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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기림사 | 여행일자 : 2016년 00월 0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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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흘산 자락에 한때는 불국사를 거느린 대사찰이 있었다. 오랜 세월을 통해 지금은 오히려 불국사의 말사로 전락해 버린 안타까운 사찰이 있으니 천축국 승려 광유가 창건한 임정사로 훗날 원효가 확장하면서 오늘날의 기림사이다. 찬란했던 한때의 명승을 말해주는 경상도영주제명기/慶尙道營主題名記, 동도역세제자기/東都歷世諸子記 부호장선생안/府戶長先生案 의 중요 문적과 근세조선의 역대 왕의 어필이 보관되어 있다. ▲ 진남루에서 바라 본 대적광전
기림사로 들어선다. 한때 불국사를 거느린 대찰의 모습은 과연 어떠할까하는 궁금증이 가슴을 두근꺼리게 한다. 매표소를 통과하여 주차를 한 후 일주문을 지나 숲길을 잠시 스쳐 오르면 본격적으로 불심이 머문 그 공간을 여는 천왕문이 기다리고 있다. ▲ 함월산 기림사 일주문 전경 천왕문에는 擁護聖衆滿虛空(옹호성중만허공) 都在豪光一道中(도재호광일도중) 信受佛語當擁護(신수불어당옹호) 奉行經典永流通(봉행경전영유통) 즉, 옹호성중이 허공에 꽉 찼음이여, 모두가 백호광의 일도 가운데 있음이로다. 부처님 말씀을 믿고 받들어 항상 옹호해서 경전을 봉행하고 길이 유통시킴이로다. 라는 주련을 내 걸어 놓고 있다. 이 주련은 이곳 뿐만 아니라 구례 화엄사, 속리산 법주사 등에서 내걸려 있다. ▲ 천왕문 전경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만난다. 수미산(須彌山) 중턱에 살며 불법을 수호한다는 4명의 수호신으로 흔히 동서남북 사방을 지키는 이들 네분을 사대천왕(四大天王)이라 한다. 동방에는 지국천왕(持國天王), 서방에는 광목천왕(廣目天王), 남방에는 증장천왕(增長天王), 북방에는 다문천왕(多聞天王)으로 대부분 두분씩 양쪽으로 마주보고 모시고 있다. 동방천왕은 국토를 수호하고 중생을 편안하게 해주며, 칼을 들거나 보주를 들고 있다. 서방천왕은 깨끗한 눈으로 중생을 살펴 이익되게 해주는 신이며, 새끼줄과 삼치극을 가지고 있다. 남방천왕은 귀신을 지배하며 중생의 이익을 중진하는 신으로 왼손은 주먹을 쥐어 허리에 두고 오른손은 칼을 들고 있다. 북방천왕은 부처님의 도량을 수로하며 설법을 듣는 신으로 오른손에 창 막대기 보서를 가지고 있거나 보탑을 들고 있다. ▲ 전설의 오정수 중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일주문을 넘어서면 옛 오정수 중 하나로 알려진 우물을 만난다. 물에 빗물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지붕을 올려 두었는데 사라지고 말끔하게 주변을 정비해 놓았다. 오정수를 두고 장군수는 나한전 삼층석탑 아래에 묻혀 있는데 이 물을 마시면 장군이 난다하여 혹시 반역자가 나올까봐 우물위에 석탑을 세웠다고 하는데 지금도 밤탑 밑에 귀를 기울이면 물방을 소리가 들린다. 전하며, 감로수는 북암에 자리 잡고 있는데 물빛은 우유빛이지만 일단 뜨면 무색이라고 한다. 오탁수는 물맛이 좋아 까마귀가 쪼아 먹었다 전하는데 지금은 두 군데만 물을 먹을 수 있다. 장군수에 관한 이야기로 조선시대 이곳에서 역적모의를 하다 발각된 적이 있다고 한다. 일본이 혹시 장군이 날까봐 삼층석탑으로 막아 버렸다고 그러는 설도 있다. 기림사 진남루로 들어선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1호 진남루 진남루를 만난다. 외부에서 바라보면 진남루와 요사채가 담장 하나를 두고 나란이 있는 모습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옛 기림사의 영역으로 응진전과 그 앞에 삼층석탑 그리고 진남루 정면에 대적광전 및 그 옆으로 약사전과 약사전 앞 화단이 있는 곳이 옛 목탑지이며, 대적광전 뒤편으로 응향각이 자리잡고 있다. ▲ 천왕문에서 바라 본 진남루 전경
