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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트레킹 - 경주 황룡사지 메밀밭 & 분황사

허영꺼멍 2017. 9. 18.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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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신라의 옛 절터 황룡사지를 찾아가다

"경주 사적 제6호 황룡사지

황룡사지 - 분황사 앞 당간지주 & 메밀밭 - 분황사




사적 제6호 황룡사지 주변은 무더운 여름을 막 털어내고 가을로 향한 손짓을 하고 있었다. 경주 황룡사지는 지금 발굴과정을 통해 과연 어떤 모습으로 다시 우리들 앞에 천년고도 경주의 모습을 보여줄지 사뭇 궁금하기만 하다.


▲ 황룡사지 중심 법당의 흔적


▲ 황룡사지 전경

여행별점 : ★★★★☆

동양최고 구층목탑이 있었던 황룡사지

분황사 주차장 : 경북 경주시 구황동 838-5


경주일원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황룡사지는 철저하리만큼 파손되어 그 흔적이라곤 겨우 몇몇 석재가 전부인 황량한 곳으로 신라 진흥왕 14(553) 왕명에 의해 창건, 진흥왕 35(574)에 신라 최대의 불상으로 알려진 장육존상을 모신 곳이다. 황룡사지가 특별한 경주의 상징적 의미는 선덕여왕 14(645) 80m 동양 최고의 구층목탑이 백제 기술자 아비지에 의해 세워져 신라를 상징하게 되었지만 몽고군의 침입으로 황룡사지는 폐허가 되는 아픔을 겪었다.

 

황룡사지는 사적 제6호로 신라 진흥왕 14(553) 월성의 동북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사찰로 고쳐 짓게 하여 절 이름을 황룡사라 하였다고 한다. 버려진 사지는 민가와 밭으로 전략해 버린 황룡사지 일원을 이주 및 발굴조사를 진행하여 어느 정도 윤곽을 확보하였는데 1976년부터 약 8년이 소요되었다. 조사결과 11금당으로 알려졌던 것과는 달리 13금당의 정방형으로 40,000여점의 유물을 수습하였다.


▲ 황룡사지 일원 메밀밭 전경

574년에 주존불인 금동 삼존불을 만들고, 선덕여왕 14(645)에 자장의 권유로 백제의 기술자인 아비지를 초청하여 9층 목탑을 완성시켜 493년간에 걸친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이후 고려 고종 25(1238)에 몽고의 침입을 받아 불타버린 후 옛터만 남아있던 것을 사역내 민가 100여호를 이주시키고 1976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서 8년간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황룡사는 신라 제일의 사찰로 월성 동쪽 용궁의 남쪽(오늘날 구황동)에 위치했다 전한다. 진흥왕 14(553) 대궐을 짓기 위해 공사를 하던 중 황룡이 출몰하여 사찰을 만들고 황룡사로 불렀는데 무려 17년이 소요된 국찰공사로 현재는 초석만 확인되고 있다. 경주일원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황룡사지는 철저하리만큼 파손되어 그 흔적이라곤 겨우 몇몇 석재가 전부인 황량한 곳으로 신라 진흥왕 14(553) 왕명에 의해 창건, 진흥왕 35(574)에 신라 최대의 불상으로 알려진 장육존상을 모신 곳이다.


▲ 황룡사지 역사문화관

금당지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사찰의 중심건물이며, 본존불을 모시는 곳이 금당인데, 삼국유사에는 황룡사금당과 관련한 흥미로운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진흥왕대에 서축아육왕이 황철 57,000근과 황금 30,000푼을 모아 석가삼존불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해 인연있는 나라에서 장육존상 완성을 기원하는 내용과 일불, 이보살상의 모형을 바다에 띄워 보냈는데, 관리가 이를 발견하고 왕에게 전하니, 황은 동축사를 세워 이들 삼존모형을 안치하게 하였다. 이후 황금과 철을 옮겨와 장육존상(높이 약 4.8m)과 두 보살상을 주조하여 황룡사에 모신 후 10년 뒤 금당을 지었다는 것이다.


