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산은 상주 중심에 자리한 야트막한 산으로 삼국가시에 의하면 신라 3대 신문왕 7년(687) 산 주변을 따라 1천백보의 상주성을 쌓고 성의 대문 중앙에 자리한 작은 산이 왕산이라고 하며, 홍건적의 침략 당시 고려왕실 임시거처행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한다.
▲ 상주하면 곶감 곶감을 두려워하는 호랑이 캐릭터가 공원내 조성되어 있다.
▲ 위안부 조형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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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초기 경상감영의 터 '왕산' 무료주차 : 경북 상주시 서성동 163-83 |
왕산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왕산은 고도 상주의 중앙에 자리한 명산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3대 신문왕 7년(687)에 주위 1천1백보의 상주성을 쌓고 성의 4대문 중앙에 자리한 작은 산이 왕산이다. 고려 31대 고민왕 11년(1362)홍건적 침략으로 고려왕실이 상주목 상주성을 임기거처행궁으로 사용하였다. 이때 이 작은 산이 고려왕실의 산이 되었다.
1700년대 제작된 상산지도에는 왕산을 배경으로 관아들이 있었으며 조선조 1392(태조 원년)부터 1592년까지 경상감영을 겸한 곳이 이 왕산 아래였다. 특히 조선시대에 와서 상산심악으로 여겨왔으며 1617년 창석 이준이 편찬한 상산지에 의하면 상주에서 인재가 많이 배출된 것이 왕산이였기 때문에 이 왕산을 일명 장원봉이라고도 불렀다. 일제 강점기때 왕산 이름을 앙산으로 하였다가 최근 왕산으로 바로잡았다. 창석 이준선생이 왕산괴정 시를 남겼고 1300년 역사를 간직한 산이 왕산이며 장원봉을 중심으로 왕산을 돌면서 소원을 빌면 한가 지 소원을 들어준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
상주 복룡동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19호)
▲ 400년된 팽나무
왕산에는 위안부 조형상과 과거 이 고을 관리의 비석 그리고 수령이 400년 된 팽나무 한그루가 오랜 세월을 말해주고 있으며, 팽나무 호위를 받고 계단을 오르면 석조여래좌상 1기를 만난다. 그리고 그 위에 장원봉이 앙증스럽게 있다.
▲ 상주 복룡동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19호)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당초 석불좌상이 있었던 곳은 복룡동 358번지 마을 가운데에 동향의 단간와우를 세우고 비로전이란 현판을 붙여 봉안되었으나 1975년 10월 이곳으로 옮겨 지금에 이르고 있다.
화강암으로 조성된 석불좌상으로 머리에는 큼직한 나발이 표현되어 있고, 둥글고 풍만한 얼굴에 내려 뜬 눈, 작고 두툼한 입 등에서 적정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양쪽 무릎과 오른손 양어때와 머리 부분은 파손이 심하고 광배와 받침인 대좌는 없어졌다. 불의는 양어깨에서 부채꼴을 이루는데 서로 대칭된 모습이고 오른손은 깨어졌으나 두 손이 아래위로 겹쳐진 모습으로 보아 지권인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높이 153cm인 중후한 모습이 이 불상은 조각 수법이나 양식적 특징으로 보아 고려시대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
▲ 장원봉
상주 경상감영 터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왕산을 중심으로 한 이 곳 일대는 조선초기 경상감영이 자리했던 터다. 상주는 경상도 전체의 정치.군사.행정.문화를 대표하는 대읍이다. 조선초기에는 경상감영의 본영을 경주에 설치하였다가 1408년 상주로 옮겨, 임란(1592)때까지 200여년간 경상도 감여이었으며, 경상도관찰사가 상주목사를 겸임한때도 있었다. 상주의 경상감영은 조선 초기에는 관찰사가 임기 1년동안 도내의 각 고을을 다니며 풍속과 민생의 어려움을 살피는 순력의 행영체제로서 상주읍성 내의 시설은 경상감영의 주요 집무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주요 관아시설 중 지방수령이 집무를 보던 동헌은 1901년 화재로 남아있지 않고, 객사인 상산관, 외삼문인 태평루, 관아 정자인 침천정은 상주시 만산동 소재 임란북천전적지 경내로 이건하여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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