진남루는 남방에서 진압한다는 뜻으로 일본을 두고 한 말인데 당시 임진왜란을 통해서 기림사는 전략적 요충지로 의병과 승병 활동 진원지 역할을 담당하게 되면서 승군 지휘소로 사용하였던 곳이며, 주련으로 다음과 같다. ‘遠觀山有色 近聽水無聲 (원관산유색 근청수무성) 春去花猶在 人來鳥不驚(춘거화유재 인래조불경) 頭頭皆顯露 物物體元平 (두두개현로 물물체원평) 如何言不會 只爲太分明 (여하언불회 지위태분명)’ 즉, ‘멀리서 보니 산이 모습이 있는 듯 함이요, 가까이서 들으니 물은 소리가 없음이로다. 봄은 갔는데 꽃은 오히려 머물러 있고 사람이 와도 새는 놀라지 않네 모습 모습이 다 참된 모습을 드러냄이여’이다. 기림사 진남루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1호이며,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건물의 기능이나 용도 및 건립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진남루란 명칭은 사적기에 의하면 무량수전야차유진남루라 하여 위치에 대한 언급만 있을 뿐이다. 임란 때 기림사가 수군과 승병활동의 근거지로 활용되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정면 7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보면 사람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일반적으로 누(樓)라고 하면 중층건물이나 다락집의 형상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일반적인 형태를 벗어나 있다. 전통칸으로 우물마루를 깔았고 판벽에 창호를 설치하였으나 현재 사용용도가 바뀌게 되면서 창호가 개체되어 원형을 알 수 없다. 정면이 긴 건물에서 목조구조의 허약성을 보완하는 구조 수법이 돋보이는 건축이다.” 옛 중심법당이 있는 대적광전 공간 기림사 연혁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함월산 기림사 천축국(인도)에서 온 광유성인이 창건하여 임정사라고 불렀다. 그 후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원효대사가 사찰을 크게 확장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이 때에 이미 대적광전을 건립하여 삼신여래를 봉안하였으며, 동쪽에는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서쪽에는 석조오백나한상을 모신 응진전을, 동쪽에는 삼층목탑과 정광여래사리각을, 남쪽에는 무량수전과 진남루를 건립하였다. 그러나 사리각은 없어지고, 삼층목탑은 초석만 남아 있다. ▲ 진남루 측면 출입구로 들어서면 옛 절간으로 진입한다. 정면으로 대적광전과 오른쪽에 약사전이 나란히 있으며, 진남루 앞 삼층석탑 옆에 응진전이 있다. 대적광전(보물 제833호)은 조선 후기 맞배지붕 건물이며, 유물전시관에 있는 건칠보살상(보물 제415호)은 반가부좌 형태를 취한 보기드문 보살상이다. 또한 응진전 앞의 삼층석탑은 신라 말기의 석탑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역시 대적광전에서 불사리와 함께 발견된 고려시대의 금은자사경(보물 제959호)들은 기림사의 오랜 역사와 사격을 나타내는 성보이다. ▲ 대적광전에서 바라 본 진남루 주련으로는 ‘世尊座道場(세존좌도량) 淸淨大光明(청정대광명) 比如千日出(비여천일출) 照耀大千界(조요대천계) 諸法從本來(제법종본래) 常自寂滅相( 상자적멸상)’ 즉, ‘세존께서 도량에 앉으시니 청정한 대광명이 비춤이로다. 비유컨대 천개의 태양이 솟아서 삼천대천세계를 비춤과 같음이로다. 모든 법은 본래로부터 항상 스스로 적멸한 모습이로다.‘ ▲ 삼층석탑과 대적광전 대적광전은 선덕여왕때 만든 이후 무려 8차례나 다시 지었는데, 1997년 해체공사를 할 당시 종도리에서 4종 묵서가 발견, 1755년 개조중수, 1765년 6차 중창, 1978년 7차 중수 가 기록되어져 있으며, 본존불로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왼쪽은 노사나불, 오른쪽은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는 전형적인 삼신불허 흙으로 만든 불상이란 점이 독특하다.
