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내면 남명리 골짜기 11만 9700m2 방대한 면적을 가진을 얼음골은 해발고도 600m에 위치한 암석지대로중생대 말엽에 분출한 안산암(화산암 분류의 하나로 중성화산암 총칭)이 주류를 이루는 협곡으로 둘러싸인 계곡이다. 얼음은 빠르면 3.4월부터 시작되는데 바닥은 자갈로 메워져 있어 물이 고여있을 시간적 여유도 없지만 단지 그 시기를 달리할 뿐 한여름에 꽁꽁 얼어 버린 얼음은 신비감을 더해준다. 겨울철에도 눈이 내리거나 온도가 따스해 지면 곧잘 얼어 보였다가 햇볕이 들면 증발해 버려 밀양의 4대 기적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얼음골에 관한 정확한 이유는 아직도 미궁에 빠져 있다. 단지 일부에 의하여 자신들의 주장들이 마치 사실처럼 부각되어져 있을 뿐이다. 삼복더위 때면 얼음은 가장 많이 얼었다가 처서가 지나면서 녹아내린 다는 것. 한여름도 비가 잦거나 이상기후가 이어지면 얼음의 양도 따라서 줄어 버려 더욱 신비함을 말해주며 계곡에서는 발을 담그지 못할 정도로 찬 물이 흐르고 있다. 여름 평균기온은 섭씨0.2도, 계곡물은 12-14도로 한여름 가져간 음료수 캔을 잠시만 물속에 넣어 두어도 곧 차갑게 변할 정도이다. 이 모든 현상을 두고 지질학상 지형을 애추(崖錐,talus 혹은 scree/풍화된 암석조각이 중력 작용으로 급사면에서 떨어져 내려 퇴적한 반원추형의 지형)지형이다.
저것이 뭐하는 물건인고? 얼음골을 찾는 사람은 한번쯤 계곡에 자리한 안테나를 두고서는 궁금증을 유발한다. 얼음골 주변의 온도변화와 습도, 풍향을 조사하여 결빙의 원인을 찾으려는 부산대의 노력으로 1999년에 설치된 것이다. 얼음골의 주요원인으로 처음 대두된 것은 팽창한 기압차에 의해 얼음이 언다는 대기팽창설과 바위 지층에서 물이 증발하는 과정에서 열을 잃어 얼음이 얼어 버린다는 기화열설이 주장되었지만 입증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 냉장고 원리가 주장되고 있다. 얼음골이 대기의 찬 공기를 흡입하고 더운 공기를 내 뿜는 것으로 보아 냉장고 원리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겨울철 차가운 공기가 돌무덤 밑으로 들어가 잔뜩 데워져 솟는 자연대류설 및 지하에 결빙돼 있는 얼음이 한여름까지 지속된다는 대류 결빙설이 있다
얼음골이 아프다. 8월이면 얼음이 절정에 이루었지만 갈수록 점점 시기가 앞당겨 지고 있다. 2000년부터 6월21일, 2001년 7월 16일, 2002년은 6월 15일, 2003년은 6월 20일이니 긴급 원인규명이 필요한 시기라며 다들 걱정이다. 1984년과 1991년은 아예 얼음이 얼지도 않았었다. 지난 몇 년간 우리나라의 이상한 기온상태를 보여준 것과 동일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온도와 습도는 얼음골에 중요한 결정을 짓는 열쇠가 아닐까 싶다.
동의보감 허준으로 통한 밀양시의 관광사업이 활기를 뛴다. 얼음골 일원에 동의각을 세운다는 것이다. 역대 한의 학자를 기리는 사업으로 그 필두에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이 있다. 특히 인체를 해부한 곳이 이곳 얼음골이라는 주장으로 인하여 더욱 큰 관심을 불러 오지만 자칫 잘못된 정보가 훗날 굳어져 학설로 남을까봐 염려스러울 따름이다. 역사왜곡이라는 주장은 구체적인 증거 없이 진행하면서 마치 사실처럼 말하고 있다.