▲ 우물터에서 바라 본 황룡사지 역사문화관 방향


발굴조사에 따르면 황룡사가 초창되었을 때 금당이 있었으나 장육존상과 두 보살상을 모시면서 새로 금당을 지었고, 동 서금당에는 삼존불과 탱화를 모셨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당의 기단은 성토층을 되파기한 후 21단으로 판축다짐하였다. 규모는 동서 51.7m, 남북 26.7m이며 총면적은 1.384이다. 계단은 남면에서 3개소, 북면에서 1개소가 확인되었다. 금당지 안에는 총44개의 초석이 외진 9X4, 내진 7X2칸을 구성하며, 중앙후면에는 장육상과 두 구의 협시불 대좌석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이들 삼존불 대좌석 동. 서쪽에는 14개의 불대좌석이 남아 있다.“

 

금당지는 황룡사지 중심법당이다. 이곳에는 본존불에 관한 이야기를 옮겨보면 "진흥왕대 서축아육왕이 황철 57,000근과 황금 30,000푼을 모아 석가삼존불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해 인연 있는 나라에서 장육존상 완성을 기원하는 내용과 일불, 이보살상의 모형을 바다에 띄워 보냈는데, 관리가 이를 발견 하고 왕에게 전하니, 왕은 동축사를 세워 이들 삼존모형을 안치하게 하였다. 이후 황금과 철을 옮겨와 장육존상(높이 약 4.8m)과 두 보살상을 주조하여 황룡사에 모신 후 10년 뒤 금당을 지었다고 한다"


▲ 목탑지 전경

목탑지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삼국유사에 따르면 황룡사 목탑은 자장의 건의로 백제장인 아비지와 신라장인 들이 국태민안의 염원을 담아 선덕여왕 12(643)부터 3년간의 조성기간을 거쳐 높이 약 80m 인 구층탑을 완성하였다. 여러 차례 중수와 수리를 거치다가 고려 고종 25(1238)에 몽고의 침입으로 가람 전체가 불타면서 목탑도 함께 소실되었다. 1976년부터 실시된 발굴조사를 통해 목탑규모는 한 변의 길이가 약 22m 인 정방형의 형태로 총면적은 약 490이다. 계단은 남면에서 3개소, 북 동 서에서 각 1개소가 확인되었으며, 기단에는 1개의 심초석과 64개의 초석이 정면 7, 측면 7칸을 우성하고 있다. 심초석은 435cmX300cm의 크기이며, 두께는 128cm에 이르는 화강암으로 무게는 약 30톤에 달한다. 심초석안에 마련된 사리공은 외곽에 두 줄의 홈을 돌려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하였으며, 그 안에서 금동사리 내 외함이 발견되었다.”


황룡사지가 특별한 경주의 상징적 의미는 선덕여왕 14(645) 80m 동양 최고의 구층 목탑이 백제 기술자 아비지에 의해 세워져 신라를 상징하게 되었지만 몽고군의 침입으로 황룡사지는 폐허가 되는 아픔을 겪었다. 버려진 사지는 민가와 밭으로 전략해 버린 황룡사지 일원을 이주 및 발굴조사를 진행하여 어느 정도 윤곽을 확보하였는데 1976년부터 약 8년이 소요되었다. 조사결과 11금당으로 알려졌던 것과는 달리 13금당의 정방형으로 40,000여점의 유물을 수습하였다. 황룡사 목탑은 간곳없고 그 자리에 황룡사탑 건립 이미지 기념비가 서 있다. 삼국 통일의 염원을 담은 황룡사탑을 이미지로 만나보고 스쳐 가지만 그 높이를 상상해 보면 당시 엄청난 공간임을 알 수 있다.


▲ 목탑지 전경

황룡사지에서 보면 아래로 분황사와 위쪽으로 미탄사지가 있다. 바로 담장을 하나 사이에 두고 존재했을 것 같은 신라시대 사찰 미탄사지는 사라지고 완전히 파손된 석탑 1기를 수습하여 복원해 놓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 보면 황룡사지 그 거대한 공간 끝자락에 탑 1기가 있는 듯 보인다. 발굴조사 당시 탑 기단부에서 소금동불입상수정제장, 금동제영락 등 29점의 유물이 확인 되고 탑기단부의 적심부를 돌과 찰흙으로 다진 후 불로 구워서 단단하게 하는 공법이 사용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탑은 6m,기단부 3.86m9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옛 영화는 간곳없는 허망한 흔적을 딛고 가을을 그려본다. 황룡사지는 사적 제6호로 신라 진흥왕 14(553) 월성의 동북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사찰로 고쳐 짓게하여 절 이름을 황룡사라 하였다고 한다.

