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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 2011년 9월 경주 추천여행 코스

허영꺼멍 2011. 8. 28.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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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 경주 여행 " 꽃길 코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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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는 항상 새로운 길을 열어 준다. 자전거 여행을 시작하기 더 없이 좋은 코스가

경주시 일원에 펼쳐져 있는 8월말~9월초 여행은 짙노란 금계국 활짝 피어있는 들판

을 거닐듯 따라가며 역사여행을 겸하는 코스가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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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코스는 경주 첨성대 주변 도로변에 주차를 하고 도로를 따라 도보여행을 하

는 여행코스로  " 첨성대-경주 수목원 - 서출지 - 통일원 - 황룡사지 " 코스로

뜬급없다 싶겠지만 여름과 가을의 경계를 채색하는 꽃 길을 만나는 느낌은 더 없이

좋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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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접어들면서 부쩍 알려지기 시작한 경주 수목원의 정식 명칭은 경북 산림환경

연구원으로 통일전으로 가는 길목 좌, 우에 자리잡고 있다. 입장료는 없는대신 방명

록을 기재하고 다양한 테마로 이어지는 숲길을 따라 자연을 만끽하며 산책하듯 길을

따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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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프레지던트 영화촬영지인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원 일대는 유적, 유물 일색인 경

주여행에 색다른 정취를 가져다 주는 여유로운 여행의 휴식코스로 수목원을 걷는 낭만을

느낄 수 있다. 화랑 톨일전, 서출지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지만 안내판이 없어 지

나 치기 쉬운 곳으로 경주여행에서 시간이 허락한다면 매미 목놓아 울 때 늪지식물이 사

는 개울 옆 벤치에 앉아 힘겨움을 잠시 내려놓아도 좋은 곳이다. 수목원 내에는 동물원을

비롯 다양한 수목을 만날 수 있는데, 특히 품종별 나무를 통해 학습효과까지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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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로 접어드는 길목에 성급한 낙엽은 산책로를 변화시켜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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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꽃 / 부처꽃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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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범의꼬리 / 꿀풀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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꽈리 / 가지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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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부쟁이 / 국화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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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비장이 / 국화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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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개미취 / 국화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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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쑥부장이 / 국화과 (울릉도 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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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타리 / 마타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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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국 / 국화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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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노랑이 / 한약명 : 백맥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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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도 있다는.. 야생 상태의 멧돼지도 있다는..무섭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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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 입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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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목원을 나서면 곧장 통일원과 수목원으로 향하는 길이 이어진다. 통일원은 일단 통과하고

서출지로 향해본다. 이미 연꽃은 사리진 서출지라지만 연초록 어우러진 모습은 가을로 가는

길목에서 꼭 만나야 할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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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38호 서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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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38호 서출지는 신라 소지왕(479~500) 목숨을 까마귀의 조언에 의해 구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으로 작은 연못 위에 조선 현종 5년(1664) 임적이 지은 "이요당"이

연꽃과 대비를 이루며 자태를 뽐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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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출지 주변은 곡식이 익어며 고개를 숙이고 남산자락 아래 구름이 바삐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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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소지왕이 궁 밖으로 거동하니 쥐가 나타나 "까마귀가 가는 곳을 따라가라"

하였다. 왕이 그 말대로 따라가 이 못에 이르렀을 때 한 노인이 나타나 " 거문고 갑

을 쏘시오 "라고 쓴 글을 받쳤다.

이에 왕이 궁으로 돌아와 활로 거문고 갑을 쏘았다. 그랬더니 그 속에 숨어 있던 궁

주와 승려가 화살을 맞고 죽었다.

