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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여행시즌을 놓치고 산다. 바쁜 일도 없는 와중에 매년 초청받지 않아도 찾아가던 작약꽃 시즌을 이런저런 이유로 놓쳐 버렸고 그렇게 올해는 넘어가려하였지만 뭔가 그 찝찝함이란 등짝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작약 꽃 시즌은 매년 5월 20일 정도면 피어나 하트 정원을 연출하는 경북 의성 조문국사적지를 5월 말 찾아가 본다. ▲ 엄마를 찍어주는 듯, 꼬마숙녀의 꽃밭 나들이
양귀비꽃도 시들해 버릴 만큼 하늘에는 구름이 뭉실뭉실 떠 있었다. 올해는 가뭄이 예상된다는 말을 실감할 정도로 길 주변 크고 작은 저수지에는 물이 거의 바닥권이었고 농심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도착한 조문국사적지에는 서둘러 핀 작약 꽃은 이미 자연으로 돌아가 버렸고 늦게 핀 게으른 작약 꽃이 미련을 못 버리고 찾아 온 탐방객을 위로해 주고 있었다. ▲ 가야 당시 대부분 높은 곳에 고분을 조성한 대부분의 가야와 달리 경주와 같은 낮은 구릉지대에 고분군을 형성하였다. 조문국의 영향권은 인근지역 상주, 문경, 단양, 울진, 영덕까지 세력을 확장하였지만 신라가 북부지방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조문국이 가로막혀 있었고 결국 조문국 제21대왕을 마지막으로 약 369년의 역사가 신라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조문국의 흔적으로는 주변 대리리, 학미리, 탑리리 등에서 약 260 여 고분이 확인되며, 경상북도 기념물 제128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조문국 사적지내에는 40여기 고분을 복원하였다. ▲ 고분 중심 언덕에 하트형의 꽃밭을 조성하고 의성군에서 유명한 작약꽃을 심었다. 고대 삼한시대 초기국가 조문국(召文國) 고대 삼한시대 초기국가 조뮨국(召文國)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 고려 시대 의성부(義城府)였던 문소군(聞韶郡)이 본래 조문국이란 기록을 시작으로 조문국은 의성읍으로부터 남쪽 25리 지점 금성면 일대라 말하며, 벌휴왕 2년(185)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좌우 군주로 삼아 조문국을 벌했다 한다. ▲ 작약꽃이 핀 곳에서 기념사진을 담는 연인의 다정한 모습 조문국은 신라에 병합되면서 조문군으로 편재되었다 한다. 조문국에 관한 기록으로 삼국사디 권이 벌휴이사금종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三年春正月親祀如祖廟大赦二月 拜坡珍 仇道 一吉 仇須兮 爲左右軍主 代召文國 軍主之名 始於比’ 이는 ‘벟유이사금 1월에 왕이 친히 시조사당에 제사 지내고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으며 2월에 차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로서 좌우군주로 삼아 조문국을 정벌했는데 군주라는 이름은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는 뜻이라 한다. ▲ 조문국 사적지 내 경덕왕릉(景德王陵) 고분과 함께 비석, 상석 등이 있는 유일한 곳으로 이를 경덕왕릉이라 한다. 둘레 74m이며, 높이 8m이다. 고분 앞으로 가로 42cm, 높이 1.6m 비석이 세워져 있다. 조문국 고분 내 이를 제1호 고분으로 지정 해 놓고 있다. 1호 고분은 경덕왕릉으로 삼한시대 부족국가이던 조문국이 이곳에 도읍하여 신라 벌휴왕 2년(185)에 신라 문화권 병합되기 전까지 이 일대를 군림했던 조문국 경덕왕릉으로 의성현령의 꿈에 이곳이 현몽되어 발견하였고 오늘날 매년 봄이면 춘계향사를 지낸다고 한다. ▲ 경덕왕릉 앞 고분 형상의 야외 고분전시관 고분전시관은 2009년 5월~2010년 9월30일 기간 동안 발굴한 대라리 2호분의 내부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대라리 2호분의 순장묘 방식과 봉토축조과정을 디오라마로 볼 수 있다. 도한 2호분이 유구와 출토 유물을 전시해 놓아 당시 시대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 목화면작기념비와 말타는 무사 조문국 사적지에 또하나 만나는 것으로 문익점면작기념비가 있다. 고려말 공민왕 당시 원나라 사신으로 갔다 오면서 목화씨앗을 붓대롱에 넣어 가져왔다는 일화는 모든 이들이 다 알고 있을 만큼 알려져 있는 문익점(1329~1398)의 이야기 이다. 문익점이 가져온 씨앗을 첫 파종 한 곳이 자신의 고향인 경남 산청지역인데 왜 의성군에 문익점면작기념비가 있을까하는 의문도 들기 마련이다.
문익점은 씨앗을 시험재배하기 위해 장인이던 정천익(鄭天益)에게 보내고 관찰사가 되어 지방을 순시하던 중 의성군 금성산 일대가 목화씨앗을 구한 곳과 비슷하여 금성면 제오동에 목화씨를 재파하였다 한다. 조선 태종 당시 문익점의 손자 승로가 의성 현감이 되어 부임하면서 금성산 자락 금성면 일원에 면화 파종하였다하여 기념비를 세운 것이며,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는 사적 제108호 문익점 시배지가 있다.
목화면작기념비가 있는 주변 일대는 한때 우리나라의 목화생산에 크게 기여하였지만 점점 그 수요가 줄어들면서 목화씨앗을 뽑는 공장도 사라지고 이제는 관상용으로 재배하는 것이 전부이다. 조문국에 관한 기록이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소국들의 역사는 탄생과 소멸이 힘의 논리에 무너지면서 역사도 함께 소멸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흔히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조문국의 흔적도 고분군이 유일하다. 가야사 고분군 중에서 함안과 고령을 제외하면 나머지 소국들의 고분은 평지형이거나 언덕을 이용하여 조성하였다. 이곳 조문국은 언덕을 따라 고분을 조성하였으며, 고대 가야에서 출토되는 토기류를 닮고 있다.
신라의 공격에 조문국의 왕은 금성산 뒤쪽 대궐산으로 피한 후 금성산과 비봉산 사이 험준한 지형에 석성을 쌓고 대항하였다. 신라는 공격이 어렵자 회군을 하려 할 때 한 군사가 나서 말하길 산꼭대기 물이 없어 조금만 더 공격하고 버티면 승산이 있다는 말하였다. 조문국은 이 이야기를 전해듣고 말 등에 백미를 퍼부어 멀리서 보면 물로 말을 씻기는 듯 보이게 하였고 이에 속은 신라군은 철수를 결정하려 하였다 한다. 지금도 금성산에는 전쟁 당시의 이야기를 담은 지명들이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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