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진고속도로를 따라 장수IC 에서 내려선 후 19번 도로를 따라 가다 백두대간 영치산 산자락에 주촌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논개가 태어난 생가라 주장하는 곳은 지금 논개가 남강에 혼을 불사른 것처럼 생가도 1986년 대곡저수지가 축조되는 과정에 수몰되어져 찾을 수 없지만 인접한 곳에 생가를 복원하여 전시하여 두고 있는데 그 규모가 신사임당의 업적과 맞먹을 정도로 자리 잡고 있다.
주촌마을에서 학당을 차려놓고 아동을 훈육하는 훈장의 가업을 이어받고 살고 있던 주문달(朱達文)은 밀양박씨(密陽朴氏) 를 아내를 두고 있었는데 박씨부인 40중년인 甲戌年9월 3일 산기를 느껴 술시(戌時)에 딸을 낳으니 그때가 갑술(甲戌)년, 갑술(甲戌)월, 갑수(甲戌)일, 갑술(甲戌)시로 사갑술(四甲戌)의 특이한 사주를 타고나 사갑술에 태어났다하여 경상도 방언인 "개를 낳다"는 뜻으로 논개(論介)라 불렀다 한다. 논개나이 10살에 아버지 주문달이 죽자 논개의 숙부 주달무는 김풍헌이란 지방 유지를 찾아가 백치불구인 그의 자식에게 민며느리로 보내는 모략을 꾸미게 되자 논개 모녀는 친정인 경상도 안의현 서하면 봉정마을로 몸을 숨기게 되지만 김풍헌은 관아에 고발하여 이들 모녀를 붙잡아 추궁을 당하게 된다. 사실을 알게 된 당시 최경회 장수현감은 무고한 사람을 벌 할 수 없다며 무죄판결을 내리고 의지할 곳이 없던 이들 모녀는 현감부인 나주김씨의 수발을 들 게 되면서 최경회와의 만남은 시작된다. 최경회 부인이 지병으로 죽게 되자 선조 24년 논개는 최경회 현감의 첩이 되지만 임진왜란을 통해 선조 26년 최경회를 따라 진주성으로 나서게 된다.
1592년(선조25) 영남을 유린하고 곡창지대인 전라지역을 넘어가기 위해 하시바를 필두로 10월5일 3만 왜병이 진주성을 포위하고 공격하니 당시 진주목사인 김시민과 대치하자 최초의 의병장인 홍의장군 곽재우가 의령에서 지원하니 왜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진주성 1차 싸움에서 퇴각한 후 1593년(선조26년) 6월 가또오, 고니시, 구로다 등이 재차 2차 공격하니 병력만 10만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성 싸움에서 1차 전투의 설욕을 잔인한 피의 대가로 왜장에게 "전주성의 모든 군관민을 몰살 하라"는 명을 내렸다. 2차 싸움은 경상우병사 최경회 장군과 소식을 듣고 달려온 김천일, 충청병사 황진, 의병장 이잠, 고종후, 사천현감 장윤 등 분발하였지만 결국 성벽은 15일 만에 무너지고 함락 당하게 된다. 이 싸움에서 도원수 김명원과 전라순찰사 권율이 의령에 도착하였지만 의령 의병장 곽재우, 고성 의병장 이달(李達;1561-1618) 등 함께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1차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의병장이 왜 2차 전투에서 이처럼 방조하며 뒷짐을 지었는지 의문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의병이 왜군의 수적 우세에 기가 죽어 성안에서 죽어가는 백성을 나 몰라라 할 그런 위인은 아니지 않는가.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군의 무차별 살육이 진주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을 통해 여자들은 남강으로 투신하고 남자들은 자결하는 등 그야말로 처참한 패전의 결과를 치렀다.
