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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청송] 태고적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청송 주왕산

허영꺼멍 2011. 5. 22. 20:04

 

 

 

 

         푸른솔의 고장 청송

         태고적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주왕산을 걷다

 

 

푸른솔의 고장 청송을 대표하는 주왕산과 김기덕 감독 영화 촬영지로 부상된 주산지를 손꼽을 수 있는 곳. 국가명승 제11호 주왕산 국립공원은 태고적 신비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수려한 경관과 청정한 공기를 자랑하는 곳이다. 티없이 맑은 물이 합류하여 폭포를 이루고잘 보존된 자연환경과 힘들지 않게 조성된 폭포로 이어지는 등산로에서 계곡에 잠시 머물러 발을 담그는가 하면 골바람에 쉬어가는 천혜적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태백산맥의 지맥인 주왕산은 해발 720m 로 그다지 높지않는 한나절 코스의 산길로 1976년 3월 30일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였고, 석병산 대둔산 주방산으로 불리던 지명을 주왕산으로 단일화 하였다. 주왕산에는 주왕의 전설이 많이 서려있는데 주왕이 신라장군과 대치하여 전투를 할 당시 계곡에 쌀뜨물을 흘려보내고 바위에는 이엉을 둘러 신라군을 당혹케 하였다 한다.

 

 

주차장을 출발하여 탐방지원센터에서 이정표 지도 한장 건네 받았다.  그동안 주왕산을 몇번 다녀갔지만 그렇게 여유롭지 않아 잠시 잠시 머물러가곤 했던 주왕산 품속으로 오늘은 깊숙하게 들어 갈 요량으로 길을 따랐다.  주왕산의 입구는 매표소를 지나야 한다. 문화재관람료매표소를 통과해야만 대전사가 나오고 대전사 경내를 통과하면 주왕산으로 오르는 계곡으로 이어진다.                         

 

 

오늘의 코스는 대진사=망월대-학소대-제1폭포-제3폭포-제2폭포-주왕암-주왕굴 순으로 결정하고 계곡을 따라 오르니 제비꼬리를 한 사향제비나비가 녹음가득한 숲을 헤집고 분주하게 날아 다닌다. 우리나라 아름다운 하천 100선에 포함되는 주왕산 계곡은 물이 맑아 무릉도원에 들어 선 느낌을 강하게 받는 곳으로 계곡 상류로 오르면서 제1폭포 그리고 양 계곡으로 오른편에 제2폭포, 왼편에 제3폭포가 자리잡고 있으며, 아름다운 하천100선 중 경관부분 우수작을 수상하였다. 

 

5월에는 주왕산 수달래 축제가 열린다. 그만큼 수달래가 많은 곳으로 진달래 보다는 조금 늣게 피어나는데 주왕산 계곡을 따라 피어나고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수단화라고도 불리는 수달래는 옛날 주왕이 마장군의 공격을 피해 주왕굴에 숨어 지내던 어느날 굴 입구 떨어지는 물로 세수를 하다 마장군의 군사가 발견하고 쏜 화살에 맞아 죽어 그 피가 계곡을 따라 흘렀는데 그 이듬해 보지 못했던 수달래가 계곡을 따라 피어나 사람들은 주왕의 피가 꽃이 되어 피었다하여 수단화로 불렀다.  

 

 

 

주차장에서 바라본 주왕산 암석

 

 

주왕산 대진사로 진입하는 입구 좌우에 늘어선 가계 중 유독 눈에 띄는 동동주

 

 

여행 첫 출발점에 자리한 대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로 신라 문무왕 12년(672) 의상이 창건 또는 고려 태조 2년(919) 보조국사 지눌이 주왕의 아들 대전군도를 위해 창건했다는 창건설이 전해진다. 주왕산은 중국 당나라 주도라는 사람이 군사를 모아 후주천왕으로 자칭하며 당나라를 공격하지만 실패하고 주왕과 아들 대전도군이 신라로 들어와 주왕산에 숨자 당나라는 주왕을 죽여줄 것을 신라에 요청하였고 신라는 마일성 장군 오형제를 보내 주왕을 비롯하여 잔당을 모두 죽였다 한다. 그 후 주왕이 숨었다 하여 주왕산으로 아들의 이름을 붙여 나옹화상은 대전사라 불렀다 전한다. 주왕산과 관련하여 또 다른 설로 신라의 주원왕이 수도를 한 산이라 주왕산으로 부른다는 설도 있다. 대전사는 거듭되는 화재로 인하여 사찰의 정확한 기록은 전하지 않고 있으며, 사찰터 주변에서 수습된 유물과 규모를 통해 통일신라시대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사찰로 지금은 보광전과 명부전이 남아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주방사로 기록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 유정이 승군을 훈련하던 곳으로 알려진 호국사찰이였다.

