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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트레킹 - 시인이자 교사이자 승려였던 월하 김달진

허영꺼멍 2016. 9. 9.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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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스승이자, 승려였던


월하(月下) 김달진(金達鎭)


| 여행일자 : 2016년 00월 00일

 



월하(月下) ‘김달진(金達鎭)’ 그는 시인이자 승려였으며, 한학자이자 교사였다. 그리고 김달진 유년시절을 지낸 고향인 진해시 웅동 소사리 마을에 생가복원 및 담장 너머 김달진 이름을 내건 김달진 문학관을 조성하였다.


▲ 김달진 흉상

▲ 김달진 생가

소사마을 김달진 마을 이야기

주차장: 경남 창원시 진해구 소사동 45-1

★★★☆☆


김달진 시인을 찾아 부산 강서구를 통과하여 진해구로 향하는 2번 국도에서 진해 응동으로 빠져 소사동으로 향한다. 소사동에는 김달진 생가와 삽짝문 건너 김달진 문학관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인근 골목에는 박배덕 갤러리마당, 김씨박물관과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꽁뜨CONTE 그리고 스토리텔링박물관이자 소사주막을 따라 여행을 할 수 있다.


숲 속의 샘물을 들여다본다

물 속에 하늘이 있고 흰구름이 떠가고 바람이 지나가고

조그마한 샘물은 바다같이 넓어진다

나는 조그마한 샘물을 들여다보며

동그란 지구의 섬 우에 앉았다.

-김달진 샘물




박배덕 갤러리마당

 박배덕씨의 개인 공간이다. 1980~2015년까지 30회 개인전을 열었다.


서양화가 박배덕 갤러리마당(경남 창원시 진해구 소사동 46-1) 건너편 주차를 한 후 잠시 경남 지역 중진작가로 알려진 박배덕 갤러리마당을 살펴보기로 했다. 담장에는 다양한 동물 캐릭터가 올려져 있는데 강아지와 엉뚱하게 아기 코끼리가 있으며, 외벽 담장에도 의미를 둔 듯 돌이 여러 색으로 채색되어 있고 그 앞에 뿌리째 고사한 나무를 하얀색으로 곱게 채색하여 장승처럼 기대 놓았다.


▲ 박배덕 갤러리마당 야외 전시물


문 안으로 들어서니 복잡하다. 좁은 공간을 발 디딜 틈 없이 의미심장한 작품들이 진열이라기보다 각자 공간을 서로 다툼이나 하듯 어떤 체계적 배치보다 늘어놓았다 할 만큼 산만했다. 입장료는 알아서 내도록 돈 통을 입구에 놓아두었을 뿐 누가 관리를 하지 않는다. 야외 공간뿐 아니라 박배덕 화가의 작품을 직접 감상하고 구매를 할 수 있도록 가격까지 적혀 있다.



박배덕 화가는 개인전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매일 열어 놓고 있다. 화실 앞마당 건너 공간에 엉성하게 지은 듯 보이는 건물 안에 전시를 하며, 전시공간을 박배덕 갤러리가 아니라 마당을 붙여서 박배덕 갤러리 마당, 누구든 쑥 들어와서 눈길이라도 한번 쓰윽 스치고라도 갈 수 있는 편안한 공간이라는 뜻으로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다.




김달진 생가에서 잠깐 머물다


경남 창원시 진해구 소사동 48 )로 들어선다. 처음부터 하나의 울타리를 두른 공간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마을 골목길로 향하는 사립문이 두 곳에 있었다. 집 구조도 뒷간과 정침을 잇는 모습이 마름모꼴로 시선을 끈다.



▲ 생가 정침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면 작은집과 뒷간이 담장 쪽으로 자리 잡고 작은집과 마주한 방향에 아래채가 자리 잡고 있다. 작은집이 별채로 되어 있는 모습이며, 정침 건물 옆으로 우물을 두고 측면에 뒷간과 정면에 도장을 두고 있는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 감나무를 집 앞 정원수 처럼 심어 놓았다.