진주성을 함락한 왜군은 자축연을 벌리기 위해 촉석루에서 기생을 불러다 술판을 벌리니 오늘의 여행 인물인 논개가 등장하게 된다. 논개는 진주성 2차 전투를 위해 내려온 병마절도사 최경회의 첩으로 함께 진주성으로 내려와 전투를 치루지만 중과부족으로 수세에 몰리게 되고 결국 함락 당하자 최경회는 남강으로 투신하여 스스로 죽음을 맞는다. 논개의 이야기는 최경회가 죽음으로서 원한을 갚기 위해 칠석날 치러진 연회석에 기생으로 분장하여 찾아가 왜장을 유인하여 위암(危巖/ 위험한 바위)에서 최경회를 따라 투신하니 그 죽음을 의롭게 받들기 위하여 논개 사후 전설로 떠돌던 논개에 관한 사적비와 사당을 세워줄 것을 진주에서 요청하며 구전으로 전해지던 논개의 일화는 1620년 유몽인(柳夢寅)에 의하여 비로소 활자로 새겨지니 이가 곧 문제의 어우야담(於于野談)이요, 인조7년(1629) 원성 정대륭이 위암 위에 의암(義巖)을 세기니 이를 근거로 훗날 중종1년(1721) 경상 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이 비변사에 포상할 것을 건의하고 영조 16년(1740)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가 의기사(義妓祠)를 세우고 논개추모제를 치르게 되었다. 논개 사후 무려 100년 넘게 지난 후 일이다.
현대판 논개는 영리하고 아름다운 미모를 가졌으며, 부친이 병마로 시달리자 자신의 손을 깨물어 피를 나눌 정도로 효녀이자 최경회와 함께 의병의 수발을 드는 등 참으로 많은 일을 한 것으로 그 죽음까지 왜장을 끌어안고 죽었으니 훗날 여성들이 본받아야 할 충효사상의 근본이 되는 셈이다. 어쩌면 시대적으로 여성의 힘이 필요하여 부각시켰는지 의문이 들 지경으로 19살 생애를 마감한 논개의 치사가 지나쳐 급기야 부모가 서당 훈육을 한 제법 뼈대 있는 양반 집안으로 묘사하는 등 논개를 기생이 아니라는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
최경회와 논개의 시신을 함께 운구해 올 정도로 이미 논개는 의병들조차 다 아는 사람이다? 논개하면 함께 등장하는 최경회는 그의 문중고서에도 논개가 천첩으로 기록되어져 있지만 정작 논개와 최경회는 넘지 못할 선이 하나 그어져 있다. 논개와 최경회의 만남은 장수 부임 후 민며느리로 들어가게 되어 모녀가 도망친 후 붙잡혀 관아에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최경회를 만나게 된다. 최경회의 장수 부임은 1577년으로 추정된다. 논개와 연관을 짓자면 최경회가 1589년이 되어야 된다는 주장이다. 이는 당시 장수현감 재직시 1577년이란 것은 최경회 현감의 불망비에 나타나 있다. 논개가 19살의 꽃다운 나이에 몸을 던졌으니 역으로 계산해 보면 최경희와 논개의 만남은 겨우 3살에 지나지 않으며, 논개와 함께 수장된 왜장은 누구인가? 가등청정? 아니면 가등청정의 부하 게야무라 후미스케? 하지만 아쉽게도 이날 석종로 알려진 게야무라로구스케는 진주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당시 진주성 총지휘관은 우기다 히데이에로 지금 알려진 인물들은 그저 그랬으면 하는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 향토사학자 조중화씨는 논개의 부친 주달문에 관하여 신안 주씨 족보에 주달문이 없어 논개가 주씨라는 설은 거짓임을 주장하며, 1591년 최경희가 경상 우병사로 진주성으로 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당시 경상 우병사는 조대곤이라고 주장하는 등 논개에 관한 수많은 미스터리가 가공하였다는 것으로 하나씩 밝혀지는 과정에서 진통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 히코산에 있는 논개사당 보수원의 경우는 만약 논개가 껴안고 죽은 왜장이 게야무라로구스케라면 원수인데도 불구하고 그곳에 사당을 만들 이유가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물런 일본에서도 게야무라로구스케라는 인물이 미스터리로 여러 가지 설이 있어 일본사에 가공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원수를 사랑하는 실천 사상을 받들 정도의 일본인이 아니다. 일본의 논개사당은 원수라기보다 조선에서 게야무라로구스케가 좋아한 인물로 논개를 꼽고 훗날 함께 모실 생각을 하지 않았나 싶다. 영정이 모셔진 일본 논개사당을 찾는 사람들은 이곳에 들러 기도하면 아이를 잘 낳는다는 설을 퍼뜨리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일본 보수원의 논개는 출정 나온 일본 왜장이 논개를 보고 매료되어 축하연 자리에 함께 노닐다가 의암에서 실족사 하였거나 그동안 수치심을 느껴온 논개가 결심하고 함께 죽음으로 간 것인지 아리송하게 만들고 있는 대목이다. 또한 논개의 영정은 어떠한가. 의기사에 안치되어져 있는 논개 영정은 1955년 친일화가 김은호가 그린 것으로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김은호가 그린 영정은 논개 뿐만 아니라 한산도 제승당의 충무공 이순신, 오죽헌 신사임당, 남원 춘향 등 왕실 전용 화가로 대표적인 친일파로 분류되는 인물이 아닌가. 그런데 논개의 영정보다 더한 일이 있다. 진주시와 장수군이 논개를 두고 대립하면서 양쪽의 캐릭터가 제각기 달라 논개를 상업화 해 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논개는 이미 상업화 한 중심 서 있다.
