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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 밀양시 코스여행 " 영남루 - 호박소 - 오천평바위 "

허영꺼멍 2011. 8. 25.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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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아리랑을 따라 걷는 " 영남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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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가을 그 적막한 계절에 찾기좋은 밀양시는 물의 고장답게 맑은 계곡과 폭포

그리고 신비한 이적여행지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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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하면 절로 나오는 콧노래 "밀양아리랑"에 이끌려 밀양시로 향했다. 창원에서 곧장 집으로

돌아가려면 항상 사상부근이 막혀 국도를 우회하여 오는 길목이 밀양시로 밀양루를 통과하여

야 한다.  창원에서 늣게 출발하여 많은 코스를 따르기는 어렵다는 생각에 차량으로 이동하기

쉬운 코스를 따르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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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밀양IC-영남루-아랑각-무봉사-밀양읍성-밀양시립박물관-시레 호박소-오천평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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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 그리고 " 밀양아리랑 & 영남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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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 영남루를 오르면서 괜 서리 콧 노

래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밀양은 아리랑의전설이 깃든 곳이자 우리나라 3대누각(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인 영남루를 가지고 있다. 밀양강변을 따라 시내로

진입하면 강변에 그림자 드리우고 있는 "루" 가 조선후기 대표적인 영남루각으로 조선

시대 아랑의 전설이 스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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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루에는 영남루를 비롯하여 아랑의 전설이 담긴 아랑각, 단군의 영정을 모신 천진

, 무봉사, 밀성대군단이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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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루 강 건너편에 있는 솔숲에는 여름이 한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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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루 건너편에서 주차를 하고 산책하듯 솔숲을 돌아 강물에 반영되는 영남루를 그려

내며 다리를 건너 영남루에 올랐다. 주차를 강 건너편 강변에 주차를 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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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려다 본 밀양읍성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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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영남루로 향하는 길목은 입구가 두곳에 있다. 일단 뒷편 박시춘 선생의 옛집을 먼저

만나기 위해 "박시춘 선생 옛집 - 영남루 - 무봉사 - 밀양읍성"으로 코스를 결정하고 들어

서니 우리나라 가요문화 발전에 큰 업적을 남긴 박시춘 선생의 생가가 복원되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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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춘 선생의 본명은 박순동으로 1913년 탄생하여 1996년 타계하셨다. 1931년 "애수

의 소야곡"을 작곡 후 문공부장관상, 6.25종군유엔표창, 1982년 신세계음향회장을 역

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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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으로 오르기 위해 따라 올라야 하는 길목으로 이전해간 시립박물관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서산대사 동상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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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영남루에서 확인되고 있는 석화는 그 모양이 흡사 국화꽃 모양을 하고 있다. 문양은

비오는 날 또렷하게 확인되고 있는데 연한 남색을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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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7호 " 천진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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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5년(1665) 세워진 천진궁은 밀양루원 과 마주하고 있다. 역대 왕조 시조의 위패를

모신 공진관의 부속 건물이였으나, 경종 2년(1722) 공진관을 대신해 위폐를 보관하는

객사의 기능을 담당, 일제에는 헌병대에서 감옥으로 사용하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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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궁에는 단군의 영정과 위폐고려 태조의 위패, 신라와 백제의 시조 왕과 발해 고왕

조선 태조의 위폐를 모시고 있다. 지금 천진궁은 1957년 수리 후 천진궁으로 바꾸고 정

문에 만덕문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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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 오르면 밀양강변의 잔물결까지 훤하게 볼 수 있다. 원래 "누"각은 사방이 탁 틔인

곳에 높게 만든 건물로 정자와는 다르다. 누각정자보다 큰 규모로 즐기는 곳이다.