 

574년에 주존불인 금동 삼존불을 만들고, 선덕여왕 14(645)에 자장의 권유로 벡제의 기술자인 아비지를 초청하여 9층 목탑을 완성시켜 493년간에 걸친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이후 고려 고종 25(1238)에 몽고의 침입을 받아 불타버린 후 옛터만 남아있던 것을 사역내 민가 100여호를 이주시키고 1976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서 8년간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황룡사는 신라 제일의 사찰로 월성 동쪽 용궁의 남쪽(오늘날 구황동)에 위치했다 전한다. 진흥왕 14(553) 대궐을 짓기위해 공사를 하던중 황룡이 출몰하여 사찰을 만들고 왕룡사로 불렀는데 무려 17년이 소요된 국찰공사로 현재는 초석만 확인되고 있다.




분황사 앞 당간지주


분황사 앞 당간지주가 있는 주변에는 하얀 메밀꽃밭이 조성되어 탐방객을 기다리고 있다. 몇일전 큰 비로 인하여 듬성듬성 쓰려져 있는 메밀밭 사이로 연인들은 부지런하게 추억을 담고 있었다.


▲ 구황동 당간지주(유형문화재 제192호)

경주 분황사 앞에 위치해 있는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2호로 분황사 바로 앞 남쪽에 서 있다. 양기둥 사이에는 동쪽으로 향한 돌거북이가 있는데 당간의 받침돌로 돌거북이를 배치한 것은 다른 당간지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을 한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이다. 당간지주는 분황사 정문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독특한 거북돌 받침이 남아 있는데 이 당간지주를 분황사 남쪽 당간지주로 말하고 있다.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 절에서 당이라는 깃발을 달았던 깃대를 당간이라고 하는데, 이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해 양옆에 세운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분황사 바로 남쪽에 있는데,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높이는 360m 이다.



양 기둥 사이에는 동쪽으로 향한 돌거북이가 있는데 당간의 받침돌로 돌 거북이를 배치한 것은 다른 당간지주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다. 기둥의 일반적인 형태이며 3개의 구멍을 설치하여 양 기둥이 서로 관통하도록 조성되어 있다. 이 당간지주는 황룡사 것이 아니라 분황사 소유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보인다.”




분황사 모전석탑

국보 제30호

삼국사기에 의하면 선덕왕 3년 분황사가 낙성되었다는 글귀를 통해 분황사는 서기 634년으로 추정되며, 신라탑 중 가장 오래된 탑으로 높이는 동경잡기를 통해 추정하는데 임진왜란 당시 9층으로 일본군대가 파손 후 개축을 시도하다 파손되어 3층만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분황사하면 떠오르는 것이 큰 모전석탑으로 돌을 벽돌모양으로 만들어 포개어 올린 것으로 정확 한 층수는 확인되지 않지만 9층으로 짐작하며, 지금은 3층으로 높이 9.3m, 기단 폭 13m, 한 변의 길이는 6.5m3층 규모만 하여도 상당한 크기이다.



분황사 재료로 사용된 석축은 안산암 소석재이며, 화강암이 1층 기단부를 형성하고 감실을 사면에 만들고 인왕상을 각 2기씩 조각하여 두었다. 탑을 수리하던 19152층과 3층 사이에서 석함이 발견되었는데 석함 속에서 나온 유물이 옥유 가위 금 은 바늘 숭넝통도 상평오주 등 귀금속과 고려시대 중국주화가 나와 충격을 주고 있다.