또한 불상의 모습이 거의 같아 보이지만 손의 위치가 각기 다르며, 비로자나불의 무릎 위 옷주름이 한 겹 더 접혀 있다. 기림사소조비로자나삼존불(보물 제958호)은 중앙에 비로자나불을 위시하여 좌우 노사나불, 석가불 모신 형태로 향나무 틀을 이용하여 그 위에 진흙을 발라 만든 삼신불로 대적광전에 모신 16세기 초 불상이다. 기림사 대적광전은 보물 제633호이며,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대적광전은 비혜의 빛으로 세상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셔놓은 법당을 가리킨다. 이 건물은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처음 세워진 것으로 전한다. 그 후 조선 인조 7년(1629)과 정조 17년(1793) 등 여러 차례에 걸쳐 고쳐 지었다. 철종 13년(1862)에는 큰불이 일어났으나 대적광전만은 화를 면하였고, 1878년과 1905년에도 보수하였다. 건물은 정면이 5칸, 측면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인(人)자 모양을 한 단층 맞배지붕으로 다포식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겉모습은 절의 중심에 있는 법당답게 크고 웅장하며, 비교적 넓은 공간인 안쪽은 정숙하고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건물은 산사의 건물들이 주 칸은 좁고 기둥은 높은 성향을 지닌 것과는 구별된다. 견실한 구조와 장엄한 공간 구성이 돋보이며, 옛 모습을 보존한 조선 후기의 대표적 불당 가운데 하나이다.” 기림사 대적광전 육각형 형태의 솟을매화꽃살문을 보라보고 있노라면 세상 모든 시름을 잠시 내려놓고 화원에 머무는 듯 하다. 비록 내소사 대웅보전 꽃살의 화려함과 정교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투박하지 않고 목조건축물과 어우러지는 그 속에 진리를 담아내는데 부족함이 없다. 유형문화재 제214호 웅진전 기림사 응진전은 유형문화재 제214호이며,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곳은 아라한을 모신 건물로,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하여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신라 선덕여왕 때에 지어진 것으로 전하지만, 조선 후기에 다시 중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 기림사 응진전 모셔진 나한 정면은 기둥 6개의 5칸이고 측면은 2칸으로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막돌 장대석을 한단 쌓은 낮은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앞.뒷면에는 둥근 기둥을 하고 옆면에는 네모기둥을 세웠다.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은 단정한 형태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18세기 조선 후기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으나 부분적으로 조선중기의 특징을 포함하고 있다. 대체로 수평적 느낌이 강한 단아한 건물이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2호 약사전 기림사 약사전은 경북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2호이며,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건물은 1600년대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기림사 약사전이다. 사적기에 대적광전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술되어 있으며, 중건기에는 조선 효종 5년(1654)에 중창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숙종 4년(1678) 약사법당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전하므로 약사전은 1600년대 이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약사전 얕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건립되었으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으로 꾸몄다. 일반적으로 측면에 출입문을 설치하는 것이 통례지만, 여기서는 배면에 문을 둔 것이 이색적이다. 전체적으로 겉모습이 부드러우면서 균형이 잘 잡혀있는 건축물이다.” 새로운 공간 '삼천불전' ▲ 삼천불전 삼천불전은 1817년(순조17)에 초의선사가 옥돌로 천불을 만들어 모셨다가 1818(순조18)에 대흥사로 이운을 해 옮겨 간 후 1990년 새롭게 건물을 단장하고 만든 곳이다. ▲ 옮겨간 해남 대흥사 삼천불 천불은 경주 불석산의 옥돌로 조성한 것으로 1817년 배로 싣고 오던 도중 부산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일본 큐슈로 표류해 갔다가 다음 해인 1818년에야 대흥사로 돌아와 봉안된 것이다. 