 

 

 

주왕산에 관한 다른 기록으로 주왕사적에 의하면 신라 말 진성여왕 6년(892) 낭공대사가 창건하고 임진왜란 이전에는 4방(열선당, 탐진당, 수월당, 한산전) 4불(보광전, 극락전, 관음전, 명부전) 3루각(용화루, 범종각, 응향각) 및 금강탑이라 부르는 쌍탑이 있는 사찰로 알려져 있으며, 사찰 발굴과정에서 1968년 절터 옆에 있는 밭에서 높이 5.5cm - 15.2cm 소형금동여래입상 7점을 발굴하여 국립대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높이가 6.3cm, 아래 너비가 9.6cm 금동이불병좌상도 함께 발굴되어 보관되어 있다. 이외에도 대전사는 이여송 장군의 친필 목판(가로 42.5cm, 세로 24.5cm)이 있는데 원판은 분실되어 복사판이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이여송이 승병을 훈련시키고 있던 사명대사에게 보낸 편지글로 내용은 의승도대장 사명대사에게 나라의 일이 위급하니 세상의 명예와 지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불도와 선도만 배우지 말고 서둘러 의승병을 모두 데리고 산을 내려오기 바라는 글이다. 贈義僧將松雲大禪伯 行拂下/ 無意圖功利/ 傳心學道仙/ 今聞王事急/ 摠攝下山顚/ 天朝將 太子少傳 李如松 謹稿
 
주왕사 창건은 주왕사적을 통해 보면 신라 헌덕왕 당시 김헌창의 난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태종무열왕의 차남 김인문의 후손으로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웅천주 도독으로 있던 당시 822년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왕이 되어 국호를 장안국으로, 연호를 경운이라 하였으나 반란은 실패하고 주방산(주왕산)으로 피신하여 옥정(주왕굴)에 숨어 있다 신라 장군 마일성에게 붙잡혀 죽음을 당하자 그 후 아들 김법문이 부친의 명복을 빌기 위해 대전사를 짓고 다시 고달산적 수신 등과 난을 일으켰지만 실패하였다.
 
대전사 우물을 메운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는데 우물을 막아버린 사연은 조선시대 매일 냇물을 길어다 부처님 청수를 공양하였지만 거리가 멀어 스님들은 절에 우물을 파기로 하고 앞뜰에 우물을 만들어 청수로 사용하니 대전사는 화재로 큰 피해를 입자 성지도사가 찾아와 지세를 살펴본 후 대전사 터는 배가 바다로 떠서 항해하는 혈자리로 우물을 판 곳이 배바닥에 해당되어 화재가 일어났다고 한 후 우물을 막아 버렸다 한다. 그 외 대전사 보광전 앞 석탑은 흩어져 있던 석탑재를 모아 다시 조립하면서 사라진 부분은 새로운 석재로 보강하여 조성하였다. 확인된 석재를 통해 하층 탑신 각 면에 사천왕상을 새겨놓고 상층 탑신에는 보살상을 새겼지만 정확하게 원형이 몇 층인지 알 수 없고 단지 쌍탑이 존재하였다고 전한다.

 

 

 

대전사보광전(보물 제1570호)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조선 현종 13년(1672) 보수된 보광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한 다포계양식의 건축물로 본존불은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있으며 건물 공포는 조선 중기 이후의 목조건축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대전사보광전석가여래삼존불(경북시도유형문화재 제366호)는 조선후기 불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대전사보광전석가여래삼존불은 현종 13년(1672) 조성된 것으로 본존불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 협신불은 제화갈라보살, 미륵보살을 모시고 있다.
 