논개에 관하여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을 무렵 수몰되면서 사라 졌다는 생가는 저수지 위쪽 남향에 자리 잡고 이었는데 이번 답사 길에 입구가 막혀 살펴보니 또 옮겼다 하여 길을 따르니 이번에는 엄청난 규모의 논개 생가지를 만날 수 있었다. 한 개인의 업적을 위해 이처럼 큰 생가지를 복원한 예가 없을 정도인데 불멸의 민족혼을 내세워 엄청난 비용으로 생가 터를 단장하고 의로운 죽음이라 하여 부른 의랑루를 입구로 들어서니 논개석상과 함께 사방에 단아정과 폭포를 인공으로 조성하고 기념관과 최경회장군의 추모비, 의암 주논개 수명비가 나란히 자리 잡고 그 위편에다 생가 터를 옮겨 복원해 두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처음 복원한 논개 생가와는 전혀 딴판으로 자리 잡고 그 위로 논개의 부모 묘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데 웬만한 가야시대 무덤 하나를 보는 듯하다.
논개가 기생이 아니라는 점을 애써 확인시켜주려는 흔적들은 오히려 반감을 사기 충분하니 어찌된 영문인가. 논개의 신분을 두고 기생이라고 기록된 것은 일제가 역사 왜곡을 통해 만들어 낸 거짓이라고 하며 각종 문헌을 증거로 제시하지만 뚜렷한 해답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말할 논(論) 끼일 개(介) 즉 논하는 자리에 끼일 수 있다는 논개는 정작 이름이 아닌 기생의 이름이 아닐까 싶다. 논하는 자리에 끼일 수 있을 정도의 기생 논개라면 막 기생으로서 신분보장을 받는 그런 정도가 아니었을까? 부모가 딸을 낳아 당시 작명을 하여야 한다면 여성신분으로서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태어나자마자 작명을 하였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부분들이다. 아버지 주달문은 딸에게 사갑술(개해, 개달, 개날, 개시)의 뜻을 개를 낳는다는 것으로 해석하여 경상도 방언(方言)으로 "개를낳다"라는 뜻이 담긴 논개(論介)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하는데 전라도에서 경상도 방언을 사용했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지 않는다. 논개의 이름을 두고 일부에서는 또 다른 설을 주장하는데 당시 논개는 조선에서 사용된 이름이 아니라 일본식 이름으로 말 잘하는 여자라는 것이다. 논개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면 성이 "주"씨로 기록된 예가 없다. 하물며 조정에 논개의 업적을 포상해 줄 것을 요구할 때도 "논개"였지 "주 논개"가 아니라는 점이다. 논개의 태어난 사주팔자는 논개의 이름을 기생이 아닌 양반집 규수로 만들기 위해 억지로 짜 맞춘 모습이 역력하고 보면 논개는 기생신분이 정답이라고 볼 수 있다.
