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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장안] 장안사 와 척판암

허영꺼멍 2010. 6. 5. 00:28

 불광산을 따라 흘러내린 이슬은 계곡을 이루고 장안사계곡을 따라 오르면 기장현의 4대 사찰로 알려진 장안사와 산자락을 따라 조금만 더 오르면 척판암, 내원암이 원효대사의 불법을 수호하고 있다.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도의 경계지점으로 신라 문무왕 13년(서기 673년)원효대사가 창건 후 쌍계사로 불리다 애장왕이 다녀간 후 장안사로 개칭한 천년고찰로 역사의 비운을 결코 비켜가지 못하고 조선시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지만 인조8년(1631) 의월대사가 다시 중창하고 인조 16년(1638) 대의대사가 중건하고, 효종 5년(1654)원정, 학능, 충묵스님이 대웅전을 중수한 후 1875년 단청과 1987년 종각을 만들고 요사를 중창하니 대웅전, 명부전, 산신각, 웅진전을 둔 지금의 장안사 모습이 비로소 갖추어졌다. 정면에 석가여래삼존불과 후불탱화, 산중탱화를 모신 대웅전이 자리 잡고 왼쪽으로 웅진전, 오른쪽은 명부전이 자리 잡고 최근에 불사한 금동 와불상이 불심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장안사는 통도사의 말사로 자리 잡고 대웅전은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37호로 지정되었다.

 

 

 

 

 

 

 

 

 

장안사에는 인도에서 3차례에 걸쳐 들여온 석가모니 진신사리 7과를 모신 삼층석탑은 사자 머리위에 석탑을 살짝 올려둔 형태로 함안주리사지석탑과 비슷한 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경내에 있는 단풍나무는 가지들이 서로 엉켜 올라가며 자라는데 높이가 겨우 2.5m의 신기하기만 하다.

 

장안사 입구부터 계곡을 따라 토속점이 즐비하게 형성되어 있으며, 장안사 계곡에는 여름철 수많은 피서인파가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척판암은 신라 문무대왕 13년 원효스님이 장안사와 함께 창건한 사찰로 창건 당시 담운사로 불리다 원효대사는 당나라 종남산에 있는 태화사에 큰 장마비로 산사태가 일어나 천명대중이 매몰될 것을 신통한 혜안으로 살피고는 신라의 원효가 판자를 던져 대중을 구한다는 척반구중 현판을 태화사로 날려 보내자 태화사 천명대중은 공중에 있는 현판을 보려고 법당을 나오는 순간 태화사 뒷산이 붕괴되어 매몰되고 천명대중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그 후 목숨을 구한 천명대중이 신라 척판암으로 찾아와 원효스님의 제자가 되길 간청하니 천성산 주변에는 이들이 거처할 많은 암자가 생겨났는데 원효스님이 천명대중의 거처를 찾아 내원사 부근에 이르자 사신이 마중 나와 대둔사 터를 점지해 주었고 곧 그 터에 상, 중, 하 내원암을 짓고 89개의 암자를 세워 천명대중을 거주하도록 한 후 참선, 경전, 기도 중 자기에게 맞는 방법을 따라 암자를 택하게 하고 담운사는 척판암으로 불렀다 한다.

 

 

 

 

 

 

원효와 당나라 구전은 결코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당시 당나라 고승은 원효를 불세출의 위인으로 칭송할 정도였으며. 원효가 사는 해동을 향해 세 번씩 절을 하며 해동성불로 불렀다. 당나라에 관한 이야기는 이 뿐만 아니다. 어느 날 당나라 성선사에 화재가 발생하자 경주 고선사에 머물던 원효스님이 마당의 못에 있던 물을 퍼 서쪽으로 부었더니 성산사 화재가 진압되었고 그 인연으로 고선사에는 원효 사후 서당화상비를 세웠다고 한다.

 

지금의 척판암은 그야말로 산 위에 올려진 판잣집을 연상하게 할 정도로 협소한 산 중턱에 겨우 터 잡고 있으며, 구전에 의하면 제법 큰 고찰의 흔적이 있어야 하지만 암자수준에 지나지 않아 장안사와 함께 창건된 사찰인지 장안사에 딸린 부속암자였는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