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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진주] 논개의 혼이 흐르는 진주 촉성류

허영꺼멍 2010. 6. 4. 10:34

 

 

 

 

 

삼국시대부터 이미 조성된 진주성은 고려 말 우왕 5년(1379) 당시 진주목사 김중광이 왜구의 침범에 대비하여 토성을 석성으로 쌓고 임진왜란 직후 성의 중앙에 남북으로 내성을 쌓았다. 진주성은 우리나라 임진왜란 3대 대첩지로 알려진 중요한 전략지로 선조 25년(1592) 10월 왜군 2만여 명이 전라도 진격을 위해 침략하지만 김시민과 3,800여명의 군, 관 ,민이 협력하여 물리치는 성과를 거두자 왜군 10만 명은 이듬해 6월 다시 재정비하여 침략 결국 7만의 군, 관, 민이 모두 순국하였고 성은 함락 당하였다. 현재의 성은 1972년 복원하고 1975년 전란에 허물어져 방치되었던 성곽 1,760m 및 높이 5~8m로 복원, 1979년 성 안팎의 민가를 정비를 시작으로 2002년 공북문 복원 공사를 마지막으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성내에는 촉석루, 의기사, 영남포정사, 북장대, 창렬사, 호국사, 서장대, 임진대첩계사순의단, 국립진주박물관, 야외공연장을 갖추고 서장대를 통해 의기사로 나오는 남강 산책로를 조성하였다.

 

 

 

 

 

 

 

 

 

 

 

 

 

 

 

 

진주성과 함께 촉석루를 올려두고 박물관 및 야외공연장을 두루 갖춘 조선시대 석축 평산성(촉석성)은 산등성을 따라 쌓아 올린 성벽만 하여도 4.000m로 성곽은 내성과 외성으로 천혜적인 지리적 자연조건을 이용하여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쌓은 성벽으로 내성은 1,930尺, 외성은 1만330尺에 성벽을 따라 수문, 임문, 장대, 장계, 포루 ,촉석루가 있다.

 

진주성을 두고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진주목 성곽조에 촉석성은 주의 남쪽1리에 있고 석성으로 둘레가 4.359尺, 높이가 15尺으로 성내 우물이 셋, 군창이 있다고 기록되어져 있다. 광해10년(1618)에 재정비된 성곽은 전란을 겪으면서 일부 파손되었다가 오늘날의 성곽으로 완성시킨 때는 1970년부터 4년간 공사후 복원된 성에는 서쪽으로 의정문, 북쪽은 지제문, 남쪽은 예화문이라 부른다.

 

성벽을 두고 거열성지(백제가 주로 만든 석성/거열성이 남아있다)였고 고려 공민왕때 7차례에 걸쳐 중수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진주성은 임진왜란을 통해 3대 대첩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는 중요한 곳이다. 진주성의 위상이 높아진 것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3800여명의 군사로 10배 가까운 왜적을 물리치는 대승을 거두지만 1593년 2차 진주성싸움에서 민. 관. 군 7만여 명이 왜군 12만 명을 맞아 11일간 대 전투를 치르게 된다. 이때 왜군의 조총과 아군의 지원력이 차단되어 아군은 순국하게 된다.

 

진주성에는 촉석루와 함께 김시민 전성각적비, 의기사, 서장대, 북장대, 창열사, 국립진주박물관, 호국사, 야외 공연장이 넓은 성안에 자리하고 논개에 관한 여러 전설이 담긴 곳이 남아 있다.

 

진주성안 우뚝 솟은 촉석루 밑으로 향하면 절벽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바위가 자리 잡고 있다. 쉽게 뛰어서 건너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리 만만한 위치가 아니라서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바위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약간씩 움직여 운 좋은 날이면 접근하기가 쉽다. 바위에 관한 전설이 내려오는데 의암이 바위 쪽에 와 닿게 되면 전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 바위가 가까이 붙어 있지나 않았나 싶은 생각입니다. 의암에는 큰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조정에 논개의 순절을 기리는 탄원을 내자 경종은 1722년 의롭다는 말(義)을 하사하니 원래 위암으로 불렸던 바위를 의암으로 정대륭에 의하여 표기하였다. 의암에서 촉석루를 바라보면 촉석루 절벽에는 천추의열(一帶長江 千秋義烈)"글귀가 새겨져 논개를 추모하고 있다.

 

의암사적비는 의암 바로 앞 언덕에 세워져 있다. 조선시대에 만든 비석으로 경남유형문화재 제353호로 가로60cm, 새로145cm, 두께 15cm의 석비로 임진왜란 2차 진주성전투에서 남강으로 뛰어든 논개를 기리는 공적비로 비석을 만든 후 18년 뒤 진주 우병사 남덕하가 왕의 명을 받아 비를 세우고 비각을 만들었다. 비문에는 논개에 관한 내용이 처음으로 실려 있는 유몽인의 설화집 어우야담의 내용이 기록되어져 있지만 어우야담의 정확한 신빙설은 입증할 길이 없다.

 

촉석루 위쪽은 조선말 만든 의기사가 있다. 의기사는 중건된 지 44년만인 1868년 다시 중건하고 매년 6월 논개에 대한 제향을 올리는 곳으로 의암별제를 탄생시킨 곳이기도 하다. 의기사는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서 친일파 김은호가 그린 논개의 영정이 걸려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1962년 사당보호를 위해 모의당을 세웠다. 걸려 있는 영정은 본래 김은호가 그린 미인도를 이승만이 이곳에 선물한 것으로 김은호가 전라도 사람이 의뢰하여 만든 것으로 이승만에게 선물하였다고 전한다.

 

서장대는 진주성 서쪽 누각으로 서문의 지휘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 무너졌다가 1934년 재건하였지만 현판마저 사라져 1979년 은초 정명수가 쓴 작품이 걸려 있으며. 북장대는 진남루란 편액이 걸려 있으며, 공북루라는 별칭이 붙어있는 조선 중기 군사 건물이다. 이와 함께 진주성 안으로 들어서면 야외공연장이 끝나는 지점에 국립진주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진주박물관은 임진왜란 관련 유물 및 가야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1980년 10월 착공하여 1984년 11월2일 날 개관하였다. 개관 초기에는 선사시대를 비롯하여 가야시대의 주요 유물을 전시하였으나 1998년 1월 15일 임진왜란 전문 역사박물관으로 탈바꿈하였다.

 

진주성일원에서 진행된 진주 논개제는 진주논개제 발전방안 위크샵을 시작으로 임진왜란 당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7만 민, 관, 군을 위해 헌다례와 의암별제를 통해 논개의 희생정신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삼일동안 개최된다. 특히 극단현장이 진행하는 논개순국재현극은 최고의 감동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