동의보감 허준에 관하여 알아보자.
허준(許浚: 본관 양천(陽川), 자 청원(淸源) 호는 구암 1546-1615) 용천부사(龍川府使)를 지낸 허론(許論)의 서자(庶子)로 김포(金浦)에서 출생. 1613년 출간된 스물다섯권이 한질로 된 동의보감은 한국을 비롯하여 중국과 이웃한 나라까지 전해질 정도로 당시 파격적이고 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 등 세분화하여 정리한 최고의 의서이자 의학 백과사전이라고 전하지만 정작 허준은 온통 신비에 싸여 그 존재를 알리지 않고 있다가 1991년 민통선에서 초라하게 변해버린 허준의 무덤이 발견되지만 허준에 관한 기록은 없다.
최근 허준의 나이를 산출하는 방법으로 임진왜란 때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피난 간 사실을 두고 그 진위성 여부를 가려내었다. 당시 허준은 선조에게 공신의 자격을 부여받았다는 점에서 공신록을 열람해 보면 허준은 기해생(1539)으로 7년이나 빠른 나이 즉 1615년에 77세 일기로 사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정1품 당상관이라는 의술로 명예를 지녔지만 오직 출생신분이 서자라는 이유에서 훗날 족보에 기록조차 전무한 실정이고 보면 허준을 세상으로 끄집어 내 밝은 빛을 주려는 사람들에 의하여 상당 부분이 미화되었을 가능성이 짙은데 그중 1567년 미암일기에 이런 구절이 있어 허준의 실상을 전해준다 "유희춘은 1659년, 이조판서 홍담에게 허준을 내의원에 천거해 주도록 부탁"이라는 점은 그 동안 알려진 내의원시험을 치룬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편 동의보감은 의학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사후에는‘보국숭록대부양평군(輔國崇祿大夫陽平君)’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생전에 동의보감 외 벽역신방, 언해구급방, 언해태산집요 등을 저술하였는가 하면, 허준이 동의보감을 체계적으로 연구 편찬하기까지 그의 스승인 류의태가 있습니다만 그를 입증해줄 자료는 어디에도 없고 당시 유교사회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엄청난 일이고 보면 어쩌면 얼음골 동굴에서 자신의 몸을 내준 유의태는 가공인물이거나 다른 사람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허준이 동의보감을 직접 사용해보고 기록했다기보다 여러 문헌을 통해 인용하거나 일부 자신의 소견을 옮긴 것으로 추정할 경우 한사람의 의술이 그토록 당시 시대적 반영을 하면 대단한 의술이며, 어쩌면 불가능한일이라는 것입니다.
허준의 스승인 류의태는 경상남도 산청에서 "유이태"로 죽어 가는 사람도 살린다는 명의로 허준의 스승일 가능성이 높고 유이태 후손은 지금도 허준의 스승이라 믿지만 허준과 유이태는 생존한 시기가 전혀 다른 허준의 사망이후 태어났다. 그럼 허준에 관한 이야기들은 복잡하게 얽혀있다.
수술을 집도했다는 얼음골이나 성깔 있는 스승 류의태 등 이 모든 인물이 가공된 실로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스승 류의태는 어떤 인물일까? 허준의 스승 하면 경상도 산청에 살던 류의태로 조정의 부름도 거부하고 백성을 위해 의술을 사용한 인물로 허준의 성장과정에 중요한 구심점으로 자리 잡지만 허준이 생존했던 당대에는 류의태라는 의원은 기록조차 없고 100년 뒤인 조선 숙종 때 산청의 유이태가 있는데 그 의술이 뛰어나 명의로 알려져 있다. 결국 허준의 스승인 류의태는 가공인물로서 후세에 누군가 허준과 유의태를 비교하여 만들어 낸 입담에 불과하지 않을까 싶다. 이 모든 것을 사실로 받아들여진다면 동의보감에 관하여 의구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데 지금까지의 기록으로 볼 때 정유재란으로 중단되었지만 본인이 귀향을 가서까지 의술을 총정리하여 14년만인 광해군 2년인 1610년 8월6일 25권의 책이 완성되고 이름을 동의보감으로 정한 후 1613년 11월 개주갑인자로 인쇄 간행되어 오늘날까지 중요한 의서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아도 될 것으로 본다.
