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촉사 은진미륵 |
| 사찰여행 | 충청남도 논산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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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촉사를 방문하기에 앞서 입구에 주차를 한 후 약 300m 걸어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 앞에 도착하면 연세가 지긋하신 분이 매표소 창문을 열고 입장료를 끊고 들어가라 하신다. 매표 그리고 첫 발을 딛는 곳에서 사천왕상을 만나게 되며, 길은 약간의 경사를 이용하여 지그재그로 길을 석문 앞까지 안내하고 있다. |
관촉사는 중국 지안에 머물던 고승이 석조미륵보살입상을 참견한 후 흡사 촛불을 보는 듯 미륵이 빛난다하여 관촉사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과 중국 가주에도 큰 석불이 동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데 광명이 동시에 동과 서에서 서로 통한다하여 관촉사로 불린다는 설도 있다.
▲ 관촉사 입구 천왕문
관촉사의 기록이 남겨져 있는 조선 영조 19년(1743년)에 세워진 사적비에는 고려 광종( 태조 왕건 세 번째 부인의 아들)20년(966)에 혜명스님이 조정에서 명을 받아 21년(970)에 기공식을 하지만 절이 완성된 시기는 목종 9년(1006)으로 두 대의 임금을 거치면서 37년이란 장대한 세월이 소요된 사찰이다. 사찰에는 국내최대 석불인 높이 19m의 은진미륵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앞으로 수평을 유지한 채 석등과 배례석이 있다. |
▲ 매표소를 지나면 천왕문 그리고 석문으로 향하는 오르막 계단길이 이어진다. |
▲ 석문 전경
석문은 높이 175cm 높이로 약간 고개를 숙여 들어서야 한다. 석문을 통과하면 사찰로 들어서기 때문에 ‘해탈문’으로 불리며 석문이 된 사연이 전해지고 있다. 관촉사에 너무 많은 신도가 찾아오자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절 주변에 성을 쌓고 네 곳에 문을 만들었는데 그 중에 동문만 유일하게 전해지고 있다. 동문은 육중한 돌기둥이 장방형의 돌로 기둥을 세우고 뒷면에 장대석 5개를 가로로 올려 두었다. |
▲ 석문 전경과 석문에서 만난 고양이 |
관촉사 석문은 문화재자료 제79호이며,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석문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사찰로 들어가는 계단 맨 위쪽에 세워진 석문으로, 사찰에 들어가기 위한 문이라는 뜻의 해탈문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문 입구의 양쪽 돌기둥은 너비 48m인 직사각형의 돌을 양쪽 기둥으로 세웠고, 윗면 천장에는 길게 다듬은 돌 5개를 가로로 걸쳐 얹어 4각형의 천정을 이루어 마치 터널의 모습과 비슷하다. 천장석을 제외하고는 모두 석재를 다듬어 벽돌 쌓은 형식으로 쌓았으며, 입구의 양옆으로도 벽을 연결하여 경내를 보호하는 석벽의 모양을 내었다. 이 석문은 사찰의 중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다른 사찰에서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문이다. 제작 축조 연대에 관한 기록은 없으나 고려시대에 조성한 사찰내의 석조미륵보살입상과는 관련이 없는 후대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
▲ 석문을 통과하여 만나는 대광명전 주변 전경
관촉사로 오르는 길은 석문과 반야로 아래로 올라서면 정면으로 대광명전이 있으며, 석문 옆으로 범종각과 종무소가 위치해 있다. 사찰에는 중심에 미륵전이 있으며, 주변을 따라 명부전과 삼성각, 대광명전, 주사실, 반야로, 범종각, 종무소, 요사, 공양간 그리고 석조미륵보살입상과 앞으로 석등과 석탑이 일렬로 서 있다. |
▲ 윤장대, 삼성각, 삼성각에서 내려다 본 전경 |
▲ 미륵전 앞으로 연화대, 석탑과 석등 은진미륵 순으로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
전각에서 가장 독특한 건물로 미륵전이다. 미륵전은 부처를 모신 절집이 아니다. 창 너머 탑과 석등 그리고 석조미륵보살입상을 일렬로 보이는 위치를 따라 만들다 보니 다른 건물에 비하여 약간 틀어져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
▲ 배례석에 동전을 던져 올려 놓았다.,
관촉사배례석(충남 시도유형문화재 제53호)
배례석은 관촉사에서 가장 잘 만들어진 조각품으로 충남 시도유형문화재 제53호이다.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장방형의 화강암을 사용하여 구성된 일종의 탁자로 부처님에게 합장 배례하는 곳이다.
