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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논산] 개태사 & 개태사지

허영꺼멍 2015. 2. 9. 07:34

 

 

 

 개태사 개태사지

| 사찰여행 | 충청남도 논산시

 

 

태조 왕건이 후삼국통일과 함께 전승을 기념하며 전쟁으로 죽어간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4년이란 기간을 들여 만든 개태사는 태조 23(940) 낙성법회와 함께 등을 밝혔다. 왕건은 태평한 시대를 열자는 의미로 절을 개태(開泰)라 부르며, 뒷산이던 황산을 하늘이 보호한다는 상징적 의미로 천호(天護)라 부르며 국찰의 면모를 갖춘 개태사를 찾아가 본다.

 

전국 사찰을 관장하면서 팔만대장경의 활자본 고정 작업을 한 전통사찰이자 고려시대 국찰이었던 개태사는 활짝 열려진 공간을 하나씩 열고 들어서면 측백나무 숲이 길 양편에 늘어서 호위하고 먼 산에 살포시 내려앉은 운무는 가벼운 깃털처럼 흩어졌다 모여든다. 사찰로 들어서면 정면에 마주하는 정법당 문짝 아래는 사찰당우에서 볼 수 없는 거북이 문양이 조각되어져 있으며, 팔각형태의 우주각이 자리 잡고 그 옆에 철학 보호각이 서 있다. 우주각에는 사방으로 문이 나 있으며 이 건물을 나한전으로 부르기도 한다.

 

▲ 개태사 전경

태조는 신검을 쫒아 황산 숫고개를 지나 마성에 진을 치자 신검은 마침내 항복하고 삼국을 통일하게 되자 태조는 후백제 신검을 제압 정벌의 가장 큰 공을 하늘의 도움을 받았다며 최후의 전승지였던 일리천전투 장소에 태조 19(936) 황산을 천호산으로 개칭한 후 사찰을 세우고 태조 영전을 설치하여 제를 올리는 등 고려시대 호국 사찰로 번성하지만 조선 초기 퇴락하기 시작하면서 세종 10년 개태사 인근마을의 풍년을 방해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옛 개태사 자리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그 후 1432년 개태사 승려가 큰 수정석 2과를 세종에게 헌상하고 다시금 불교진흥책으로 중흥의 기틀을 보였으나 그 후 폐찰이 되고 1930년 김광영이 중창불사를 시작으로 도광사로 개칭되었다가 태광사로 다시 개태사로 개칭되었다.

 

 

불교유적으로 개태사지석불입상(보물 제219), 개태사지(충남시도기념물 제44), 개태사철확(충남시도민속자료 제1), 개태사오층석탑(충남문화재자료 제274), 개태사지석조(충남문화재자료 제275)등이 있다.

 

▲ 왕건 영정을 봉안하고 있는 어진전

 

도선국사는 875년 어느 날 2년 뒤 고귀한 사람이 태어 날 것이라 예언하였고 송악에서 왕건이 태어났다. 도선국사는 통일된 세상을 위해 태조에게 계룡산 자락에 개태사를 세울 것을 청하였고 4년이란 공사기간을 통해 창건한 개태사에는 불상 외에도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는 진전(眞殿)을 세웠다. 그 후 소실되고 사라졌던 고려태조 왕건(877-943)의 어진을 2013615일 점안식을 거행하면서 어진전이 생겨났다.

 

어진전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936년 태조 19년 황산에서 후백제 신검으로부터 항복을 받은 왕건은 통일의 대업은 부처님의 은혜와 하늘의 도움이라 여겨 황산을 천호산으로 개명하고 개태사를 창건했다. 절이 완공되자 왕건은 친히 소문을 짓고 성대하게 낙성법회를 열었다고 한다. 왕건이 손수 지은 소문에 부처님의 도움에 보답하고 산령이 도와주심에 수응하기 위해 관청에 명하여 새 연궁(사찰)을 건립했는데 산 이름을 천호라 하고 절 이름을 개태사라 했다고 개태사 창건동기와 배경을 소상히 밝혔다. 개태사에는 왕건의 어진이 봉안되어 있어 진전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기일마다 제를 올렸다고 한다. 왕건의 옷 한 벌과 옥대가 보관돼 있었으며 국가 대사가 있을 때마다 어진에 나아가 길흉을 첨치기도 했다. 실제 공민왕은 강화도로 천도하려는 마음으로 개태사에 사람을 보내 가부의 점을 쳤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왕건 이후 개태사는 개경과 거리가 멀어 왕실의 관심이 멀어지고, 우왕 때에는 왜구가 침입, 방화 약탈을 일삼아 절의 살림이 어려워진데다 조선 초 숭유억불 책으로 퇴락의 길을 걷는다. 조선 세종때 불교 진흥책으로 잠깐의 중흥의 기틀을 다지는 듯 했으나 그 뒤 폐허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서기 2003년부터 2011년까지 풍전등화 같은 쟁송을 겪고 2008년 명실상부한 대한불교 조계종 호국종찰 개태사로서 변모를 일신하여 2013515일 어진전을 신축 완공하여 태조 왕건 어진을 모시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개태사는 고려 우왕 2(1376)부터 14년까지 모두 세 번의 왜구 침략에 소실되고 말았다. 그 후 1934년 불자 김광영씨가 재건을 시작하였다. 개태(開泰)는 태평 시대를 연다는 의미이다. 통일 그리고 전쟁 없는 평화를 기원하는 왕건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일까? 개태사에는 왕건의 얼굴을 그린 어진을 봉안하고 있다.