 

대진사 사찰을 벗어나면 제1폭포는 1.9km, 제3폭포는 3.1km, 주왕굴은 1.5km로 계곡을 따라 이동하다 기암괴석 사잇길로 이어지면서 주왕산의 아름다운 모습에 매료된다.

 

 

자하성은 주왕이 신라 군사를 막기 위해 대전사 동편 주왕암 입구에서 나한봉에 걸쳐 가로막은 돌담으로 길이가 약 12km로 주왕굴을 중심으로 사방을 방어하는 요새로 돏문과 창고가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성벽의 형체는 거의 무너져 버렸다.                                 

 

 

 

급수대는 신라 37대 선덕왕이 후손이 없어 무열왕(29대 왕)의 6대 손인 김주원을 38대 왕으로 추대하였지만 경주에서 200리나 떨어진 곳에 있었고 홍수로 알천이 범람하여 건너 올 수 없자 대신들이 하늘의 뜻이라며 상대등 김경신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김주원은 김경신이 왕으로 추대되자 주왕산에 피신하여 자신의 성을 만들고 지냈는데 당시 산 위에는 물이 없어 계곡의 물을 퍼올려 식수로 사용하였는데 그 바위가 급수대이다.

 

 

 

급수대와 마주하고 있는 시루봉은 흡사 떡을 찌는 시루를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측면에서 보면 사람의 옆모습을 하고 있다. 시루봉은 옛날 어느 도사가 이 바위에서 도를 닦고 있는데 신선이 와서 불을 지펴 주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바위 밑에는 불을 피우면 그 연기가 바위 전체를 감싸면서 봉우리 위로 치솟는다고 한다.                        

 

 

시루봉과 낙수대 건너편에 있는 학소대는 하늘을 찌를듯한 웅장한 규모의 절벽 바위로 청학과 백학 한쌍이 둥지를 짓고 살아 학소대로 불렀다 한다. 옛날 백학이 사냥꾼에게 잡혀 짝을잃은 청학이 날마다 바위 주변을 돌며 울었는데  어느날 부터  자취를 감추었고  보급자리만 남아 있었다 한다.                                                                                                 

 

 

 

주왕산은 화산재에 의해 형성된 회류 응회암으로 침식에 약하여 풍화차이에 따라 다양한 비경을 자아내고 있다. 약 7천여만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중생대 백악기후기 지질로 봉화 청량산과 달리 지질이 약해 낙석이 심하고 바위가 단단하지 않아 물의 흐름에 다양한 모습으로 홈을 파 계곡을 이루는데 제1폭포는 주상절리와 회류 경계면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학소대를 조금 지나 기암괴석 사이로 열린 길을 지나면 제1폭포가 나온다. 기암괴석 사이에 자리한 제1폭포는 정막감마저 들 정도로 조용한 곳으로 전혀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특히 물길이 자리잡혀 생겨난 계류의 흔적은 오묘하여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가 하면 바위레서 떨어진 낙수물이 아래편 바위를 뚫어 큰 웅덩이를 만들어 놓기도 하였다.

 

 

제1폭포 상부의 전경. 물길이 오묘하게 패여져 있다.

 

 

제1폭포를 이루는 상부의 물길이 큰 웅덩이에 일단 모여서 다시 흘러 내린다.

 

 

제1 폭포를 지나 다시 산길로 접어든다. 제1폭포로 부터 2km 거리에 제2폭포가 있고, 제2폭포에서 약 1km 거리에 제3폭포가 자리하고 있다. 폭포를 따라걷는 순은 우선 제2폭포를 만나고 제3폭포로 가는 것 보다 제3폭포를 먼저보고 제2폭포로 온 후 유일하게 계곡이 개방되어 있는 폭포 아래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계곡물에 발을 담그면 좋다.

 

 

재3 폭포길로 접어들고

 

 

제3폭포는 두줄기의 낙수현상으로 쌍폭 또는 용폭이라 한다. 주왕산 폭포 중 가장 큰 폭포로 상부와 하부로 연결되어 상부 폭포는 독특하게 물이 소용돌이 치면서  웅덩이를 파낸 흔적이 신비롭게 하고 있어 각기 다른 폭포를 보는 듯 하다.  제3폭포는 상부와 하부를 동시에 보도록 나무데크길로 연결해 놓아 어느쪽을 먼저 보는가에 따라 감흥이 달라진다.