그 뒤로 이 못을 "서출지"라 하고, 정월 보름에 까마귀에게 찰밥을 주는 "오기일"이

라는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지금도 경주 지방에는 정월 보름날 아이들이 감나무

밑에다 찰밥을 묻는 "까마귀 밥주기" 풍속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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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출지와 관련하여 설화를 살펴보면 왕이 거동한 틈을 타서 왕을 시해하려는 무리가 거문고

갑에 숨었는데 누군가 서출지에 당도한 왕에게 이 사실을 알려 시해하려는 음모를 사전에

차단하지 않았나 싶지만 어디까지나 설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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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불교가 자리 잡지 못한 상태로 민간신앙과 신흥불교의 충돌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불교는 23대 법흥왕 때 비로소 나라에서 불교를 인정하고 그 이전에 불교가 진입하는 과정

에 있었다. 서출지 주변은 온통 베롱나무와 연꽃이 지천에 피어나며 조선 현종5년(1664)에

임적이 만든 이요당이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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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출지에 관한 논란꺼리가 생겼다. 삼국유사 사금갑의 이야기를 빌어 서 출지가 지금

위치가 아니라 200m 더 올라가면 양피 못이란 작은 연못이 있는데 그 곳이 서출지로 추정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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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출지를 내려선 후 숲길을 걷고자 한다면 수목원까지 잇는 길목에서 만나는 숲길을 따라

왕릉 2곳을 찾아가면 된다. 그리고 길을 따라 다시 내려서면 드 넓은 대지에 핀 금계국의

장관을 만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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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6호 황룡사지 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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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구황동 당간지주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2호 분황사 바로 앞 남쪽에 서 있다.

양 기둥 사이에는 동쪽으로 향한 돌거북이가 있는데 당간의 받침돌로 돌 거북이를 배치한

것은 다른 당간지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을 한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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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지는 사적 제6호로 신라 진흥왕 14년(553) 월성의 동북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사찰로 고쳐 짓게 하여 절 이름을 황룡사라 하였다고 한다

574년에 주존불인 금동 삼존불을 만들고, 선덕여왕 14년(645)에 자장의 권유로 백제의

기술자인 아비지를 초청하여 9층 목탑을 완성시켜 4대 93년간에 걸친 공사를 마무리 하

였다. 이후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고의 침입을 받아 불타버린 후, 옛터만 남아 있던

것을 사역내 민가 100여호를 이주시키고 1976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서 8년간 발굴조

사를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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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도를 상징하는 황룡사9층탑을 만들고 불심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던 선덕여왕의 의지가 담긴 황룡사는 천년고도의 몰락과 함께 긴 세월동안 침묵하다 금당지와 초석이 확인되면서 새롭게 천년의 꿈을 이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황룡사는 신라 제일의 사찰로 월성 동쪽 용궁의 남쪽(지금의 구황동)에 위치했다 전한다. 진흥왕 14년(553) 대궐을 짓기 위해 공사를 하던 중 황룡이 출몰하여 사찰을 만들고 황룡사로 불렀는데 무려 17년이 소요된 569년에 국찰의 면모를 완성했지만 사찰의 모든 전각이 소실과 파괴로 사라져 버리고 중문, 탑, 금당, 회랑, 강당 등의 주요 건물 초석만 확인되고 있다.
 
황룡사는 구층탑의 장륙존불과 솔거가 그린 금당벽화가 있었으며, 자장이 보살계본을 강설하고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을 연설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나라의 길흉화복이 있을 때면 왕이 친히 친행하여 백고좌강회를 통해 불보살의 가호를 빌었지만 효소왕 7년(698) 벼락으로 소실된 후 다섯 차례 중수를 하였지만 고종 25년(1238) 몽고군 침략으로 소실된 후 재건을 하지 못하고 영영 사라져 버렸고, 1064년 심초석에 있던 사천왕상이 조각된 사리함을 도굴 당했지만 회수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황룡사의 중심은 거대한 높이의 구층목탑(225척/ 81m)이 위용을 과시했다. 기록에 의하면 자장이 당나라 유학 당시 태화지를 지나갈 때 신인이 나서 “황룡사 호국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으로 돌아가 그 절에 9층 목탑을 세우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구한이 와서 조공하며 태평할 것이다”는 말에 따라 선덕여왕 12년(643) 귀국하여 왕에게 청하여 탑을 세웠는데 탑은 백제의 명공 아비지가 만들고 용춘이 주관하였다. 완공된 탑은 외부로부터 침략을 막기 위해 9개 나라를 상징하는 탑을 조성하였으며, 총 높이 225척이며, 탑에 진신사리 100립을 봉안했다. 9개 나라는 아래층부터 일본, 중화, 오월, 탁라. 응유, 말갈, 단국, 여적, 예맥 순이다.
 