생가에는 유독 감나무가 많이 보인다. 봄에 노랗게 꽃 피웠다 여름에 여문 감이 탱자만 하게 자라면 여름태풍 끝자락이자 가을 초입에 툭 툭 떨어진다. 김달진 시인의 어린 시절도 떨어진 감을 장독대 위 올려놓고 익혀 먹거나 풋풋한 감을 소금물로 채워진 단지에 넣고 삭혀 먹었을 것이다. 장독대 뒤편에는 대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김달진 문학관


문학관으로 들어서면 왼편으로 김달진 흉상이 자리 잡고 있으며, 오른쪽이 화장실이다. 정면으로 올라서면 김달진문학관으로 들어선다. 김달진 문학관이라하여 넓은 공간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작은 공간에 김달진 작가의 생애가 다 담겨져 있다.


▲ 김달진 문학관 입구 흉상

김달진 시인은 1907년 진해 소사동에서 태어나 계광보통학교 졸업(1920) 후 서울에서 중웅고보를 다니던 중 신병으로 인하여 학업을 중단하였다가 경신중학교를 다니던 4학년 당시 일본인 영어교사 추방 활동으로 퇴학을 당하였다. 이후 고향으로 내려와 모교에서 교편생활(1926-1933)을 하였으며, 1929년 문단에 나선 후 1934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득도 및 동아일보에 유점사 찾는 길에발표를 하였다. 이후 나의 뜰(동아일보 1935)’ 발표와 함께 함양 백운산 화과원(華果院)에서 시주를 하지 않고 농사지어 생활하며 참선하는 반농반선(半農半禪)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김달진 시인은 샘물(동아일보 1938)을 비롯 여러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1939년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졸업 및 유점사에서 법무를 지내며 시집 청시를 출판하였다.

 


김달진 시인은 1941년 유점사 법무를 지내다 일본 경찰을 피해 북간도 용정으로 향했고, 1945년 해방 소식에 서울로 돌아와 춘원 선생의 권유로 동아일보 기자로, 1946년 청년문학가협회 부회장(1946)으로, 그리다 서울을 떠나 대구에서 경북여자중학교 선생으로 교편생활을 시작하여 1948년 진해중학교로 옮겨온 후 1951년 자유민보 논설위원을 거쳐 창원 남면중학교(. 창원남중학교) 2대 교장으로 취임한 후 1960년 정년퇴임을 하였다.

 

문학의 열정과 종교의 갈망은 꺾이지 않았다. 교장 정년퇴임 후 동양 불교문화연구원장(1960)이 되면서 많은 불교설화집과 고려대장경 역경 사업에 몰두하였으며, 198967일 오전 111082세 나이로 서울 자택에서 숙환으로 작고하기 전까지 많은 불교 관련 책을 출판하였다.

 

김달진의 주요 시집으로 청시(1940), 올빼미의 노래(1983) 외 불교 관련 장편 서사 시집 큰 연꽃 한 송이 피기까지(1984) 등 김달진 전집은 총 1922권이 알려져 있다. 이후 19911020일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으며, 제자들이 김달진 시비 건립 및 1996년 경남시사랑문화인협의회를 중심으로 김달진문학제전위원회를 결성하여 김달진문학제를 개최하여 오늘에 이른다.


▲ 전시되어 있는 유품


월하 김달진 선생의 유품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한 벌 옷에 바리때 하나이면 족할 김달진 선생의 삶이었다. 소설가 김동리 선생은 월하를 두고 늘 따스하고 포근한 마음씨를 지닌 사람이라고 평했으며, 평론가 박철희 선생은 평생을 남에게 싫은 소리나 화 한번 내지 않았으며, “남을 위해 살았지 유독 가족들은 보살피지 않았다고 한다.

