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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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봉황동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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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봉황동 유적지는 봉황ㄷ라고 불리우는 구릉과 그 주변 지역을 포함한 대규모 생활. 생산
유적지로서, 1920년 우리나라 최초의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로 유명한 회현리패총과 합쳐진 이
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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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대는 일찍이 청동기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이후 생산과 주거의 거점지역이
였으며, 이후 대규모의 주거지, 고상건물지, 방어시설, 한국 최대 깊이의 패총 등이 발굴되
는 점 등으로 보아 금관가야 지배층집단의 중심 거주지역으로 발전하였던 것으로 추정하는
곳이며, 2002년~2005년 가야문화환경 정비사업 일환으로 옛 모습의 일부를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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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봉황동유적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복원 조성한 고상가옥과 주거시설은 가야시대
일반적인 주거로 반지하식 형태지만 봉황동 유적지 복원된 수혈주거지는 유적 제46호
주거지를 참조하여 바닥면이 지면보다 높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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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회현리에서 발견된 조개더미로 김해패총이라 부른다. 사적 제2호로 지정된 조개더미는
1907년 이마니시(今西龍)가 이끄는 팀에 의해 발굴 그 후 1920년과 1943년~35년 일본 학자가
매장지를 조사하였고 조개더미 속에서 붉은 토기류를 비롯하여 회색 토기와 신라 토기의 파
편과 철부, 철도자 등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어 오래전 이 일대가 조개를 버렸던 오늘날의 쓰
레기장 이였음을 짐작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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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발견된 조개무덤 중 가장 깊이가 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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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철도 너머 봉황동 유적지가 시야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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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제4국 가야의 진실과 오해는 도데체 무엇일까. 대부분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쌱슬이
하다시피 가져가 버린 가야의 유물들을 통해 우리는 또 한번의 뼈 아픈 역사를 되새김질 하며
고대사에 숨겨진 제4국 가야의 진실을 조금이라도 밝혀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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