 

▲ 아미타삼존불상(보물 제219호)

 

극락대보전에는 아미타삼존석불인 개태사지 석불입상(보물 제219)이 안치되어 있다. 개태사지 석불입상은 삼존불 중 중앙의 부처는 둥근 얼굴형으로 신체의 표면처리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소리는 소발에 정수리가 큼직하며 얼굴은 둥근 역삼각형이나 인근의 부처에서 볼 수 있듯 눈과 코가 작은 편이며, 법의를 오른쪽 어깨만 두르고 손은 시무외인(중생을 보호하며 두려움을 잊게 해준다는 표시)을 하고 있다.

 

좌우 협시불은 본존불과 같은 수법이지만 어깨와 가슴 표현이 좀 더 부드럽게 표현되어져 있다. 천의자락도 형식적이지만 뚜렷하고 아름답게 표현 된 고려시대 석불로 대표적이라 말할 수 있다. 석불입상은 본존불 높이가 4.15m, 우협시불 3.21m, 좌협시불 3.50m로 왼쪽 협시불은 발견당시 머리가 떨어져 나가 인근에서 찾은 후 1988년 복원하였다.

 

 

 

논산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고려 초기 개태사 건립(940)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미타삼존석불이다. 아미타불은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부처님이다. 중앙의 본존불은 신채가 원동형으로 처리되어 신체의 굴곡이 드러나지 않는다. 머리는 소발에 정수리가 큼직하며, 얼굴은 둥근 역삼각형이나 큰 눈에 비해 코와 입은 작은 편이다.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손 모양은 중생을 보호하여 모든 두려움을 물리쳐준다는 시무외인이다. , 우 협시보살은 본존불과 같은 수법이나 어깨와 가슴 등은 좀 더 부드럽게 표현되었다. 천의 자락도 형식적이지만 뚜렷하고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단정하면서 통통한 몸집, 큼직한 두 손과 부피감 있는 팔, 다소 두꺼워진 옷자락 등 전반적으로 조각의 선이 굵고 강하여 후삼국을 통일한 초기의 굳건한 기상이 드러나 있는 교려시대의 대표적인 석불로 그 가치가 크다 할 수 있다.”

 

▲ 무쇠로 만든 철확

 

개태사가 국찰이었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국찰인 만큼 많은 승려와 신도들이 찾았을 개태사에는 사지에서 옮겨 놓은 무쇠솥의 크기를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충남시도민속자료 제1호 철학은 대형급 가마솥으로 직경 3m, 높이 1m 크기의 엄청난 가마솥으로 승려 500여명의 밥을 지을 수 있도록 태조 왕건이 하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철확은 세월에 따라 심하게 형태가 파손되어 지금은 형체를 겨우 알아 볼 정도로 상해 버렸지만 개태사 스님들의 공양을 위해 밥을 짓는다고 생각해 보니 정말로 엄청난 일이었을 것으로 생각이 스쳐간다. 철확은 개태사의 쇠퇴와 함께 녹슬기 시작하였는데 철학과 관련한 재미있는 구전이 내려온다.

 

 

왜적의 침입이 잦아 폐사된 개태사는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군사 들이 이곳에 모여 식사를 준비하였는데 그 당시 무쇠솥으로 밥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국을 끊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철확무쇠밥을 먹은 군사는 왕건의 정기를 받았는지 싸움에서 연승하는 등 이상한 일이 생겨나자 이 사실을 염탐한 왜적은 철확을 옮겨 가려 시도하지만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벼락이 내려 감히 엄두도 못 내었다고 한다. 철학의 운명도 기구하여 쓸모가 없어진 무쇠솥은 한동안 방치되어오다 조선고종 24(1887) 정해년 대홍수로 2km 정도 떠내려 와 있던 것을 최근 옮겨 보관하고 있다. 철학의 밑 부분은 화기를 고루 받도록 90cm의 둥근 굽이 있고 두께가 3cm이다. 철확의 정확한 사용처는 밥을 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큰 가마솥에다 밥을 한다는 것이 엄청나게 힘든 일임을 감안해 보면 밥보다 국을 끊였던 용도가 아닐까 추정하며, 여지도서 충청도 연산군 조에 의하면 개태사 전성기에 된장을 끊이던 솥이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 개태사 오층석탑

 

개태사로 들어서면 중심에 삼층석탑 1기가 절집으로 안내한다. 화재로부터 살아남은 삼층석탑은 오랜 세월 몸부림 친 흔적으로 성한 곳이 없을 만큼 훼손이 심하다. 개태사오층석탑(충남문화재자료 제274)은 개태사지 북쪽건물 앞에 있던 탑을 지금의 개태사로 옮겨왔다.