어우야담에 의하면 논개는 진주 관기였다고 기록되어져 있지만 논개가 죽은 백년 후 진주 선비들이 조정에 사적비와 사당을 세워줄 것을 청하고 의기사가 만들어 진다. 의기사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의로운 기생"으로 분명 신분을 확인할 수 있지만 의기사는 시대를 달리하면서 기생신분을 벗게 되는데 그 과정은 의기사를 순조때 중건하는 과정을 통해 의랑사(의로운 낭자의 사당)로 바뀌게 되지만 6.25전쟁 후 다시 복원하는 과정에 "의기사"로 다시 기록된다. 의기로 기록된 부분은 어유야담 뿐 아니라 영조때 만든 여지도서와 순조때 만든 진주목읍지에서도 논개는 진주의 의기로 기록되지만 기생신분이 최경회의 후실인 첩으로 기록되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 기록을 살펴보면 최경회 사후에 영부사 김재로가 최경회의 포상을 호남 절의록을 근거로 1751년 건의하게 되며, 해주최씨 문중의 일휴당실기에는 "공의 부실이 공이 죽던 날 좋은 옷을 입고 강가 바위에서 거닐다가 적장을 유인해 끌어안고 죽어 지금까지 사람들은 의암이라 부른다고 기록되어져 있다. 술판을 벌려 왜장을 껴안고 죽었다는 부분과는 정면 대치되는 기록이다. 다시 진주성으로 찾아가 보자. 진주성이 유린당하던 임진년(1592) 2차 공격으로 성이 함락되자 7만여 명의 민. 관. 군이 순절하게 된다.
조선실록은 성안에 죽은 자가 6만, 8만, 등 제각기 주장이 달라 감사 김늑이 사근찰방 이정을 시켜 조사하니 성 안에 1천여구의 시체와 촉석루에서 북안까지 시체가 서로 겹쳤으며, 청천강에서 옥봉리, 천오리 까지 죽은 시체가 떠내려갔다고 한다. 성이 함락된 뒷날 축하연 자리에서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뛰어드니 이것이 구전으로 전해지기 시작하였고 논개 사후 28년(1621)에 유몽인이 어우야담을 통해 구전을 정설로 만들 게 된다. 어우야담을 말 그대로 구전이나 설화를 근거로 하고 있어 그 정확성은 과장되거나 지나친 표현이 많은 법인데 우선 논개를 두고 관기로 지칭한 최초의 문헌이다. 어우야담은 인륜, 종교, 학예, 사회, 만물 등 총 5편으로 논개는 그 중 인륜편에 올려져 있다. 인륜편에는 효열, 충의, 덕의, 은둔, 혼인, 처첩, 기상, 봉우, 노비, 배우, 창기로 세분화 되어 있는데 관기라고 표현하면서도 창기조가 아닌 효열조에 실려 있어 고개를 꺄우뚱하지 않을 수 없다.
진주 관기 논개라면 분명 창기조에 삽입되어야 마땅하거늘 효열조에 삽입된 것은 왜장을 껴안고 뛰어든 그 사실을 크게 인정해준 부분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면 효열조보다 충의조가 어떨까 싶다. 논개가 충의조나 창기조에 실리지 않은 것은 비록 관기 신분의 첩이지만 최경회를 따라 왜장을 껴안고 부군의 죽음에 대한 원수를 일부 갚았다는 이유에서 효열조에 삽입되지 않았을까? 일단 창기조에 실리지 않은 사실만 가지고도 논개는 기생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부분이 생겨 날 수 있지만 분명 어우야담은 진주관기로 못 박고 있다. 흔히들 논개의 죽음은 최경회의 후실로서 축하연에 일부러 기생으로 위장하고 들어가 왜장과 함께 죽었다 말하지만 그것 때문에 기생으로 기록된다는 것은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논개라는 이름이 말하듯 논하는 자리에 끼일 수 있는 논개라면 이름만 보아도 기생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의기로 기록되는 부분은 나라에 올린 순국사실의 장계를 비변사에 고할 무렵 의기로 표현하여 장계를 올렸다.
