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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김제] 모악산 금산사

허영꺼멍 2010. 8. 21. 20:56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는 조선 정종 23년(1492) 만든 금산사 5층 석탑 중창기를 통해 옛 절터 위 다시 중창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금산사는 백제 법왕 1년(599) 법왕의 자복사찰로 창건 후 경덕왕 21년(762)진표율사가 6년 기간을 통해 중창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후백제 935년에는 백제 견흰이 아들 신검에 의해 감금되다시피 금산사에 유폐되어 자신이 만든 사찰에 스스로 갇혀버리는 신세로 전략하는 비운의 장소였으며, 정유재란으로 전소된 후 1961년 이후 재건을 통해 오늘에 이른다.

 

금산사 입구에 있는 돌문은 견흰이 후백제를 세우고 자복사찰로 금산사를 만든 후 주변에 성을 쌓은 흔적의 일부로 알려져 있으며, 최근에는 장마로 미륵전에 모셔둔 400년 된 소조불인 삼존불상 중 법화림보살 왼쪽 등판부분이 무너져 내려 원상복구를 하였다.

 

미륵전에 모셔진 대불은 한국의 근대 조각가 김복진(1901~1940.8.18)의 1938년 작품으로 국내 최초로 서양 조각을 한국화단에 도입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1928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 가담한 죄명으로 투옥된 후 옥중에서 밥풀로 불상을 만들다가 불교에 귀의하고 본격적인 불상제작에 들어갔다. 금산사 미륵전에 있던 소조미륵삼존상이 1934년 화마로 주존여래상이 소실되자 김복진에게 의뢰하여 불상을 재건하였다. 미륵전 미륵보상은 동양 최대의 옥내 입불로 본존불은 높이 11.82m, 협시불은 8.8.m이다.

 

미륵전에 모셔진 미륵불의 역사를 살펴보면 진표율사가 중창하면서 만든 33척의 철불로 조성과정을 보면 연못 중앙에다 밑이 없는 대형 무쇠시루를 걸고 그 위에 우물정자 형태의 나무 받침목을 얹은 다음 철로된 미륵존불상을 세우게 되니 금산사 미륵존불은 무려 4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 버린 766년에 완성 하였지만 어찌된 일인지 미륵불상 밑에는 지금도 밑이 없는 거대한 시루가 봉안되어 있다. 진표율사가 미륵존불을 만들기 위해 연못에 숯으로 메우고 연못 한 가운데 연꽃모양을 조각한 큰 바위를 세웠으나 무슨 일인지 석련대는 밤 사이에 20여 미터나 떨어진 위치로 옮겨져 버려 의문을 몰라 하는데 미륵이 꿈에 현몽하시길 "돌이란 불에 들어가면 튀는 법이니라" 말하니 진표율사는 이에 무쇠시루를 이용하였다 전하며, 미륵불의 제조흐름을 보면 철불(33척/진표율사)-목불(36척/수문대사)-석고불(39척/김복진)으로 이어진다. 가만 살펴보면 미륵불의 크기가 3척씩 자라고 있다. 이것은 미륵불이 3회설법으로 천하장생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3변성도에 의한 것이며, 사용된 재료가 바뀐 것은 오행의 상극이치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미륵불은 이미 3척씩 자라나면서 천하장생을 구원한다는 3번성도에 이른 것이다. 과연 미륵은 나타날까?

 

금산사 불교유적으로 금산사미륵전(국보 제62호), 금산사노주(보물 제22호), 금산사석련대(보물 제23호), 금산사혜덕왕사진응탑비(보물 제24호), 금산사오층석탑(보물 제25호), 금산사방등계단(보물 제26호), 금산사육각다층석탑(보물 제27호), 금산사당간지주(보물 제28호), 금산사심원암북강삼층석탑(보물 제29호), 금산사 대장전(보물 제827호), 금산사석등(보물 제929호)등이 있다.

 
 
 
금산사미륵전(국보 제62호)

정유재란 당시 소실된 미륵전을 조선 인조 13년(1635) 수문대사가 다시 만든 건물로 미륵존불을 모시고 있어 용화전, 산호전, 장륙전으로 불린다. 미륵전은 통층구조로 1층에는 대자보전, 2층에는 용화지회, 3층에는 미륵전으로 1층과 2층은 정면 5칸에 측면 4칸을 하고 3층은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올린 다포계 양식을 하고 있는 국내 유일의 3층 불전이다.