돌 윗면에는 3개의 연꽃과 2개의 연줄기가 양각되어 있고 전 후면에는 3개, 좌우면 에 2개의 안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그 수법이 정교하다. 문양을 잘 살펴보면 고사리무늬처럼 생긴 버섯구름 모양을 양각해 두었다. 한때 이곳을 통해서 부처님께 공양을 드렸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은진미륵 앞에 예불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두었다. |
관촉사 배례석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부처님께 예를 올리던 곳에 놓은 직사각형의 받침돌로 바닥에서 2단의 직각 괴임을 새기고, 그 사방의 면석에는 안상을 새겼다. 윗면에는 가운데 커다란 연꽃을 중심으로 커다란 둥근 자리가 있고, 그 안에는 가운데 1개와 그 주위에 8개의 자방이 연주문처럼 돌려져 있는데 음각으로 새겼다. 연꽃의 잎 끝이 뾰족하며 그 사이에 다시 중판의 연꽃잎을 뾰족하게 돋을새김 하였다. 제작연대에 대한 이설이 많으나 제작기법으로 보아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
▲ 베례석과 나란히 위치하고 있는 오층석탑 |
배례석 앞으로 관촉사 석탑이 자리 잡고 있다.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석탑은 상층 기단의 상대갑석만 지면에 노출되고, 지대석과 하대석은 묻혀 있는 상태로 오층석탑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대부분 사층석탑으로 부르며 훼손이 심하여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석탑 대부분이 훼손되어 정확한 층수조차 식별이 어렵다. |
▲ 다양한 방향에서 바라 본 관촉사 석등 |
탑과 은진미륵 사이에 석등이 위치하고 있다. 석등은 보물 제232호로 관촉사 미륵보살상 앞에 있다. 광종18년(967) 경으로 추정되는 전형적인 고려석탑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네모꼴의 상하 대석에는 연화문이 조각되어져 있으며, 고려석등 중에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보물 제232호 관촉사 석등 |
석등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석등이란 어두운 중생의 마음을 부처님께 깨달은 진리로 비추어 불성을 밝혀주는 등인데, 처음에는 실용적 성격이 강했으나 후대에는 불전이나 탑 앞에 설치하는 장식적인 건조물로 변했다. 정가각형의 하대석 옆면에는 인상을 3개씩 새겼다. 기둥돌은 둥근 형태의 상. 중. 하 3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화사석은 상하 2층으로 되어 있는데, 네 기둥이 빈약한 반면 화창이 매우 넓다. 1.2층 지붕돌의 네 귀에 귀꽃이 큼직하게 서 있어 경쾌한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원과 4각. 8각이 혼합되어 구성되었으며, 안정감이 약간 부족하나 전체적으로 크고 장중한 감을 주고 있다. 또한 화사석의 기둥이 기울어 불안한 느낌을 주지만 형태의 장대함과 수법의 웅장함이 고려시대 제일가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서적비에 의하면 불상이 968년(고려 광종 19)에 조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고려시대 석등의 대표작이다. ” |
▲ 은진미륵과 그 앞으로 석등이 위치하고 있다.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