그날의 축하연 자리로 찾아가 보자 . 의암 주변에 흥건하게 취한 왜군과 그들 틈에서 술시중을 드는 인근의 기생 또는 겨우 살아남은 여자들이 붙잡혀와 위협 속에 왜군의 비위를 맞추면서 흥을 돋우던 중 유독 한 여인이 나서 왜장을 꼬드기니 그가 논개라……. 논개의 자태에 빠진 왜장하나가 달려들어 논개를 유혹하니 의암에서 둘은 이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논개가 죽었다는 것을 본 사람은 그날 참석한 여자들뿐이다. 어떤 이유로 빠졌는지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라는 점으로 볼 때 기생들에 의하여 전해진 구전은 상당 기생에게 유리한 쪽으로 말이 전해지기 마련이다. 의암에서 사라진 후 장수의병들이 논개와 최경회의 시신을 수습하여 한여름 야밤을 통해 220리 길을 운구하다 신안주씨 선조들이 묻혀있는 경상도 안의현 서상면 방지마을 당산 골짜기에 묻었다고 한다.
논개가 껴안고 죽은 왜장이 상당 높은 직책으로 구전되어 온 것으로 가정해서 재현하여 보자. 왜군들 무리에서 나가선 왜장이 논개와 함께 의암에서 떨어지니 그 순간 술판은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왜장을 구하려고 달려드는 수하의 군사들이 강속으로 뛰어들고 두 사람의 시체를 찾기위해 밤새 남강 일대를 뒤지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정석이다. 왜장이 물에 빠졌는데 가만있을 군졸이 어디 있겠나. 또한 가락지 열 개를 이용하여 허리춤을 단단히 꺾어 껴안으니 쉽게 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두 사람이 껴안고 죽은 시체를 의병이 찾아냈다는 것조차 이해가 쉽지 않다. 당시 시체가 서로 겹쳐 남강을 뒤덮고 있었던 상황으로 보아 시체를 찾는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과 뭐 다를 봐 있겠는가. 또한 왜군이 먼저 찾아내었다면 논개의 시체를 가만 두었겠는가? 왜군의 잔인한 성격으로 보아 십중팔구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게 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논개의 죽음에 관한 의혹은 이 뿐만이 아니다. 논개가 참석하였다는 축하연의 장소를 떠올려 보자. 남원전투에서 알 수 있듯 진주성 역시 전세가 불리하자 군량미와 무기고를 불태우고 싸우는 과정에 촉석루도 성치는 않았을 것이며(기록에 의하면 불타 버렸다고 한다), 2차 전투기간이 장마라 강물은 불어나 피범벅과 함께 남강을 노을지게 하였을 것이다. 그런 곳에서 축하연을 베풀었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논개가 껴안고 죽었다는 일본 왜장에 관하여 한 가지 기록을 덧붙여 보면 어우야담 필사본에는“獨一倭挺然直進論介笑而近之倭將誘以引之(유독 한 왜병이 당당하게 앞으로 나갔다. 논개는 미소를 머금고 이를 맞이하니, 왜가 장차 그녀를 유혹하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왜장도 아닌 왜병이다. 또한 활자본에는 獨一倭부분이 獨一將로 바꾸어져 있다. 누군가 조작한 흔적이다. 왜병을 껴안고 논개가 죽었다는 기록을 왜장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서 논개의 위상을 치켜 올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논개와 최경회를 따라가 보자. 1750년(영조 26년) 3월 25일 영부사 김재로가 최경회 장군의 시호를 윤허 받게 된다. 보편적으로 시호는 조정에서 먼저 하사하는 것이 관례인데 최경회의 경우는 이와 반대로 조정공론을 모우기 위해 김재로의 노력이 엿보인다. 조정에서 시호를 내리기 위해 조사를 하는 과정에 최경회의 현손인 최급이 권적에게 최경회의 행적이 담긴 경상우병사 증좌찬성 최공청시행장을 건네주었다. 그 공적내용 중 "그의 천첩은 공이 죽던 날 몸단장을 곱게 하고 강 중의 암석에 왜장을 유인하여 함께 죽었다. 지금 사람들이 의암이라 칭하니 역시 열렬하도다"라며 논개를 삽입해 놓았다. 천첩이 논개인지 아닌지는 알길이 없지만 호남절의록에서부터 기생 논개는 장수인으로 공이 좋아했다며 천첩이 논개임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전첩이 의암에서..라는 부분으로 논개를 두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좋던 싫던 논개는 이때부터 최경회의 천첩 또는 부실로 최경회를 따라 등장하게 된다. 1799년 호남선비가 만든 호남절의록에 보면 논개는 장수인으로 알려져 있고 1872년 호남읍지에는 풍천태생으로 기록하지만 정작 풍천마을이 아닌 대곡리 주촌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하는 것은 1954년 의기창렬회가 만든 의랑논개비 후면에 새겨진 사연이라는 글에서 논개는 전라도 장수 주촌 출신이며, 성이 주씨라고 기록되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 기록에 관한 정확성 여부는 없다. 논개의 출생에 관하여 한결 같이 의랑논개비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은 매우 유감스럽다. 1593년 논개가 남강에 몸을 던진지 무려 몇 백 년이 지난 후에 어찌 논개의 성이 주씨이며, 고향이 그 이전 기록에는 풍천으로 알려져 있는데 무슨 이유로 주촌으로 기록되어졌는지 말이다. 여기서 한술 더 뜨는 것은 북한에서 논개는 순창출신이라고 주장하는 부분이다. 논개에 관하여 이처럼 소문만 무성한 이유는 뭘까? 논개가 기생신분임을 억지로 감추려는 과정에서 이 같은 불합리한 주장이 난무하지 않나 싶다.