 

 

제3폭포 하부에서 바라본 2단형 폭포모습은 상부 모습을 숨겨놓아 올라가지 않고 돌아가 버린다면 상부 폭포의 오묘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 채 되돌아 가는 경우가 있다.

 

 

제3폭포를 나와 다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이제는 제2폭포로 향하는 길목. 이 구간은 주왕산에서 계곡으로 진입 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는 구간으로 계곡에 발을 담글 수 있는 곳. 특히 폭포 여행 중 가장 길이 협소한 곳으로 무리지어 이동하는 경우는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곳이기도 하다.

 

제2폭포의 오묘한 모습. 물길이 약한 바위면을 뚫어면서 생겨난 모습으로 마치 큰 항아리에 물이 넘쳐나는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제 되돌아 하산하는 길..

 

 

계곡에 수양버들도 보이고..

 

 

연리지는 아니지만 마치 사랑을 하듯..몸을 붙이고 비비꼬면서...얼레리 꼴레리..

 

 

중무장을 한 여행객이 있는가 하면.. 간편복장 연인들도 눈에 띄고..

 

 

산길이 열려져 있다. 골짜기 찬바람이 스산한 기운을 산비탈을 따라 오르면서 한기를 느낄만큼 시원한 바람이 분다. 폭포에서 흩뿌린 물방울이 지면을 두들기고 공기의 밀도 차는 낮은 지면에서 높은 지면을 향해 나그네들을 쉬어 가라며 손짓하고 있다. 자하곡에서 주왕암으로 이동하는 산길에서 만난 골짝 풍경

 

 

 

오른편부터 급수대, 평풍바위, 연화봉으로 이어진다. 주왕산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대 암산 중 한 곳으로 설악산과 월출산에 이어 기암괴석을 자랑하고 있는 곳으로 사철 아름다움을 뽑내는데 봄이면 신록, 여름이면 계곡과 폭포, 가을이면 단풍, 겨울이면 설경과 빙벽으로 유명하다.

 

 

 

연화봉 전경

 

 

주왕암에 계시는 스님 한분이 사각 바구니에 소중하게 싼 뭔가를 들고 암자로 오르고 계신다. 대진사와 함께 창건된 주왕암은 주왕이 숨어 있었다는 주왕굴 아래 좁은 경사에 올려진 작음 절집으로 주왕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 진 암자이다. 암자 입구이자 주왕굴로 가는 길인 가학루를 지나면 2층 상부에 절집 나한전이 있다.

 

 

 

주왕암에서 잠시 바위길을 지나 철재계단을 오르면.. 바로 주왕굴이다.

 

 

철재계단 끝 주왕굴.. 더 갈곳이 없다. 주왕굴은 강수량이 풍부하면 촛대바위에서 흘러내린 물로 인해 동굴이 가려진다고 하지만 지금은 일부 겨우 물이 바람에 흩뿌릴뿐이다.

 

주왕굴은 자연적으로 생긴 깊이가 얕은 자연동굴이지만 높이는 상당하게 높다. 주왕굴은 협곡 마지막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데 주왕이 마장군의 공격을 피해 은거하다 마장군의 군사에 의해 화살을 맞고 죽었다 한다. 주왕굴 안에서 바라보면 큰 비가 내리거나 수량이 많은 날이면 동굴 의 많은 부분을 폭포가 흘러내려 진풍경을 자아 낸다.

 

 

주왕굴에서 내려가는 철재계단을 끝으로 여행은 마무리하고.. 날씨는 꾸릿꾸릿하기만 하고..배는 고프고하여 서둘러 하산을 하는데 여행지라면 늘쌍보이는 관광버스에서 내린 수많은 인파가 동시에 몰려 길을 가로막아 버린다. 그리고 마치 정상을 향해 대회라도 하듯.. 걷는 모습.. 이게 우리나라에 잘못 정착된 여행문화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