 

보편적 탑이란 불교적 해석으로 사리함이 발견되고 부처님 관련 부장품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건 영 딴판으로 고려 때 수리하지 않았나는 추정을 하고 있지만 그건 분명 아닌 것 같다. 당시 분황사는 선덕여왕에 의한 사찰로 여왕이 주로 사용하던 유물로 볼 수 있는 사찰로 존재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분황사는 사찰용 석탑이라기보다 어떤 위엄을 나타내기 위함이거나 이곳이 사찰이 아닌 다른 용도의 건물터로 추정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에 관해 살펴보니 놀랍게도 정원으로 추정하는 부분이 있다. 사찰정원 또는 당시 귀족의 정원으로 보는 견해는 신빙성을 떠나 발굴된 유물과 분황사터에서 불교적 유물이 많이 있지 않는 점 등으로 미루어 선덕여왕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고 있다. 분황사는 모전석탑 외 석조불상이 분황사 뒤편 우물 속에서 목이 잘린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일본인이 그랬다는 설, 불교 숭유억불정책 당시 누군가에 의해 자행된 행위로 간주하고 있을 뿐이다.


▲ 석정 


호국룡변어정이라 불리는 석정은 신라시대 우물이다. 사찰터에서 우물터가 발견된 것은 이례적으로 볼 수 있다. 외부 높이 70cm에 팔각으로 주변을 돌려놓고, 안쪽은 원형을 유지하는 것으로 불교적 해석을 빌면 팔정도와 사성체를 뜻하고 있다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성왕11(795) 당나라 사신이 신라 호국용 세 마리를 물고기로 변신시켜 가져가는데 왕의 꿈속에 두 명의 여인이 나타나 자신들은 동지, 천지에 사는 호국용의 아내인데 당나라 사신과 하서국 사람들이 자신의 남편과 분황사 팔각정에 사는 호국용을 주문을 외워 작은 물고기로 만들어 대나무 통에 넣어 가니 구해 달라는 꿈을 꾸자 뒷날 당나라 사신을 쫒아가 물고기를 되찾고 각각의 우물에 넣어 잘살 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우물을 두고 왜 이런 전설이 나왔는지 우물을 한동안 바라보아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귀족들의 행패에 가슴 져 미며 살던 어느 아낙들이 왕에게 남편을 구하기 위해 우물에서 항의라도 하였을까?




화쟁국사는 누구인가? 얼핏 들으면 전혀 새로운 고승으로 들릴지 몰라도 신라시대 주름잡던 화쟁국사는 원효대사이다. 분황모전석탑 옆에 있는 비부는 고려 숙종 6(1101) 8월 조서에 의하여 분황사에 만들어 지는데 당시 동방성인으로 알려진 원효에 대한 비석이나 시호가 없는 것을 알고 숙종은 "대성화쟁국사" 라는 시호와 함께 유사를 시켜 비문을 제작하도록 하였지만 지금은 비문은 없고 그 받침만 남아 있을 뿐이며, 추사 김정희가 쓴 친필이 비대석에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 이란 글귀가 음각되어져 있다.

 

석탑 뒤편으로 분황사에서 유일하게 있는 보광전에는 약사여래입상이 모셔져있다. 조선 영조5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약사여래입상은 왼손에 들고 있는 건칠제 약그릇 뚜껑에 " 건룡삼십구년을미사월이십오일조성야" 라는 부분에서 확인 할 수 있다.


▲ 분황사 모전석탑 전경







분황사에 관한 안내 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3(634)에 창건된 이래 지금까지 법등을 이어온 유서 깊은 사찰이다. 분황사 창건 직후에는 당대의 명승 자장율사(590-658)와 원효대사(617-686)가 주석하였다. 분황사에는 솔거가 그렸던 관음보살상 벽화와 경덕왕 14(755)에 강고내말 이 구리 306,700근으로 주성하였던 약사여래상 등이 있어 사격을 높였다. 분황사는 당간과 지주. 중문. 석탑. 3금당. 강당. 회랑을 갖춘 대가람이었으나, 고려시대 고종 25(1238) 몽고침입과 조선왕조시대의 임진왜란(1592), 정유재란(1609)을 겪으면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어 버리고 광해군 원년(1609)에 충창하고 새로 주조한 보광전과 약사여래입상 등이 사역을 지키고 있다.”






분황사에는 분황사 국보로 지정된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제30)을 비롯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분황사 화쟁국사비부(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 구황동 당간지주(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2)가 있으며, 경상북도 문화재자료인 분황사 석정(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 분황사 약사여래입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9)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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