누각 옆으로 산길을 따라 오르면 영남루에서 반드시 만나야 하는 사명대사 모습이 보

이며, 조금 더 산길을 따라 난 산책로를 오르면 그다지 크지는 않은 모습으로 자리 잡

 있는 밀양시립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주로 송운대사의 유물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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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아리랑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 유래를 밝히는 주장이 있다. 아리랑은 "나는 사랑하는 임을 떠난다."는 설,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때 고생하던 민중들이 반가운 말은 못 듣고 괴로운 말만 듣게 되니 "차라리 귀가 먹었으면 좋겠다."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밀양 영남루 아랑낭자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라는 설, 신라 박혁거세의 아내 알영부인을 찬미하는 말이라는 설, 등 다양한 설이 있지만 근거는 없어 보인다. 아리랑은 대중이 쉽게 아무나 따라 부르는 노동민요이다. 어떤 악보나 악기의 반주가 필요 없는 단순 암기에 의존하여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뿐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아리랑으로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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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아리랑은 동부지역 대표적 통속 민요로 1968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에서 장려상을 수상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아랑의 전설로 만들어 졌다는 밀양아리랑은 아랑의 슬픈 사연은 어디로 갔는지 노래 전체 분위기는 활달하게 진행된다. 밀양아리랑이 나오게 된 것은 아랑의 정절을 흠모한 밀양의 부녀자들이 노래로 찬미하여 세마치장단에 맞추어 불렀다고 한다. 아리랑은 보편적으로 느린 것이 주류를 이루는 반면 빠른 진행을 보이고 있어 아랑을 통한 아리랑은 아니지 않는가 싶다. 밀양아리랑은 5음계로 "라도레미솔"이다. "라"로 시작해서 "라"로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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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6호 밀양 "아랑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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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의 본명은 윤정옥(尹貞玉/다른 구전에는 "동옥"이라함)으로 경상도 밀양부사의

딸로 관노인 통인 주기(일부 "백가"라고 전함)가 신분을 망각한 채 사모하던 중 달 구

을 나온 아랑을 추행하려 한다. 아랑의 반항이 거세지자 비수를 꺼내 위협하려다

아랑은 칼에 찔려 죽음에 이르고 대숲에 버려졌지만 부사는 아랑이 외간 남자와 내통

하고 달아났다하여 벼슬을 사직하고 한양으로 올라갔다. 윤부사가 떠난 후 밀양에 부

하는 신임부사는 부임하는 첫날 의문의 주검 당한 채 발견되는 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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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사한다는 소식이 퍼져 나가자 누구도 부임하려 들지 않아 폐군이 될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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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에서는 누구라도 부임을 자청하면 들어 주겠다고 하자 젊은 붓장사 한명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부사나 한번 하고 죽자는 마음으로 밀양부사를 자원하고 밤을 맞으니

피투성이의 처녀가 나타났다. 기겁을 한 신임부사는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에게 무슨원한이 있어 이처럼 엄청난 일을 저지르는지 묻자 귀신은 자신이

으로 그 자초지경을 아뢰며 원한을 갚아 줄 것을 부탁하면서 자신을 겁탈하려

죽인 관노의 갓 위에 나비가 되어 앉겠다고 말한 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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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부사는 관속을 전부 모아두니 과연 나비 한마리가 날아들어 관노의 갓 위에 앉

는지라 부사는 관노를 문초하니 결국 그 죄상이 밝혀져 대숲을 살펴보니 아랑의 시신

이 썩지 않고 있더라는 것이다. 아랑의 시신을 거두어 묻어주고 그 자리에 비석을 세

우고 사당을 만들며 매년 음력4월 16일 제관을 뽑아 원혼을 달래는 제향을 드리니 더

이상 원혼이 나타나지 않고 고을이 잘 되었다고 전하며 밀양아리랑이 이곳 영남루

 비화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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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각1965년 주민에 의해 중건한 후 2004년 새롭게 아랑각을 단장하고, 현판은

1910년 구한말 명필가인 하동주가 쓴 것이며, 1972년 육영수 여사가 김은호에게 의뢰

하여 만든 영정과 함께 1957년부터 매년 음력 4월16일 아랑제와 함께 제사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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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이 죽은 곳에 세웠다는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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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계단을 올라와 갈림길에서 오른편으로 진입하면 무봉사가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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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493호 " 무봉사 석조 여래좌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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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공왕 9년(773) 법조가 영남사의 암자로 창건했다는 무봉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석조 여래불좌상은 본래 영남사 터에서 광배와 대좌가 없이 발견된 불상으로 높이가

