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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단양] 사인암에 숨은 청련암

허영꺼멍 2010. 6. 4. 00:00

"卓爾弗群 確乎不拔 獨立不懼 豚世無憫" 뛰어난 것은 무리에 비할 것이 아니며 확실하게 빼지 못한다/ 흘러서도 두려운 것이 없고 세상에 은둔하여도 근심함이 없다. 사인암을 두고 우탁선생의 친필로 새겨진 사인암 찬시이다.

 

 

 

사인암을 통해 알려진 우탁은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학문에 대단한 집념을 보인다. 15살이 되던 해 과거시험도 치르지 않은 우탁에게 학식과 군자의 품성을 두루 갖추었다 하여 진사 벼슬 칭호를 불러 줄 정도였다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지만 우탁의 나이 27세에 과거합격하고 사록이라는 관직을 받는다.(사록은 조선시대 의정부 소속의 정8품 관직) 우탁은 그 후 경북 영덕 영해라는 지역으로 부임된 후 그의 일화가 전해져 오는데 부임하고 보니 마을 사람들은 팔영신을 모시는 사당과 함께 이를 모시면서 숱한 고충이 따르는 것을 보고 미신타파에 직접 앞장서게 된다. 현지에서 알려진 구전에 의하면 팔영신을 상징하는 방울을 만들고 부순 후 바다에 던지니 팔영신 중에 하나가 살아 살려줄 것은 요청하여 살펴보니 눈이 먼 백발의 할미라 불상하게 여겨 살려 주었다고 한다.

 

 

 

 

 

우탁이 감찰규정 벼슬에 있을 때 일화로 그의 충직함이 나타나는데 충선왕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와 가깝게 지내자 백의차림으로 거적자리와 도끼를 들고 대궐에서 상소를 놀렸는데 상소문을 든 신하가 임금에게 감이 아뢰지 못하자 "경이 왕을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로서 왕의 그릇된 것을 바로잡지 못하고 악으로 인도하여 이에 이르니 경은 그 죄를 아느냐"며 호통을 쳐 왕을 비롯 주변의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기도 하였던 인물이다. 많은 벼슬길에 오른 우탁은 성균관 좨주를 맡다 관직을 내 놓고 낙향하여 후진양성에 여생을 보내다 1342년 79세로 떠나게 된다. 많은 인물로 추앙받아온 우탁을 기리 기위해 이퇴계는 후학에 몰두하였던 예언에 역동서원을 만들고 하고 훗날 안동에 구계서원, 영해에 단산서원, 단양에 단암서원이 만들어 지게 된다. 사인암과의 특별한 만남은 이미 오래전의 일로 사인 벼슬직에 있을 당시 즐겨 찾은 곳을 사인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단양팔팔경중 하나인 사인암은 맑은 계류와 함께 고운자갈이 지천에 널려져 눈이 부실지경으로 아름다운 주변경관을 자랑한다. 사인암은 계류를 내려다보고 있는 기암절벽으로서 마치 해금강에 자라는 소나무를 연상하기 충분하다. 기암은 일정한 형태를 두고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빚어낸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여 이 일애를 두고 운선구곡(雲仙九曲)에 비유하기도 한다. 사인암의 기기묘묘한 형상에 최근 비상이 걸렸다. 자세하게 보면 부처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다.

 

 

 

 

 

 

 

 

 

정말 닮았다. 큰 바위에 부처의 모습은 뚜렷하다. 그리고 옆으로 또 한분의 모을 추정할 수 있다. 모두 세분으로 밤에 조명을 켜면 자세하게 보인다고 한다. 부처에 관한 이야기는 사인암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청련암에서 부처모습을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청련암은 고려 공민왕 시절 나웅선사에 의해 1878년 대강면 황정리에 일대에 창건된 대흥사의 말사였지만 구한말 문경의 의병장 황토고리군과 접전을 벌리는 과정에서 대흥사는 불에 타게 된다. 그 후 1954년 적색분자 소탕작전에서 황정리 일대 소계령이 내려지자 청련암은 사인암리 즉 지금의 장소로 이전해 오는 비운을 격은 사찰이다.

 

사인암을 화폭에 담기 위해 많은 화가가 사인암을 방문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김홍도의 작품 "사인암"은 후세에서 훌륭한 평가를 하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사인암 진면목을 그려 넣지 못해 노심초사 할 정도였다고 하니 사인암이 다시 한 번 더 바라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