기생은 자신의 출생신분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오직 자신만 알 뿐이다. 만약 논개가 주씨의 성을 가진 주논개라면 분명 고서 어디에라도 주논개라고 기록되어져 있었을 것이지만 오르지 논개로만 통한다. 말 잘하는 여자 논개... 우리는 지금 관광 상품으로 전략한 논개를 두고 차라리 논개는 없다고 주장하고 싶을 뿐이다. 오빠로서 대룡이 있었지만 논개가 태어나기 이전 15살에 괴질로 사망하였다고 전한다. 이는 남아사상을 고집하던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논개에게 오빠가 하나 쯤 있어야 이야기가 성립되기 때문에 오빠가 등장하지만 논개와 나이가 엄청난 차이를 보이면서 결국 죽음으로 사라진다. 오빠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훗날 조정에서 포상하려 할 때 일가를 찾게 되는데 만약 가족이 있다면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논개와 최경회의 나이만 살펴보아도 논개 출생이 1574년, 최경회가 1532년 벌써 42살의 차이가 난다. 최경회의 부실 무렵이 14살로 본다면 56살로 소설 같은 이야기 일색이다. 또한 장수현감으로 있던 선조10년(1557)이라는 주장은 논개 나이 겨우 4살이라는 것이다. 최경회가 장수현감 재직 시기는 1577-1579년으로 최경회 행장인 일휴당실기에는 당시 영해부사로 기록되어져 있는가 하면 논개가 재판을 받았다는 나이가 5살과 13살이라는 설이 있다. 어찌되었던 논개와 최경회 장군은 뭔가 맞지를 않고 있다. 신분변화를 살펴보면 1621년 어우야담에서 진주관기로 기록된 이후 1651년 오두인의 의암기, 1721년 비변사 신보, 1722년 정식의 의암사적비에 계속 의기로 기록되다. 1740년 박태무의 의기전에는 의기로 기록된다. 1780년 정약용의 진주의기사에서는 오늘날 명칭의 논란이 되는 기생으로 기록되어지면서 논개는 의기, 관기, 기생 등으로 불리고 있다. 논개의 기록은 설화집인 호남절의록, 호남상강록, 호남읍지, 동감강목, 매천야록, 일휴당실기, 고노상전이 바탕이 되고 있는데 경종1년인 1721년 공식적인 의기로 호칭이 내려진다.
