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족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안동하회마을은 주말이면 전통 하회춤을 볼 수 있고, 옛 고풍을 고스란히 간직한 전통가옥을 직접 둘러 볼 수 있다. 안동하회마을로 그 이름이 알려진 것은 이 마을 성씨인 류한상이란 분이 하회탈을 맥타카드교수에게 의뢰하면서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1954년부터이다.
별신굿 중에서 안동하회탈춤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춤이다. 그만큼 오랜 전통과 탈이 가지는 의미는 사뭇 진지하고 예술적 가치가 여느 것과 달리 특별난 부분이 있다. 안통탈춤을 보려면 얼굴을 가린 12개의 다른 모습을 보아야 한다. 12개의 탈이 한자리에서 그 몫을 해 낼 때 비로소 안동하회탈춤의 진정한 의미가 부여되는데 지금은 각시, 중, 양반, 선비, 초랭이, 이매, 부네, 백정, 할미탈 등이 전해져 오고 남은 3개의 탈은 분실되었다. 탈 중에서 이매탈은 아직도 미완성작으로 턱이 없다.
탈을 만든 허도령의 전설에 의하면 자신의 혼을 불어넣어 탈 제작을 하기위해 외딴집으로 찾아들며 사랑하는 여인에게 탈을 다 완성하기 전에 절대로 찾아오거나 방문을 여는 일이 없도록 당부를 한다. 시간이 흘러 마지막 탈을 만들 무렵 여인은 허도령의 부탁을 알지만 너무나 그리워 잠시만이라도 얼굴을 보기위해 찾아가 창호지에 구멍을 뚫어 안을 들여다 보게 되고 마지막 이매탈을 만들던 허도령은 부정 타서 죽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매란 명칭이 생소할 것이다. 이매란 코가 비뚤어진 탈로서 사지중 어느 한 부분이 비뚤어 진 병신탈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안동 하회탈에서는 눈꼬리가 내려쳐져 악한 모습은 아니며 대표적인 하인탈인 초랭이는 머리에 질끈 수건을 동여맨 고성오광대와는 달리 무색 바지저고리에 쾌자를 입고 벙거지를 쓰고 코가 무척 짧은 경망 서럽기 짝이 없지만 사람은 초랭이 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초랭이 탈에서 풍겨 나오는 입 다문 모습을 통해 당시의 불만을 대변하는 역할자로 나섰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무네는 생소한 이름으로 탈 중에서 가장 아리따운 모습을 하고 있다. 단정한 모리와 환한 미소, 무네는 젊은 기생인 것이다. 이처럼 탈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해 주고 있어 매우 가치가 높다고 볼 수 있다. 일반화된 농악이나 굿거리에서 꿩을 옆구리에 차고 다니는 모습이나 꿩 사냥을 하는 포수의 우수광스런 모습을 어릴 적보고 자란 기억이 있는데 안동하회탈에서는 주지로 나온다.
하회탈을 두고 안동에서는 마을에서 보관할 장소를 따로 만들 정도로 탈에 관하여 많은 부분을 금기해 왔다. 특히 오리나무로 만든 탈은 일반 탈과는 달리 일회용이 아니라는 점이 더욱 그러하다. 또한 하회탈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잊혀지지 않는 것은 탈을 쓰고 한 바탕 벌리는 굿판의 걸쭉한 말투와 탈의 이미지가 한국을 대표하는 당시 각 분야의 표정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얼굴 좌우를 비대칭으로 하고 굳은 표정은 피하면서도 저마다의 캐릭터 에 충실한 이미지를 함축시켜 놓고 탈이 흔들릴 때마다 저마다 다른 모습이 입체감 있게 보이도록 만든 것이다. 탈을 쓴 광대가 고개를 젖히고 웃어 보이면 탈도 웃게 된다. 몰런 슬픈 표정을 짓게 되면 탈도 금방 슬픈 표정으로 변한다. 그중에서 양반탈은 최고작품으로 섬세한 표정관리 를 평가해 주고 있다. 사라져 버린 3개의 탈…….총각, 떡다리, 별채는 과연 어찌 생겼을까 더욱더 궁금해진다.