 

외길 순수성과 결백에 가까운 문학관은 당신의 삶이 나아가고자 했던 청빈함과 수도자적인 초월의식과 맞닿아 있었다. 평생을 한 결같이 새벽이면 일찍 깨어 책상 앞에 단아하게 앉아 글을 읽는다. 끼니를 두 끼로 줄여 드시며, 술은 즐기시되 안주는 날김 몇 조각일 뿐이었다. 원고를 쓰실 때면 토시를 하고, 겨울에는 늘 큰 털덧버선을 신고 계셨다.

 

만년에 월하를 만난 시인 조정권 선생은 일 년 내내 누가 찾아오는 일도 없으므로 나를 ᄍᆞᆨ 삼아 지내는 적적한 생활이 신통할 것도 없다는 그 겸허함, 그리고 날마다 하는 일이 별 것이 없다는 그 소탈함속에 월하 선생의 삶에 깃든 무심함과 범연함의 경지가 평생에 걸쳐 한결같았음을 말하고 있다.


▲ 생가 텃밭

200511월에 세워진 월하 김달진 문학관을 살펴본다. 대지 223148평 단층 건물이며, 배흘림기둥에는 조오현 스님이 썼다는 月下 金達鎭 像그리고 그 위에 강직한 모습의 흉상이 올려져 있다. 월하는 윤허스님이 지어준 것이다. 김달진의 생을 살펴보면 고향 항리에 있던 항일 민족 기독교 학교인 계광보통학교를 13(1920)에 졸업하였다. 기독교의 길을 갈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어느 날 찢어진 벽사 사이 초벌로 바른 신문지에서 자를 보고는 가족을 등지고 고향을 떠나 불교와 인연을 맺는다.




소사마을 여행길이 생각보다 짧다.


꽁트 커피점 앞에 김씨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으며, 바닥에는 붉은 화살표가 외부인을 유도한다. 도로 끝에서 만나는 공간이 스토리텔링 박물관(소사주막)이며, 낡고 오래된 그리고 빈집과 논이 주변에 시골 분위기를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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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잔 2,000원이다. 커피집 창 너머 김덕진 생가 텃밭과 건물이 조망된다. 커피 한잔을 한 후 옥상에 올라가 보니 야외전시장이라며 약간의 전시물이 있지만 관리를 하지 않아 방치되어 있다시피 하였다.


김씨박물관


김씨박물관으로 내려선다. 특별하게 박물관이라 하여 입장료가 있거나 감시를 하는 그런 공간이 아니었다. 적어도 50대 이상 세월을 산분들이라면 바라만 봐도 어린 시절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친숙한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라기보다 좁은 공간에 쌓여 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 소사마을 골목길에서 만나는 김씨박물관


근대마을 소사리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소사는 근대기에 만들어진 마을로 조선말 웅천군의 동면에 속한 지역으로 군항 진해가 시작되는 장소이다. 1905년 일본이 조선에서 통감정치를 실시하면서 이듬해 웅천군 서면, 중면 일대에 진해 군항 선설을 본격화하면서 군항과 도시에 용수를 보급할 수원지를 택한 곳이 소사천이 시작되는 구천계곡 하류지역이었다. 1908년 소사수원지(웅동수원지)공사가 시작 될 시기의 이 지역에는 심동마을, 뒤골, 용잠, 댐뱅이, 들마을, 더머이, 안몰의 일곱 마을에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을 강제 이주 시킨 곳이 지금의 소사동이다.

 

▲ 김씨박물관 장난감 코너

▲ 커피숖 유리창 너머 생가 조망

▲ 커피점 옥상 야외전시장에서 내려다 본 김씨박물관

▲ 소사주막 앞 시골풍경

▲ 소사마을 들녘

김씨박물관을 지나 스토리텔링 박물관(소사주막)으로 향했다. 나름 기대를 하면서 주막집을 향했는데 가보니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되돌아 나와 다시 골목을 빠져 나올 무렵 걸어갔던 길에서 만난 옛 풍경들이 어쩌다 세월이 흘러 부산라듸오 현판도 먼지가 뽀얗게 덥혀져 있다. 스토리가 있는 골목길에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부족함이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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