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349호 만복사지는 통일신라시대 후기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 전하지만 근거가 빈약하고 폐사지에서 확인되는 불교유물이 고려 문종(1046~1083)이후의 것으로 정확한 사찰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그 후 만복사는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 싸움으로 소실되고 숙종 4년(1679) 남원부사 정동설에 의하여 복원 중창사업을 시도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늘에 이른다. 동국여지승람 편에 만복사에는 동쪽에 5층의 전각, 서쪽에 2층의 전각에 35척 금동불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폐사지의 가람구조는 1탑 3금당식으로 삼층석탑(보물 제30호), 석불입상(보물 제43호), 석좌(보물 제31호), 당간지주(보물 제32호), 석인형 및 금당터가 단정하게 정리되어져 있으며, 김시습은 만복사를 무대로 만복사저포기라는 한문소설을 남겼다.
만복사지와 도선국사 창건에 관하여 한번쯤 생각해 볼 것은 왜 만복사의 창건이 도선국사와 연관되어 있는가 하는 점으로 우선 도선국사의 풍수설을 유추할 수 있다. 만복사지는 철저하게 풍수에 의해 조성된 비보사찰로 만복사지 일대에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남원을 흐르는 요천과 축천이 배의 형상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도록 쌓은 토성과 산이란 지명만 부여한 조산동 그리고 밧줄을 묶어둔 고리봉 등으로 전형적인 배산임수 터에 절을 세울 사람은 도선국사 뿐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며, 1979년부터 1985년까지 7차례 발굴조사 결과 만복사지는 창건 후 수차례 중창된 것으로 확인됨에 따라 도선국사가 창건 후 소실되자 고려 문종 당시 대대적인 중창하였을 가능성도 높다.
만복사지 유물 중 가장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것이 도로변에 머리만 불쑥 내밀고 있는 인왕상이다. 주로 신라석탑에서 많이 확인되는 붑법을 수호하는 금강역사가 불탑에서 나와 사찰의 문지기로 서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왕방울처럼 굵은 눈과 두툼한 입술은 위압감을 더해주며, 일부는 석인상을 석장승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만복사지 석인상은 12척의 거구이지만 땅 속에 묻혀 머리만 위로 향한 채 사찰입구를 수호하고 있다.
절터 중앙에 목탑지 흔적과 발굴을 통해 오층석탑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지만 현재는 4층까지만 남아 있고 단층기단 위 오층 탑신을 올리고 목조건축 지붕처럼 지붕돌 밑면 전체가 위로 들려있는 특징과 1968년 보수하던 중 1층 몸돌에서 사리공이 확인되어 고려 문종 당시 세워진 현존하는 총 높이는 5.75m 탑이다.
결코 작지 않은 규모의 석좌로 하나의 돌에 특이하게 육각형의 상. 중. 하대를 조각하였다. 하대는 안상과 꽃, 연꽃을 새겼으며, 중대는 기둥을, 상대는 연꽃과 불상을 세우기 위한 네모 구멍을 뚫어 놓은 고려시대 작품이다. 고려시대 석좌로 추정하는 이유는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팔각형식을 벗어나 육각이라는 독특한 부분과 고려시대 양식으로 안상 안에 꽃을 장식하는 수법 때문이다.
기교가 전혀 보이지 않는 단순하고 밋밋한 당간지주로 석인상 뒤편에 서 있다. 당간지주는 깃대를 고정하기 위해 구멍을 세 군데 뚫어 놓았으며, 기단은 매몰된 상태라 알 수 없다.
화강암 재질을 이용하여 만든 높이 2m의 석불로 정면과 후면에 부처가 새겨있다. 정면에 새겨진 부처는 손을 따로 끼우도록 만들어 놓았지만 지금은 손부분이 없어 정확한 지인이나 사물을 알 수 없지만 전체적으로 원만하면서도 다소 위축된 모습을 하고 뒤편에 있는 광배는 연꽃잎과 연꽃줄기를 새기고 불꽃무늬를 조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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