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온달장군의 전사는 고구려와 신라사이 영토싸움 전투가 치열할 무렵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자 시신을 수습하여 옮기려는데 영구가 움직이질 않아 공주가 직접 관을 어루만져 주면서 "죽고 사는 것은 결정되었습니다, 자 돌아갑시다." 라고 말한 후에야 영구가 움직여지게 되었다고 한다. 온달장군을 두고 그 발자국을 상상해 놓았는데 어른의 발을 몇 개나 넣어도 좋을 만큼 크게 만들어 두어 너무 과장을 한다 싶은 곳이기도 하다.

 

온달산성이 온달장군과 함께 등장하게 되는 배경은 삼국사기 온달열전에 의하면 온달장군이 아단성 에서 전사한다는 기록 때문이다. 하지만 아단성의 위치가 정확하게 이곳인지는 의문이다. 이곳을 두고 성산성이라는 주장과 아단성은 지금의 서울 광장동 아차산성이라는 견해가 있기 때문이다. 성산성 주장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성산고성으로 둘레 1,523척, 높이 11척의 석축산성으로 기록되어져 있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온달산성은 조선에 이르러 이미 산성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고성으로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신라와 고구려의 영토 확장 분쟁 때 만든 것이 제일 가능성이 보인다.

 

평강 공주는 어려서부터 울기를 잘해서 부왕은 " 공주야 네가 울기를 잘하니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곧 잘 말을 잘 하였는데 공주 나이 16살 되던 해에 부왕이 고씨에게 시집갈 것을 말하자 평강공주는 임금은 한입으로 두말하지 않는다며 궁중을 떠나 바보온달을 찾아간다. 형편이 어려운 살림살이를 평강공주는 궁에서 가져온 보물을 팔아 바보온달을 가르치게 되고 점점 무예가 늘어 눈에 뛸 정도가 되었다.

 

고구려왕은 매년 3월3일이면 사냥을 하였는데 그 중에서 특출난 무예실력을 지닌 사람을 보고 불러와 이름을 물어보니 바보온달 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중국 후주의 무제가 고구려를 침공하자 온달은 선봉장으로 나서 물리치고 비로소 왕의 사위로 인정된 후 대형의 벼슬직을 하사받는다. 영양왕이 직위한 지 1년이 되던 해인 590년 온달은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이북 땅을 회복하기 위해 출전하지만 아차산성(아단성)에서 화살에 맞고 전사를 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김부식의 온달전을 통해 전해져 오고 있다.

 

성을 지키기 위해 온달장군이 여기서 전쟁을 통해 막는 역할을 하였는지, 성을 공략하여 점령하려 하였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온달장군에 관한 기록에 있는 전사장면은 한강 이북땅을 회복하기 위해 출전하였다가 화살에 맞게 된다. 그러면 온달산성은 온달장군과는 전혀 관련이 없게 된다. 온달산성을 공략한 것이 아니라 사수하다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내용은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몰런 전설에 의하여 만든 이야기 일뿐이지만 말이다. 온달산성을 두고 그 만든 기법이 적성산성과 유사하다 하여 적성산성의 축성 연대와 비슷한 6세기 초로 보는 견해로 온달산성에서 신라군의 침입을 막고자 성을 축성하고 전쟁을 치루 엇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탓이다.

 

고구려 산성은 3면이 높은 산 또는 방어하기 쉬운 절벽을 이용하여 남쪽만 완만한 경사를 이룬 지역을 이용하여 성을 쌓고 성안에는 골짜기가 있고 산 능성을 따라 성벽을 만드는 조건을 갖춘 것으로 보아 당시 고구려에서 만든 후 삼국통일 대업과 함께 필요가 없는 성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지금은 온달동굴 및 산성을 비롯하여 사극 및 영화 태왕사신시, 천추태후 촬영지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