석등 앞으로 은진미륵이 자비로운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으로 불리는 은진미륵은 보물 제218호이다. 불상의 높이가 18.12m, 귀 길이 2.7m, 눈썹사이 1.8m 로 화강암 암반위에 각각 분리하여 만든 후 올렸는데 허리 아랫부분은 자연석 바위에서 만들고, 상체, 머리 부분을 연결하였다. 은진미륵은 눈이 가무스레한 눈을 겨우 뜨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상당부분 마모가 심해 시멘트로 수리한 흔적이 여럿 나타나 있다. 은진미륵을 살펴보면 조립한 흔적을 찾을 수 없도록 정교한 솜씨로 처리하여 사람들은 마치 하나의 작품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 바위 표면에 법의를 새기고 그 주름을 통해 바위의 차가움을 포근하게 감싸고, 머리에는 원통형 관을 올려두었다. 갓에는 네모난 보개가 네 귀에 이색적으로 풍령이 달려 있는 2층의 면류관을 쓰고 있다. 은진미륵은 관음보살이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관음보살로 짐작케 한다. |
고려 때 북쪽 오랑캐들이 자주 침략하였는데 한번은 압록강에 집결한 오랑캐들이 배가 없어 강을 건너지 못해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이 때 선님 한사람이 삿갓을 끈 채 마치 얕은 냇물을 건너듯 다리만 걷어 올리고 건너 오더라는거야. 그러자 오랑캐 두목이 "보아라 저기 중이 건너오는 곳은 얕은 모양이니 그곳으로 강을 건너자며" 며 진군 명령을 내린 거야.. 멋모르고 강으로 뛰어든 오랑캐는 수심이 깊어 모두 물속에 빠져 죽게 되자 화가 난 적장이 중을 찾아 잡아오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중을 잡아 대령하자 적장이 칼을 뽑아 내리치니 중은 간곳없이 사라지고 중이 사용한 삿갓 한쪽만 떨어져있더란 거야. 그때 은진미륵은 온몸에 땀을 흘리며 미륵이 쓰고 있던 갓 한쪽이 떨어 졌다고 하며. 은진미륵이 중으로 화산하여 압록강에 나타나 국난을 막았다 하여 은진미륵이 호국불로도 유명하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도 자세하게 올려다보면 귀 부분이나 팔뚝 부분에 이어 붙인 자국이 있다. |
불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전설이 전해진다. 애초 불상은 바위에서 솟아오른 허리부분을 만들고 가슴과 머리 부분을 이웃한 지역에서 옮겨왔지만 올릴 방법을 못 찾아 근심하고 하고 있는데 어느 날 냇가에서 아이들이 부처를 모신다며 밑 부분을 세운 뒤 모래를 쌓고 그 위에 올리는 모습을 보고서 부처를 완성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또 일제 때 일본인 세 사람이 불공을 드리려 찾아와 부처의 큰 갓에 있는 금동불화를 훔쳐가면서 이마에 있는 광명주를 깨뜨려 버린 후 은진미륵은 빛을 잃어 버렸다고 한다. |
이적에 관한 기록도 있는데 은진미륵이 땀을 흘리는 이적 현상을 보인 때는 경술국치와 6.25 동란 때로 온몸에 수십 말이나 되는 땀을 흘렸다고 전하며 그때마다 쇠꽃의 빛깔도 탁하게 변했다고 한다. |
▲ 신비의 돌 ?
삼성각으로 올라가 본다. 은진미륵을 마주하기 좋은 위치에 자리한 삼성각 문 앞에 돌이 하나 놓여 있으며, 그 앞에 돌의 이야기를 적어 놓았다. 본래 관촉사 경내 있는 돌을 누군가 훔쳐갔고 꿈속에서 미륵불이 나타나 돌을 제자리에 갖다 놓지 않으면 화를 입게 될 것이라 하여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한다. |
▲ 석문 계단, 범종각, 석등 연꽃잎 문양 |
▲ 주차장에서 바라 본 관촉사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인 관촉사는 반야산에서 산나물을 캐던 한 여인이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 소리를 따라 가보니 아이는 간곳없고 땅에서 큰 바위가 솟아나고 있었는데 소문은 왕에게 까지 들어가 왕이 혜명에게 사찰을 세우도록 명하니 광종 19년(968) 혜명에 의하여 반야산 기슭에 창건한 후 우왕 12년(1386), 선조 14년(1581), 현종 15년(1674) 각각 중수를 하였다.
불교유적으로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 관촉사석등(보물 제232호), 관촉사배례석(충남 시도유형문화재 제53호), 관촉사석문(충남 문화재자료 제79호)등이 있다. |
즐거운여행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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