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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청도] 솔바람길 운문사

허영꺼멍 2014. 6. 3. 11:51

 

 

운문사로 향하는 솔바람길

평소 절집을 차량으로 들락꺼렸다. 매표소 입구 숱한 솔숲길을 무관심으로 스쳐가다 매표소에서 문득 솔바람길이정표를 보면서 매표소 입구 앞 주차장에 주차를 해 놓고 오늘은 도보를 하여 운문사로 향하기로 하였다.

 

▲ 삼족대

 

김대유(14791551)는 문신출신으로 정암 조광조의 문인으로 연산군 4(1498)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숙부 탁영 김일손이 처형되면서 부친인 동창 김준손과 함께 호남으로 유배길 에 오른다. 조정 출사의 꿈이 일순간 무너져 버린것이였다. 중종 1(1506)이 왕으로 오르면서 귀향에서 풀려난 김대유는 다음해인 중종 2(1507) 장원급제로 진사에 등용되지만 고향으로 내려왔고, 중종 13(1518) 조광조의 건의로 현량과가 설치되고, 어수선한 조정에서 새로운 인재 등용을 바라던 중종에 의해 향리에서 천거되어 전생서 직장을 거쳐 중종 14(1519) 현량과 병과로 급제 여러 직책을 거쳐 정언에 오르자 이를 사직하고 칠원 현감이 되었지만 그해 조광조가 임금이 될 꿈을 꾼다는 소문과 함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이란 글을 벌레가 파먹도록 한 후 이를 임금에게 보여주면서 조광조와 그를 따르던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기묘사화로 인해 현량과가 폐지되고 급제자를 취소하자 현감직 마저 내놓고 낙향하여 후학 양성에 전력하며 지냈는데 중종이 죽고 인종 1(1545) 직책이 복과되어 조정에서 부르니 왕명을 받들어 먼 길을 가다 중도에 병이나 다시 돌아와 은거하다 명종 7(1552) 274세로 졸했다.

 

▲ 삼족대

 

기묘사화로 정치판은 요동쳤고 김대유는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당시 낙향하면서 비통한 마음을 스스로 달래며 내려와 탁 트인 전망을 배경으로 물이 맑아 맑은 청()을 사용하여 지명이 청도인 동창천 암벽 위 정자를 짓고 은둔생활을 시작하였을 것이다. 어쩌면 다시 현량과가 부활하여 조정으로 부르는 그날을 기다리며 긴 세월을 초야에 묻혀 지내기로 작심을 하였을 수도 있다. 호는 삼족당으로 "나는 60세가 넘었으니 ()()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도 할 만큼 했으니 榮和(영화)에도 ()하고, 朝夕(조석)으로 식사도 남 못지않게 할 수 있으니 ()에도 ()하다. 그러니 나의 ()三足堂(삼족당)이라 하리라하였다 한다. 시대가 바뀌었다. 중종시대가 끝나고 인종시대가 열리면서 복과되는 기쁨을 누렸지만 이미 세월이 너무 많이 흐른 탓에 먼 길을 단숨에 가지 못하고 병을 얻어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 올 때 그는 세상의 허무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 삼족대 아래 청도천 전경

 

경북문화재자료 제189호 삼족대 그리고 1973년 세운 김대유 신도비와 참봉 김용희의 중수기문이 있다. 조선 중기에는 조식, 박하담, 주세봉 외 여럿 문인이 강론하던 장소로 이용된 곳으로 김대유의 호를 따서 삼족대라 불렀다. 삼족대는 정면 3,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여느 다른 정자와는 달리 사방으로 토담을 쌓고 정자로 들어서는 일각문과 2칸의 방, 부엌, 우물이 있어 일반 사가처럼 보이지만 한국적 미를 두루 갖춘 정자로 알려져 있다.

 

 

 

▲ 청도천에서 만난 자라

 

 

 

 

청도 운문사에 접어들다

 

▲ 운문사 매표소 앞 주차장

 

▲ 입구에는 산딸기가 흐더러지게 있었다.

