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이전 여행지/바다 트레킹

바다트레킹 - 부산 가덕도 외양포, 새바지 트레킹

허영꺼멍 2020. 4. 16. 09:34

.




여행자 청개구리의 우물밖 세상이야기


가덕도로 가자!

부산 강서구 외양포 트레킹





GPS : 부산 강서구 대항동 산 13-25 



꾼의 천국이었던 섬 가덕도는 2010년 가덕대교와 거가대교가 연결되면서 육지로 탈바꿈하면서 가덕도의 속살을 찾아 여행을 나서는 탐방객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연대봉에 올라 조망하는 11개의 무인도를 거느린 둘레 36km 크기 가덕도 해안절경과 일제강점기 일본군 사령부가 최초 주둔한 역사의 아픈 상처흔적 전초기지, 사전출입 허가를 받아야 만날 수 있는 가덕도 등대 여행이 대표적이다.


▲ 일본군 대공포 포신이 섬 밖으로 노출된 창     


 

" 가덕도" 그 섬에는 어민의 고달픈 삶이 느리게 흐르는 곳. 백 년 전 치욕의 흔적을 간직한 박제된 마을이 바로 가덕도 끝자락 외양포(외항포)이다. 일본군은 가덕도 제일 안쪽 도로끝자락 외항포항 대항마을에 일본 군 시설을 임시로 1904(일본 명치37) 8월 설치를 시작으로 12월 준공하였고 보조시설을 19052월 만들고 1905128cm 유탄포 6문을 편성 포대를 설치하였다. 러일전쟁 당시 진해만을 통과하는 발탁함대를 격침, 태평양 전쟁 말기 조선바다를 장악하기 위한 420여 평에 설치한 군사 시설이자 한반도 최후 방어지기였다.





사진으로 만나는 여행


첫번째 만남은 외항포에 있는 일본 사령부발상지이다. 과거 마을길로 접근해서 입구로 향하였지만 외곽도로가 정비된 이후 도로변에 주차를 하고 잠깐 일본 사령부발상지로 내려서면 되는데, 해당 여행일 무인단속카메라 차량이 불법주차를 단속하고 있어 난감했다. 주차장은 낚시꾼의 차량으로 빈틈이 없고 도로변도 꽉 차 있는데... 요령껏!


▲ 외양포 막사 전경    

마을끝자락에 있는 입구에는 일본 사령부발상지지 비석이 자리 잡고 마을에는 일본군 사령부가 있던 곳이라 마을 곳곳에서 일본의 건축 잔재가 발견된다. 비석에는 정면에서 사령부발상지지(司令部發祥之地)) 그리고 뒷면에는 소화116(1936)이라 기록되어져 있으며, 진지로 들어서면 넓은 광장과 양쪽으로 탄약고가 위치하고 주변에는 대나무를 심어 위장해 놓았다. 진지를 조성할 당시 외부에서 유입한 붉은 벽돌은 외벽을 쌓고 위장 무늬를 칠해 놓았다. 그리고 대항에는 일본이 전쟁목적으로 만든 인공동굴 20여개가 확인되고 있다.


▲ 탄약고 전경    

▲ 포진지 흔적     

 

지금으로 100여 년 전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이 구축한 진지와 그들의 주거지 헌병막사, 무기창고, 장교사태, 사병생활관 등 30여 건축물이 남아 있으며, 마을 뒤 1904년 구축한 외양포진지가 있다. 외양포 진지는 은폐된 콘크리트 진지 위 풀을 심어 노출을 피하였다.



외양포는 일본군 사령부가 최초 주둔한 전초기지로 우리에게는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본래 양천 허 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터전을 일본군이 강탈 그곳에 사령부를 만들었는데 그 흔적이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져 있다. 진해 해군사령부가 진해에 있는 것 또한 가덕도와 연관성이 있다. 1909년 가덕도에서 철수 마산으로 일본사령부가 옮겨졌다 1972년 진해로 옮겨가면서 오늘날 해군기지가 된 것이다.



1905527일 오전에 Z. P. 로제스트벤스키 중장을 사령관으로 전함 8척을 비롯한 각종 군함 34척과 공작선병원선 등을 포함한 38척을 갖춘 러시아 함대가 대한해협에 모습을 드러내자 일본은 도고 헤이하치로 지휘관이 이끄는 기함 삼립을 선두로 40여척의 연합함대가 710분 출격하여 오후 145분 동해상 독도부근에서 해전을 치렀고 528일 오전 10시 발탁함대는 전함 2척만 남겨놓고 항복함으로서 러일전쟁은 막을 내렸다. 우리는 일제강점기에 들어가는 아픈 역사의 순간이기도 한 곳이다.