그래서 천불 가운데는 어깨에 ’日‘자가 적힌 불상이 있다. 불교문화재로 기림사건칠보살좌상(보물 제415호), 기림사대적광전(보물 제833호), 기림사소조비로자나삼존불(보물 제958호), 기림사비로자나불복장전적(보물 제959호), 기림사삼층석탑(시도유형문화재 제205호), 기림사응진전(시도유형문화재 제214호), 기림사진남루(문화재자료 제251호), 기림사약사전(문화재자료 제252호), 경주기림사소장유물(문화재자료 제301호) 등이 있다. ▲ 건칠보살 기림사건칠보살좌상(보물 제415호)은 현재 기림사 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기림사에 있는 조선시대 건칠보살좌상으로 조선시대 나무불상 특징을 잘 표현하고 대좌에 홍치(弘治) 14년(연산군 7년, 1501)에 제작되었다는 기록을 통해 관세음보살상 건칠불의 조성시기를 알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건칠불은 국내에서 몇 안 되는 불상으로 나무로 골격을 만든 뒤 삼베를 감고 그 위에 진흙을 바른 후 속을 빼낸 불상이다. 기림사비로자나불복장전적(보물 제959호)
상지은니대반야경, 상지은니방광반야바라밀경, 상지은니불설대방광십륜경, 자지은니등집중덕삼매경, 백지금니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 상지은니대방광불화엄경,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감지금니묘법연화경, 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의제보살만행수릉엄경, 대방광불화엄경소, 대방광불화엄경, 묘법연화경, 묘법연화경삼매참법, 불설부모은중경, 불설대보부모은중경, 금광명경, 불설불모출생삼법장반야바라밀다경, 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 불설예수시왕생칠경, 정본일절여래대불정백산개총지, 법원주림, 대방광원각략소주경, 법화삼매참조선강의, 선문염송집, 백지묵서지장보살본원경, 불설대보부모은중경, 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목우자수심결, 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 선문삼가염송집, 관세음보살례문, 대장일람집, 선종유심결 등 54권71책으로 불교 기록유산이다.
사찰에는 기림사의 본전인 대적광전을 필두로 삼천불전, 관음전, 명부전, 약사전, 웅진전, 삼성각, 진남루, 매월당 사당이 자리하고 특히 대적광전의 창살문양은 변산반도에 있는 내소사의 창살과 나란히 어깨를 견줄 만하다. 기림사 여행에서 빠뜨릴 수 없는 또 한 곳 매월당 영당 입구에 매월당 김시습의 사당이 있다. 매월당이 남산에 작은 산실을 짓고 머물면서 금오신화를 만들었는데 그 자리에다 사당을 만들고 훼손이 심해지자 경주유림이 기림사 주지에게 부탁하여 기림사에 초상을 봉안하고 사당에 딸려있던 논과 밭을 넘겨주었다 한다. 1996년 사당이 훼손상태가 심하자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무량사 김시습 사당에 있는 자화상을 모사하여 다시 봉안해 두었다. ▲ 매월당 영당 매월당 영당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이 영당은 생육신의 한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선생(1435~1493)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본래의 영당은 현종11년(1670) 경주부사 민주면이 선생의 뜻을 추모하기 위해 선생이 은거하였던 용장사 경내에 오산사를 지었으나 고종 5년에 훼철되었다. 고종 15년(1878) 이를 애석하게 여긴 경주 유림이 경주부운 민창식에게 청원하여 함월산 기림사 경내에 다시 지었으나 그 후 퇴락되어 1998년 경주시에서 현재의 위치에 중건하였으며, 매년 음력 2월 중정에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선생은 세종 17년(1435) 서울에서 태어나 신동으로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단종 3년(1455)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세상사에 뜻을 버리고 불교에 귀의하여 전국을 유랑하다가 세조 10년(1465) 경주 금오산 용장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저술하였다. 그 후 성종 2년(1471) 경주를 떠나 일시적으로 환속하였으나 성종 24년(1493) 충청도 홍산의 무량사에서 일생을 마쳤다. 선생의 시호는 청간이다.” 용연폭포로 향하는 길목 기림사 일주문에서 다시 호암천 계곡을 따라 진입하면 함흘산 용연폭포로 향하는 한적한 산길이 이어지며,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용연폭포까지 다녀오면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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