 

 

오층석탑은 1층 탑신 이하와 5층의 지붕돌 이상은 없어져 최근 1층 탑신과 기단부, 보주 등 복원을 하였다. 전형적인 고려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는 오층석탑으로 개태사의 유일한 석탑이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석탑은 황산벌에서 죽은 이들의 영혼을 위해하기 위해 세워졌을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영혼을 달래며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라 본다.

 

오층석탑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탑은 부처님의 사리나 유품을 모시기 위하여 만들어진 건조물이나 후에는 가람배치상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탑은 개태사지 제일 북쪽 건물지에 있던 것을 현 개태사 경내에 옮겨 놓은 것이다. 1층의 탑신 이하와 5층의 지붕 돌 이상은 없어져 최근에 1층의 탑신과 기단부 및 보주 등을 새롭게 만들어 복원한 것이다. 지붕 돌은 4단의 층급받침에 약간 치켜진 처마를 지녔고, 네 귀의 반전이 아름답다. 상륜부에는 보주만이 올려져 있는데, 탑 앞에 있는 양련의 석재도 이 탑의 상륜부 부속석재로 보여진다. 이 탑은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다.”

 

▲ 방문당일 청운각은 보수중이며, 우주각은 굳게 문이 닫혀 있었다.

 

개태사지로 올라선다. 좁은 길 끝자락 넓은 평지에 노출되어 있는 석축과 계단을 통해 이곳이 개태사가 있었던 곳임을 말해주고 있다. 흙을 제거하면서 개태사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왕건시대 만든 석축의 모습이 확인되었다. 52m, 높이 4.5m 규모에 중앙으로 폭 5.5m 계단을 만들어 하부층에서 상부로 올라가는 길을 열어 놓았다.

 

▲ 개태사지석조(충남문화재자료 제275호)

 

옛 개태사 사지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물을 담아놓던 도구인 석조는 화강암을 파서 만든 것으로 옛 개태사지 내 매몰된 상태로 있다. 개태사지석조(충남문화재자료 제275)는 개태사지 입구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현 위치가 처음부터 놓인 곳으로 확인되고 있다.

 

개태사지 석조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석조는 커다란 돌을 넓게 파서 물을 받아 사용하도록 만든 일종의 물통인데, 보통 의식의 준비나 의식 후에 사용된 그릇을 씻는 용도로 사용된다. 이곳에 있는 석조는 직사각형과 사각형의 2기가 있다. 직사각형의 석조는 통일신라시대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직사각형의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북쪽면에 2, 서쪽 면에 1개의 안상을 새겼다. 사각형의 석조는 더 이상의 마모 방지를 위하여 지하에 매몰된 상태로 보존하고 있다. 본래 있던 자리에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어 개태사지의 고증에 좋은 자료가 되며, 개태사의 철확(철솥)과 함께 개태사의 규모를 짐작케 하는 유물이다.”

 

▲ 석축 위 개태사지에는 주춧돌 역활을 하였던 석축이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 발굴로 모습을 드러낸 개태사지 석축

 

고려시대 최대의 호국수호사찰 개태사는 도선국사와 왕건에 의해 창건된 국찰로서 한때 명성을 떨쳤지만 시대의 흐름과 변화에 퇴락의 길로 들어서야만 했던 개태사도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부처의 불법으로 백성을 편하게 하려던 염원과 달리 허허벌판에 마을이 들어서고 절집을 지탱하던 석재는 토사에 묻혀 버렸다. 겨우 몇몇 유물만 확인되고 있는 개태사지에는 황산벌 싸움에서 죽어간 영혼들이 잡풀더미에서 신음하는 듯 보여진다.

 

고려시대 대국찰이였던 개태사지를 발굴 후 계속되는 보존이 되지 않아 잡풀이 다시 차지하고 있다. 절집 석축으로 보이는 큰 돌이 외딴섬처럼 자리 잡고 감나무가 봄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농작물을 금지한다는 안내판이 옛 사지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새롭게 발굴된 고려시대 당시 장대석 석축과 8동의 건물터를 서둘러 정비하여 잔디라도 식재하길 바란다.

 

 

▲개태사 우주각 외부 벽화

 

왕건이 천오산 자락 황산벌에서 신검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며 후삼국 통일의 대업이 완성되자 승전의 공을 부처에게 돌리며 발해국 사람들을 위해 사찰 개태사를 창건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 19(936) 연산에서 후백제를 멸하고 세운 상징적 의미를 가진 개태사에는 현재 삼성이 소유하고 호암미술관에 전시하고 있는 국보 213호 개태사 금동대탑을 비롯하여 현 개태사 전각 내 보물 제219호 삼존석불입상, 충청남도 민속자료 제1호 개태사 철확,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745층석탑. 용화사에 모시고 있는 유형문화재 제39호 비로자나석불 그리고 옛 사지에는 아직 이동을 하지 않은 채 옛 위치에 남아있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75호 석조와 부여박물관에 청동반자가 있다.

 

 

 

 

 

 즐거운 여행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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