낙동강 물결이 굽이굽이 흐르다 이곳 안동하회마을 앞에서 태극형상으로 물길이 이루어져 아직까지도 큰 물난리를 겪지 않았다. 물이 이곳을 지나면서 태극형상을 한다하여 물돌이동으로 불리는 안동하회마을은 풍수상 길지로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마을이 보전된 것은 이 독특한 지형 덕이라고 전하며 원래 이곳 안동하회마을은 안씨와 허씨가 자리 잡고 살았는데 전서공 유종혜가 터를 잡고부터 류(유)씨 촌으로 변화를 하였다고 한다. 류씨가 이 지역으로 들어오는데 상당한 고초를 겪는다. 집을 짓을려면 주초가 무너지고 우울 속에서는 먹지 못하는 물이 솟았는데 꿈속에 스님 한분이 현몽하길 공덕을 쌓지 않고는 이곳에서 자리 잡을 수 없다며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공덕을 쌓은 후 류씨는 이곳에서 터를 잡고 많은 류씨가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무려 600년이나 된 노거수가 마을 안쪽에 자신의 울을 만들고 서 있다. 풍산류씨의 집향 시조 전서공이 직접 심은 것으로 마을의 삼신당 역할을 하는 중요한 나무다. 나무 둥지에는 재단석을 준비해 놓고 줄기는 건넛집 마당을 넘어서 있지만 담장을 낮게 하여 나무가 다치지 않도록 배려한 흔적이 보인다.
부용대 앞에 펼쳐진 만송정은 소나무가 만 그루라 하여 불리는 일종의 방풍림역활을 하고 겸암선생이 주변풍치를 위해 230m에 이러는 땅위에 소나무를 심었지만 지금은 몇 그루 남아져 있지 않다. 만송정 앞에서 건너편 겸암정으로 가는 나룻배를 탈 수 있다.
고택의 보존상태가 오랜 세월을 겪어 왔지만 그래도 좋은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마을 안에 있는 고택 중에서 눈여겨 볼 몇 개를 찾아보면 풍산류씨의 입향시조인 류종혜의 집으로 대종가로서 전형적인 99칸 건물이었지만 지금은 53칸만이 전해지고 류성룡의 종택인 충효당이 있다. 충효당은 충과 효를 겸비한 류성룡을 두고 만든 것으로 긴 행랑과 52칸의 건물 및 서애의 증손인 류만하 충효당에서 분가하며 만든 주일재가 있다.
마을의 대표 격인 고택으로서 북촌댁 및 남촌댁이 있다. 북촌댁은 마을중심에서 북쪽마을로 99칸의 대저택이며, 남촌댁 역시 남촌을 대표하는 주택이지만 아쉽게도 화재로 소실되어 문간채와 별당, 사당만이 남아져 있다. 고택 중에 하동고택이 있어 행여나 하동사람이 살지 않았나 싶었는데 하동고택은 마을동쪽에 있다하여 하동고택으로 불리는 전형적 선비집 외 많은 이름을 가진 고택이 항상 열려진 문으로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안동에서 느낄 수 있는 안동소주는 백미를 하룻밤 맑은 물에 재운 후 다음날 쪄 낸다. 쪄낸 고두밥을 식혀 누룩과 함께 섞어 물과 함께 항아리에 넣고 13일을 숙성시킨 후 증류하여 안동소주를 만든다. 안동소주가 특별난 첨가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술임에도 불구하고 속앓이나 소화불량 및 식욕부진에 한방약 다음으로 쳐 준다. 일본 정벌을 위해 원나라 장수가 머물면서 만든 술이 안동소주의 시초로 술을 만들 게 된 계기가 참으로 유별나다.
또한 7월 보름에 부용대 일원은 불야성을 이룬다. 뽕 숯에 소금을 넣고 창호지 봉투에다 담은 후 매듭으로 묶은 후 부용대에서 강을 가로질러 만송정까지 잇는다. 흔히들 촌에서 깡통에 숯불을 만들고 구멍을 낸 후 돌리면서 원을 그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숯봉지에는 마지막으로 쑥을 불을 붙이면 강을 건너오면서 터지기 시작한다. 행사에서 가장 신기한 것은 달걀껍질을 이용하여 불놀이를 한다는 것이다. 달걀껍질 일부를 자른 후 안에다가 피자마 기름을 채운 후 솜심지를 만들고 불을 붙여 짚으로 묶은 볏짚 또아리 위에 올려놓고 강위에 띄운다. 줄불놀이의 기원은 명료치 않지만 어쩌면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거나 당시 중국을 방문한 지역민이 중국의 폭죽놀이를 본따 아동하회마을에 맞도록 꾸미지 않았나 싶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쥐불놀이는 정월에 하는 것이 대부분으로 액운을 쫒는 역할이 주종을 이루지만 왜 하필이면 7월 달 밝은 보름에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축제는 9월말~10월초에 열린다.
최근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1999년 4월 21일 안동에서 3시간을 국빈자격으로 여행하였는데 그 많은 여행지를 마다하고 직접 안동을 고집하였다고 한다. 예천공항에 내린 후 충효당, 담연재를 들린 후 별신국 공연을 관람하고 농산물 시장, 봉암사를 여행하였는데 안동하회마을 주차장 옆에 건물을 짓고 여왕의 사진과 함께 여러 가지 물품이 전시되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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