황룡사 금당에 모셔진 장륙존상은 장륙의 석가여래삼존상을 중심으로 좌, 우 10대 제자상 및 2구의 신장상을 모시고 있다. 장육존상의 조성과 관련된 이야기로 서천축 아소카왕이 석가삼존불을 만들기 위해 철 5만근과 황금 3만 분을 모았지만 만들지 못하고 배에 실어 인연이 닿는 나라에서 장륙존상이 만들어 질 것을 발원하고 설계 모형을 함께 싶어 보냈는데 진흥왕 35년(574) 경주에서 주조하여 만들고 그 후 몽고군 침입으로 성덕대왕신종 보다 4배가 큰 범종과 함께 소실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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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황룡사지 복원과 함께 의문이 남는 점이 있다. 문헌기록상 월성 동쪽에 있는 황룡사라면 지금의 위치는 월성 북동쪽으로 분황사지와 겹쳐 있고 바로 인근에 미타사지가 있어 그 중간에 황룡사가 있다는 것은 이해가 어렵고 불국사 사적기에 따르면 용궁(왕궁) 남쪽에 황룡사가 있고 북쪽에 분황사가 있다는 기록으로 볼 때 미탄사지와 분황사 사이에 황룡사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면 과연 지금의 황룡사지는 어떤 곳일까 하는 궁금증이 더해진다. 미탄사지의 일부이거나 분황사지의 일부로 보기에는 턱없이 넓은 공간이다 는 점은 곧 천년고도 경주의 궁궐에 의혹의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다. 불교로 나라를 다스린 신라에서 내불당이 함께하는 대궁궐이 있었다하여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황룡사는 처음부터 사찰로 만든 것이 아니라 궁궐을 짓기 위해 공사도중 황룡이 발견되었다는 점은 곧 궁궐에 내불당을 만들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사찰 공사기간으로는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다는 사실 또한 의문이다. 궁궐이 아니고는 오랜 시간이 소요된 공사는 옛 기록상 없다. 신라가 아무리 불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하여도 동양 최고 사찰 터로 추정될 만큼 경주 중앙 2만여 평에 사찰 터는 분명 아닐 것이다.
 
신라 진흥왕 14년(553)월성의 동북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사찰로 고쳐 짓게 하여 절 이름을 황룡사라 하였다고 한다. 574년 주존불인 금동 삼존불을 만들고, 선덕여왕 14년(645)에 자장의 권유로 백제 기술자인 아비지를 초청하여 9층 목탑을 완성시켜 4대 93년간에 걸친 공사를 마무리했다. 이후 고려 고종 25년(1238)몽고의 침입을 받아 불타버린 후, 옛 터만 남아있던 것을 사역내 민가 100여호를 이주시키고, 1976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서 8년간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원래 황룡사 대지는 25,000평에 달하는 늪지를 매립하여 마련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사찰의 건물은 남북으로 일탑식 절 배치를 기본으로 하고, 금당의 좌우에 거의 같은 규모의 건물이 나란히 세워져 이 건물 역시 금당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을 밝혀졌다. 출토된 유물은 4만여 점에 달하며 모두 우수한 작품들이다.(황룡사지 안내판 인용)
 
또한 분황사 앞(남쪽)에서 황룡사지를 잇는 곳에 1기의 당간지주가 있는데 이 당간지주는 분황사 당간지주로 추정하면서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유형문화재 제129호)로 기록되어져 있다. 즉 황룡사, 분황사, 미타사가 각기 하나의 독립된 사찰로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이상한 모습이 된다. 결론은 왕궁을 중심으로 미타사와 분황사 그리고 황룡사 및 주변에 많은 사찰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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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지 길목에는 분황사를 거쳐야 하는 길목이기도 하다. 경주 구월의 여행코스는 시간의

여유만 넉넉하다면 아래와 같이 권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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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대릉원 주차 - 대릉원 - 첨성대 -계림 -석빙고 -안압지 -황룡사지 - 분황사 - 수목원 -

통일전 - 서출지  그리고 차량으로 보문단지 이동 - 보문단지 - 경주 엑스포장 - 불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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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꽃길 연계코스     http://blog.daum.net/okgolf/5464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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