 
 
금산사노주(보물 제22호)
정확한 사용처를 알 수 없는 노주는 땅 위에 바닥돌을 놓고 받침돌을 올린 형태로 상부에 보주만 없으면 방형의 대좌처럼 생겼다.
 
금산사석련대(보물 제23호)

불상을 올려놓는 받침대로 석조연화대좌를 줄여 석련대라 부른다. 금산사 석련대는 대좌로서 규모가 큰 형태로 불상을 올려둔 흔적이 상대 윗면에 남아있다. 석련대 높이는 1.67m, 둘레 10m로 1개의 돌로 구성하면서 하대석 측면을 10각으로 깍은 후 8개면에 안상을 음각하고 전체적으로는 화려한 조각수법이 돋보인다.

 
금산사혜덕왕사진응탑비(보물 제24호)

고려 중기 승려인 혜덕왕사를 기리는 비석으로 1079년 금산사 주지를 거쳐 숙종이 불법에 귀의할 때 혜덕을 법주로 삼았으며, 59세로 입적하자 예종 6년(1111) 비를 세우면서 국사로 대우하여 시호를 혜덕, 탑 이름을 진응이라 내렸다. 탑의 머릿돌은 사라지고 형체만 알 수 있는 비문이 전해지고 있으며, 받침돌은 거북형상을 하고 있다. 비신 높이는 2.77m, 너비 1.49m이다.

 
금산사오층석탑(보물 제25호)

상. 하 2단 기단 위 5층 탑신을 올린 탑으로 탑의 6번째 층은 다른 층처럼 몸돌의 각 귀퉁이에 기둥이 새겨져 있어 탑층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다른 탑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의 탑 머리장식을 받치는 노반이다. 금산사 오층석탑은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수법을 계승하고 있지만 기단 및 지붕돌의 모습을 통해 고려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금산사방등계단(보물 제26호)

금산사 내 송대에 위치한 종 모양의 석탑으로 2단 기단 위 사각형 돌을 놓고 그 위에 탑을 세웠다. 높이 2.27m로 외형은 석종형태를 유지하나 수계의식을 집전하던 방등계단에 세워진 사리탑으로 알려져 있다.

 
금산사육각다층석탑(보물 제27호)

금산사 소속 봉천원에 있는 탑을 옮겨온 것으로 흑백의 점판암으로 만든 육각다층석탑이다. 다층석탑의 특징인 연꽃으로 장식된 다층석탑은 높이 2.18m로 조각이 섬세하다.

 
금산사당간지주(보물 제28호)

높이 3.5m 당간지주로 우리나라에서 확인되는 당간지주 중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다. 당간지주 바깥 면에 세로띠를 돋을새김하고 정상부에는 둥글게 면을 깎아내면서 당간을 고정하기 위해 3개의 구멍을 뚫어 놓았다.

 
금산사심원암북강삼층석탑(보물 제29호)

2층 기단부에 3층 탑신을 올린 총 높이 4.65m의 고려시대 석탑으로 탑신의 몸돌 네 면 모서리에 기둥을 조각하고 상륜부 머리장식을 받치는 노반이 남아있는 원형이 잘 보존된 석탑이다.

 
금산사 대장전(보물 제827호)

대장전은 불경을 보관하던 곳으로 정중목조탑이였지만 정유재란 당시 소실된 후 조선 인조 13년(1635) 복원 및 1922년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석가모니. 가섭. 아난의 제자상을 모시고 있다. 대장전은 정면 1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한 다포계방식이지만 본래 목조탑이 전각으로 변형된 건물로 지붕 위에 복발과 보주가 남아있다.

 
금산사석등(보물 제929호)

대장전 앞에 있는 석등으로 전형적인 8각 형태를 하고 석등의 보존상태가 상륜부 장식까지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1922년 대장전이 지금의 위치로 옮겨 올 당시 함께 옮긴 것으로 총 높이 3.9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