스승 유의태 와 허준은 얼음골의 전설 같은 이야기 속에서 묻혀져 가는 이야기처럼 양천허씨 족보에는 진동면 하포리 광암동 선좌 쌍분이라 명시되어 비무장지대를 살펴본 결과 陽平(君) (扈)聖功臣(許)浚라는 비문발견하여 허균의 묘를 찾았다고 한다. 허준의 묘역을 찾아가려면 비무장지대 출입증을 확인 받아야 한다. 스승으로 알려진 유이태(?-1715)는 조선 후기의 의원으로 본관이 거창출신이며 1706년 홍역 전문치료서인 마진편을 저술했다. 숙종 때 두진(천연두)과 마진(홍역)이 궐기하여 많은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자 유의태는 마진경험방을 토대로 예방치료에 대한 마진편을 만들고 관직을 포기 한 후 고향에서 환자를 치료하는데 전념하였다. 의술이 신기에 가까워 중국 명의 편작에 비유될 정도였다고 한다.
사극 허준의 열기는 밀양 얼음골에서도 가세한다. 도대체 방영이 끝 난지 언젠데.. 다들 사례빙곡이 어디냐며 묻는가 하면 시체를 해부한 동굴이 어디냐고 난리들이다. 소설 속에 있는 드라마틱 이야기를 실제 인물에 삽입하였으니 이러는 것도 당연하다 싶지만 검증되지 않은 인물묘사는 어쩌면 혼란을 부추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눈앞이 아찔하다.
얼음골 입구 철다리를 건너는 좌우편은 여름이면 피서 나온 사람들의 발길로 항상 붐비는 곳이며 매표소를 지나 오른편 계곡은 그야말로 무릉도원이 따로 없는 신선노름이다. 얼음골 계곡을 따라 오르면 곧장 천황사가 나온다.
천황사는 1950년경 석불좌상의 하단부를 발견 복원하여 지금의 얼음골 입구에 작은 암자로 출발한 사찰로 모셔온 석불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확인된 독특한 좌대의 모습으로 11마리 사자가 새겨져 있으며, 향을 피울 수 있는 곳을 함께 만들어 놓아 보물 제1213호로 지정되었다. 총 높이 123.5cm, 두상높이 25cm, 좌대높이 40.5cm로 비교적 당당한 체구를 지녔으며, 광배가 없어 최근에 금동광배를 만들어 놓았다.
천황사를 둘러본 후 얼음골로 향하는 길 및 폭포로 향하는 갈림길이 시작된다. 이곳에서 얼음골 가는 길을 가기위해 천황사 오른편 철다리를 건너 조금 오르면 얼음골이다.
얼음골(천연기념물 제224호)에는 여름철이면 곳곳에서 찬바람이 나오는 돌구멍과 얼음이 얼어 고드름이 달리는 곳이 있다. 얼음골이 최근 크게 환경이 바뀌면서 점점 얼음 보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해발고도 600m에 위치한 얼음골은 좌우 30m, 위아래 70m정도의 약 15도 경사면을 따라 형성되어 있다.
얼음골에서는 동의굴 동굴로 가는 길과 가마볼폭포로 향하는 길로 나누어진다. 가마볼 폭포로 향하면 첫 번째 3개의 폭포를 만날 수 있다. 처음 만나는 층층폭포를 숫가마볼폭포라 부르며 제일 안쪽에 있는 것을 암가마볼폭포라 부른다. 이곳 가마볼 폭포는 수량이 적어 웅장한 모습을 보기 힘들지만 비가 내린 뒷날 찾아가면 아름다운폭포를 만날 수 있다. 폭포를 되돌아 나오면서 곧장 철제계단에서 천황사 방향으로 내려서면 또 하나의 폭포가 있다. 두 갈래로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폭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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