논개의 초상권은 대표적인 친일파 김은호가 그린 그림이다. 의기사에 봉안된 논개영정은 초상화의 대가로 대동아 전쟁 비용 충당을 위해 골몰하는 조선총독에게 조선여성의 상징인 비녀, 반지 등을 헌납하는 모습을 담은 "금차봉납도"를 그린 친일파로 이승만 대통령이 복원하는 진주 촉석류에 들러 논개의 영정이 없는 것을 보고 자신이 선물 받은 미인도를 선물하게 되었는데 그 문제의 그림이 1856년 전북출신인 정치가가 김은호에게 의뢰한 미인도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제삿날은 또 어떠한가. 죽음은 하나인데 제삿날은 제각기 달라 논개의 혼백이 바쁘게 생겼다. 논개의 죽은 진주 남강에서 투신한 그 날로 추정할 필요도 없지만 그 날짜마저 오락가락하니 참으로 기가 막힐 지경이다. 진주시 여성단체는 1980년 7월 7일에 논개제향을 지내다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뛰어든 음력7월7일인 것이다) 진주성이 함락된 음력 6월29일에 승전연이 베풀어 졌다는 새로운 주장 속에 음력 7월7일에서 6월 29일로 변경된다. 정확한 날짜를 찾지 못한 측에서는 유교적 사상을 바탕으로 사망한 날짜를 모를 경우 음력 9월 9일 날 지낸다 하여 1992년부터 음력 9월 9일 날 의암별제가 개최하고 있다. 이와 달리 장수군은 논개의 출생일인 9월3일 날 제사를 지내는가 하면 지역주민은 7월7일로 논개사당에서 제사를 지낸다니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논개의 묘역도 과연 그 안에 논개가 모셔져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단지 의병들이 이곳에 옮겼을 것이라는 추정으로 만들어진 묘역은 앞쪽에 큰 것이 논개의 무덤이고 뒤쪽에 최경회장군의 묘가 있다. 실로 엄청난 규모의 묘역을 단장하여 논개를 부각시키고 있음이 안탑깝다.
결론 : 논개는 없다. 아니 논개는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논개는 없다.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논개는 미화되고 각색되어 이미 논개 정신을 잃어버린 껍데기에 불과하다. 논개를 찾아 여행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왕릉처럼 꾸며진 논개의 묘는 최경회 장군보다 더 큰 봉건을 자랑하고 있는가 하면 논개 생가는 말이 생가이지 여태껏 보도듣도 못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논개는 기생이었다. 지금처럼 박식하고 능력 있는 집안의 고귀한 딸이 아니라 진주관기로 어디출신인지는 정작 논개만 알고 있다. 논개라 불리운지도 얼마 되지 않았나 싶다. 논개가 말 잘하는 아이라는 뜻이고 보면 이제 갓 기생으로 인정받은 것이 아닌가. 진주성이 함락되자 논개는 의암에서 자신을 희롱하는 왜군하나를 끌어안고 의암에서 뛰어 내렸을 것이다. 그리고는 도도한 남강 물에 자신을 맡겼으리라. 논개가 죽자 인근에 있던 기생들이 놀라 안절부절못하였을 것이다. 그 뒷날로부터 진주에는 논개라는 기생이 왜군을 껴안고 뛰어들었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였고 입에서 입으로 전하면서 저마다의 염원을 덧붙여 전했으리라.. 그러다 보니 일본의 유명한 장수는 다 논개 품에서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논개가 죽은 후 진주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논개를 추켜올려 조정에 건의 하였고 조정에서는 반응이 없자 논개를 더욱 신비롭게 만들어서 재차 건의하는 과정을 통해 최경회 후손이 진주성에서 뛰어내린 논개라는 부분을 착안하여 논개를 은근슬쩍 천첩으로 기록하여 최경회의 공을 치하하게 하지 않았나 싶다.
논개가 뛰어 들었다는 의암은 당시 홍수로 물이 불어 그곳에 올라서기도 힘들지 않았나 싶다. 또한 그곳에서 주연을 베풀었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말이 안 된다. 장소도 협소하거니와 피내음 가득한 남강을 코앞에 두고 황톳물 넘실거리는 의암주변에서 술판을 벌릴 필요가 있겠는가? 꼭 술판을 벌리려면 그곳이 아니라도 넓은 장소가 얼마든지 있는데 말이다. 또한 많은 사람이 있는 가운데 물에 뛰어 들었다면 물에 빠진 논개와 왜군을 쉽게 건져 올릴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그 당시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논개가 물에 빠진 것은 그날 누군가 보았거나 일본인에 의하여 구전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논개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없는 작금에 논개를 성역화 시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 아닐까 싶다. 어찌되었던 그날 의암주변에서 누군가 왜군과 함께 물에 수장되었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 이후의 기록은 세월 속에 하나씩 덧 붙여졌으리라고 본다. 논개... 왜군의 수모를 피하기 위함이었는지, 원수를 갚기 위함이었는지 모르지만 논개는 죽음 이후 진주 기생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임은 당시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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