이 일대 건물은 개인소유가 아니다. 마을은 해군 통제부 소유로 건축에 관한 증개축을 할 수 없다. 일본군이 철수하고 그 공간을 불하받아 머물던 외양포는 본래 주민들 소유였지만 일제가 강제로 수탈 후 군사목적으로 사용하였고 지금은 국가로부터 돌려받을 길이 없다보니 옛 일제강점기 당시 군사시설과 함께 그곳에 머물던 병사들이 마을을 이룬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새바지항으로 진입한다. 주말이라 주차공간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낚시꾼과 새바지항 옆 새바지인공동굴이 개방되면서 새로운 볼꺼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 역사의 아픔이자 또 한편으로는 잊어서는 안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세바지항 진지동굴 그리고 몽돌해안



가덕도 천가동 외양포(외항포)는 대항의 바깥쪽 목의 형태여서 외항포라 부르다 오늘날 외양포로 고쳐 부르지만 아직도 외항포로 많이 불리고 있다. 대항 외양포는 가덕도 내 최남단에 가덕등대가 있으며, 천수말에서 대항리까지 이어지는 해안 일대에 일제 강점기 포진지와 땅굴흔적 등이 남아 있으며, 마을 곳곳에 일본 헌병들이 마셨다는 헌병샘이 있다. 또한 대항마을 남서쪽 3km 지점에 가덕도 숭어잡이로 유명한 내동섬이 있으며, 동쪽으로 자생동백군락지가 형성되어 있다.


▲ 새바지항 전경     


1941년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으로 향하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본토 사수를 하기위해 만든 인공동굴로 주변을 따라 10여 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조선 내 일본군은 일본이나 태평양 지역으로 배치 되었다. 1944년 중반 이후 일본군의 전력이 급강하하자 조선의 일본군들은 본토 결전을 준비하면서 한반도 남해안의 경비를 강화하였다. 한편 미군은 조선을 빌본 본토 공격의 거점으로 활용할 계획을 논의 중이었다. 1945년 대한해협 상공에 미군기가 출몰하고, 대한 해협에 미군이 설치한 어뢰가 조선내 일본군의 일본 본토 이전을 제어하였다. 이즈음 미군이 일본 본토보다 한반도에 상륙하여 거꾸로 일본을 공격한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다. 이에 일본은 부산과 주변 해안에 미군 상륙 작전을 대비하기 위해 방어시설을 구축하였다. 가덕도 대항 마을의 인공동굴도 이와 같은 정세에서 제2차 세계대전 말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전국 광산기술자와 조선인들을 징발하여 구축하였다.”


▲ 산 중턱에 보이는 인공돌굴    








외항포에서 더 들어서면 가덕도 동백섬 군락지와 가덕도 등대로 향할 수 있지만 아쉽게도 가덕도 등대는 군사기지로 사전 출입신청 없이는 출입이 불가능하여 즉흥적으로는 출입할 수 없는 곳. 부산시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된 프랑스 고딕 양식으로 세운 구 가덕도 등대는 아쉽게도 군부대에 의해 출입이 차단되어 있다. 가덕도 등대가 유명한 것은 대한제국 당시 만든 41개 유인등대 중 등탑과 사무실, 숙소가 하나의 공간에 조성된 유일한 등대로 등대 출입구에 대한제국 황실 문양인 자두꽃 무늬가 있다. 문제는 출입이다. 등대로 가는 길은 해군과 해병대가 지키고 있다. 부산지방항만청의 허락이 떨어져야 통과할 수 있는 곳이다.



가덕도에 최근 부산신항 준설토 투기장 예정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신석기 집단매장터를 발견하여 학계가 술렁이는 곳이다. 8000년 전 매장된 시신 46기 중에는 양팔에 5, 3개씩 조개팔찌와 20개 조개목걸이를 한 인골을 한반도 최초 발견하였다. 말로만 알려진 조개목걸이의 실체가 확인되는 중요한 유적발굴이 아닐 수 없었다.



부산 가덕도에서 유골 1점이 수거되었다. 조사결과 뜻밖의 결과로 유럽형 유전자로 약 7천여 전 신석기로 거슬러 올라가 이곳에 살던 사람의 유골로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땅에서 최초 유럽인 유전자 유골발굴과 함께 매장 방식 또한 독일에서 발견된 굴장 방식이라는 점으로 인하여 6만 년 전 아프리카 대륙을 떠나 유라시아로 흩어진 현생인류가 그것도 한반도에 유럽인이 이동했을 가능성 그리고 그 첫 발을 디딘 곳이 가덕도로 추정할 수 있는 새로운 학설 가능성이 열렸다.




여행자 '핏빛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