 

▲ 바람의 길

 

상처난 소나무 숲길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매표소를 시작으로 소나무 숲길이 이어지는 길에서 만나는 소나무 허리춤은 온통 송진을 채집하기 위해 크고 작은 나무와는 상관없이 죄다 상처가 있었다. 일제말기였던 1943~1945)에 자원이 부족한 일본군이 우리나라 사람을 강제로 동원하여 연료로 쓰기 위해 송진을 채취한 자국으로 6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가끔 산속에서 만나는 송진 채취를 위해 큰 나무 몇 그루에서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대규모 채취한 흔적을 딛고 자연이 그린 산수화 사이로 길을 터놓았다.

 

▲ 소나무 숲 사이로 길을 열고 걷는 탐방객

 

▲ 끝없이 이어지는 소나무 숲길

 

숲길이 좁아졌다 다시 길을 터어 놓고 그 사이로 소담한 이야기가 들려온다. 운문산에서 흘러 내린 오염이 없는 청정한 맑은물은 청도천을 이루며 자연에너지는 산을 푸르게 한다. 솔바람길을 걷는 한순간도 놓치기 아까운 풍경이 바람따라 흔들리며 반겨준다.

 

▲ 고목이 된 느티나무가 계곡을 중심으로 좌우에 늘어서 그늘을 만들어 준다.

 

▲ 청도천으로 흘러가는 계곡물

 

▲ 차량을 이용하여 운문사 입구까지 향할 수 있다.

 

▲ 운문사로 향하는 길

 

▲ 운문사 가는 길목

 

 

 

▲ 운문사 경내로 가는 길

 

우거진 풀숲너머 운문사에 접어들면 묵묵하게 고요함이 가슴에 와 닿는다. 고개들어 올려보면 겹겹 솔숲 너머 소나무와 어우러진 암반들이 매번 새롭게 다가온다. 깨어 있으라. 붓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마음 수행의 길로 들어 선 여승이 머무는 운문사에 발을 내 딛는다.

 

▲ 운문사 동.서 삼층석탑(보물 제678호)과 절집 기와

 

▲ 운주사 대웅보전 뒷 전경(보물 제835호)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인 운문사는 신라 진흥왕 21(560) 신승이 북대암 옆 금수동에 암자를 만들어 3 년간 수도한 끝에 득도하여 7년간 동쪽에 가슬갑사, 서쪽에 대비갑사, 남쪽에 천문갑사, 북쪽에 소보갑사를 짓고 중앙에 대작갑사를 창건하고 진평왕 30(608) 원광국사가 중창한 후 보양이 중창하면서 오갑사로 부르다 943년 왕건이 후삼국 통일을 위해 도왔던 보양의 공에 보답하기위해 운문선사라 사액하고 전지 50결을 하사하면서 오갑사는 중 천문갑사를 운문사라 불렀다.

 

 

▲ 동서 삼층석탑

 

▲ 동서 삼층석탑 조각

 

▲ 운문사 대웅보전

 

고려 숙종 10(1105) 원응국사가 중창하면서 전국 제2의 선찰로 자리 잡고 화랑도인 추항과 귀산에게 세속오계를 내려 화랑정신의 발원지가 된 후 임진왜란 당시 일부 건물이 소실되고 숙종 16(1960) 설송대사가 중창을 하였다. 그 후 중창은 1835년 운악대사를 거쳐 1912년 긍파대사, 1913년 고전선사를 이어 지금의 모습은 1977년 명성스님이 대웅보전과 범종루 및 각 전각을 신축 중수하였다.

 

 

▲ 운문사 전경

 

운문사는 비구승이 있는 곳으로 1958년 불교정화운동 이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되고 1987년 승가대학으로 개칭된 후 많은 수도승을 배출하고 있다. 1277년 일연선사가 운문사 주지로 있을 당시 삼국유사를 집필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 운문사 감로수

 

 

 

 

▲ 운문사 사천왕석주( 보물 제318호)

 

▲ 운문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

 

 

 

 

▲ 운문사 처진소나무( 천연기념물 제180호)

 

 

 

 

 

▲ 운문사 원응국사비(보물 제316호)

 

 

 

 

 

 

운문사내 불교유적으로 운문사금당앞석등(보물 제193), 운문사동호(보물 제208), 운문사원응국사비(보물 제316), 운문사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 운문사사천왕석주(보물 제318), 운문사삼층석탑(보물 제678), 운문사대웅보전(보물 제835), 운문사처진소나무(천연기념물 제180), 운문사 내원암석조아미타불좌상(경북 문화재자료 제342) .등이있다.

 

 

 

 

 

즐거운 여행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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