 97cm의 좌상이며,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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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봉사에서 밀양읍성으로 가는 길은 들어왔던 입구를 따라 다시 나간 후 밀양아리랑 비석

앞에서 산을 따라 10여분 오르거나 무봉사 뒷문을 따라 산길을 내려가다 올라가는 갈림길

에서 왼쪽 오르막능선을 따라 오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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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기념물 제167호 " 밀양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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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남천강 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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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읍성은 왜구의 침입을 막기위해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조성하였는데. 밀양읍성은

조선 왕조 마지막까지 존속되었으나, 1910년 한일합병과 함께 일본이 읍성을 철거하

하면서 우리나라 대부분 성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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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읍성은 조선 초 성종 10년(1479) 축조, 1902년 경부선 철도가 관통하면서 파괴되

었다. 성은 길이 2.1km, 높이 2.7m로 성안에 객사와 동헌, 관아, 연못, 우물 4개가 조

성되었으며, 선조 23년(1590) 성곽을 정비하면서 밀양부사 신집(1541~1609)이 성 둘

레에 못을 깊이 파고 물을 끌여들여 성을 지키려 하였는데 당시 연못 1개와 우물 8개

를 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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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상에 위치한 성루에 오르면 밀양강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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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관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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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기념물 제2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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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 수령이 공무를 처리하던 밀양 관아는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선조32년(1599) 당시 부사가 초옥을 세워 집무를 보다 광해군 3년(1611) 관아를 재건

그리고1611년 중건 후 300여년간 관청으로 사용하다 1927년 삼문동으로 밀양군청이 이

전을 하자 옛 내일동사무소로 사용되다 2010년 4월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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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시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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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영남루에 있던 박물관이 다시 새롭게 자리잡고 세워진 곳이지만 박물관의 규모에 비해

전시중인 유물이 부족하여 박물관을 찾는 사람이 많지 않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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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입구에서 바라본 성당 전경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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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 있는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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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을 빠져나와 다시 국도를 따르면 밀양 표충사 그리고 밀양댐으로 향하는 코스와

밀양 얼음골로 향하는 코스로 여행지는 나누어 진다. 밀양 얼음골 코스 중에서 밀양 호

박소 그리고 오천평바위 계곡으로 코스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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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간이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밀양 시레 호박소 입구 주차장에 주차하고 산길을 따라

오르면 오천평 바위로 향하는 길과 시레 호박소로 향하는 길로 나누어 진다. 주차장 입구

갈림길에서 오천평바위까지 약 1km 그리고 호박소까지는 100m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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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얼음골 주차장에서 5분 정도 더 안으로 달려가면 밀양시에서 가장 큰 “소”가 있다.

양시 산내면 남양리에 위치한 호박소10m에서 떨어져 30m 타원형으로 형성된 수

중보 즉, 소(沼)로 그 모양이 흡사 옛날 방앗간 절구의 일종인 호박을 닮았다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해마다 익사사고가 발생하는데 이무기가 용이되어 승천하지 못하고 호박소에

겼다는 전설과 함께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는 곳으로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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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마지막 코스

오천평바위로 가는 길에서 만나는 물소리와 계곡의 풍경은 원시림이 따로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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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평계곡으로 가는 길에는 산길도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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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평 암반에 가까이 왔다는 듯... 계곡이 바로 옆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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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평 바위를 흘러 내리는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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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펀평 바위.. 정말로 넓다. 입이 떠엌,,, 곳곳에 고기굽은 흔적..그러나 청소상태는 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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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평 바위를 타고 흘러내린 물은 계곡을 따라 크고 작은 낙차를 만나 아담한 폭포를

만들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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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길고 지루한 장마로 인해 계곡이 그리 붐비지 않았다. 피서를 나온 사람보다는

등산하는 사람들의 알탕장소로 알려진 이 일대의 계곡에는 한여름 무더위를 식혀버릴

여름계곡 여행지로는 으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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