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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워킹 태화강 첫번째 길 - 선사문화길

허영꺼멍 2011. 4. 29. 22:28

 

 

 

 

스토리 워킹 태화강 첫번째 길-선사문화길

천전리각석에서 반구대 암각화는 2.4km 산길을 따라 산책을 하며, 옛 선사시대 이야기룰

나눌 수 있는 자녀와 함께 여행하기 좋은 코스이다.                                                  

 

여행의 시작은 대곡댐을 만드는 과정에서 수몰된 마을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유물을 전시한 대곡박물관에서 주차를 하고 출발 또는 천전리각석에서 시작

하면 된다.                                                                                                       

 

1999년~2004년에 걸쳐 발굴조사 후 2005년 유물을 체계적으로 전시할 필요성을 느껴 20

07년 10월 착공을 시작하여 2009년 준공 2009년 6월 24일 개관, 1층은 제1전시실, 체험학

습실,기획전시실을 두고 2층은 로비전시실, 제2전시실, 시청각실을 야외에는 하삼정유적

의 무덤을 조성해 놓았다.                                                                                    

 

대곡리 박물관을 떠나 대곡 천전리 각석에 도착

대곡리 박물관에서 유물을 관람하고  5분 여 계곡길로 접어들면 천전리 각석 계곡을 만

나지만 주변에 주차시설이 변변치 않아 갓길에 주차하고 천전리 각석으로 향한다.       

 

 

고대미술관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울주 천전리 각석은 국보 제 147호로 1970년 12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암각화 유적

이다. 천전리 암각화는 대곡천변에 있는 바위면을 다듬어 새겼는데 약 15도 가량 경사진 형

태의 바위면에  각종 동물모양과 동심원, 나선형, 음문, 마름모와 추상적인 문양,  역사시대

에 새겨진 돞을 단 배, 말과 용 등의 가는 선 그림, 신라시대 명문 등이 새겨져 있다.          

 

신라시대로 추정되는 날카로운 금속도구를 이용하여  그어서 새긴 암각화는  " 말을 끌거나

타고 있는 인물상, 돛을 단 배, 말 등의 행렬" 을 이루고 있으며, 용 그림 등도 확인되는  고

대 미술의 진수를 만나게 된다.                                                                               

 

 

신라시대 명문은 을사, 기미 등을 통해 6세기 초의 기록으로 추정되며, 명문은 크게 법흥왕

동생인 사부지갈문왕이 을사년(525년) 6월18일 새벽에 천전리로 놀러와 새긴 것과, 사부지

갈문왕 부인 지물시혜가 남편이 죽자 그리움에 사무쳐  그의 흔적이 남은  천전리계곡으로

어린 아들(후의 진흥왕)과 함께 찾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천전리 각석은  바위 위나 큰 절벽, 동굴 안 벽면 등에 사물이나 기호를 쪼기, 새기기, 칠하

기 등의 기법으로 그린 그림을 바위그림 즉,  암각화라 부른다. 바위그림은 후기 구석기 시

대의 유적에서도 발견되지만,  전형적인 사례들은 신석기 및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주로 확

인되고 있는 풍요와 다산 제의의 산물로 이해하고 있다.                                              

 

삼국시대 성지 천전리각석을 가로 지러는 대곡천은  선시시대로 부터 오늘날 까지 역사와

문화가 흐르는 하천으로 한국 아름다운 하천 100경에 포함될 만큼 맑고 깨끗한데  대곡천

물길을 따라 천전리각석 및 반구대 암각화가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 관심을 유발하게 한다

 

 

중생대 백악기 퇴적암류인 자색셰일층인 각석은 너비 9.5m, 높이 2.7m의 큰 암벽과 그 옆

으로  작은 암벽 전면에 새겨놓은 암각화 중  제일 큰 암반면은 상단과 하단으로 다소 다른

모습의 기하학적 문양이 확인되고, 그 중에서도  신라 화랑도가 각석 위 또 다시 그들의 흔

적을 남겨놓아 시대를 달리하면서 추가된 암각화로 역사적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또한 여수 오림동에서 확인된 사람모양을 제외하고  우리나라 암각화에서는  거의 사람을

찾아보기 드문데 이곳 천전리각석과 반구대암각화에 확인이 되고 있으며,  화랑도가 그린

그림은 날카로운 철재류를 이용하여 가늘게 그린 반면 화랑도를 제외한 그림은 선이 굵고

정교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화랑도 그 이전 날카로운 도구가 없던시절로 추정할 수 있다. 

 

 

신라 화랑이 무술을 연마 하면서 남겨놓은 흔적으로 행렬도와 다양한 그림 그리고 글씨(명

문)들로 글씨를 통해 화랑이 무술을 연마하는 이곳을  왕과 왕비가 행차 후 기념으로  기록

한 암각화를 보면 을사년(법흥왕 12년/525)에 갈문왕이 이곳을 유람할 당시 이름이 없

어 "서석곡"이라 부르고 글자를 적게 하자 사각형의 책모양을 만들고 300여자를 통해 당시

근황을 옮겨 놓고, 그 후 갈문왕 사후에 지몰시혜비가 그리움에  글씨를 남긴 곳을 찾아 기

록을 남긴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화폭에 담겨질 정도로  울산에서 뛰어난 절경을 자랑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천전리각석의 그림을 살펴보면 동심원은 모두 3개이며, 마름모꼴은 암면 곳곳에 있고. 선

이 지워져 버려  희미한 것부터 뚜렷한 것 까지 다양하지만  전체적으로  하나의 마름모는

연결되기 어려워 보이지만 일부 학자는 전체적으로 연결된 마름모도형이라고 주장한다.  

 

 

 

 

 

 

 

 

암반 제일 윗부분에는 많은 마름모가 일렬로 연결되어 있고 짐승과 기하학적 문양이 교차

되거나 독립적으로 자리잡고 중간 중간 동심원을 넣었는데 사람의 키가 닿는 크기 정도의

암벽에 집중적으로 새겨놓았다.                                                                             

 

 

 

 

 

계곡에 물이 돌아가면서 C 형태로 물길이 형성되어 있는데 오른편 돌출 암반층이 천전리각석

이며, 왼편 평지 바위층이 천전리 공룡 발자국 화석이 산재해 있는 곳이다.                         

 

 

 

천전리각석을 여행하고 다시 진입로에서 건너편으로 향하면 공룡발자국 화석산지에 도착을

하게 된다.                                                                                                            

 

 

천전리 공룡발자국 화석은 울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 6호로 약 1억년 전 전기 백악기 시대에

중대형 공룡의 발자국으로 울트라사우르스 급인 한외룡을 비롯 용각룡 열마리의 발자국,  중

형 초식공룡인 조각류 이구아나룡에 속하는  고성룡(고성사우르스) 한 마리의 발자국 등 200

여 발자국이 흩어져 있다.                                                                                         

 

 

 

선사시대로 거슬러

 

공룡발자국을 여행 후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트레킹 코스를 따라 선사시대로 삼국시대로

옛 흔적을 따라 계곡 옆으로 난 코스를 따라 반구대 암각화로 향한다.                         

 

 

 

 

 

 

 

 

 

 

 

 

 

천전리각석에서 반구대 암각화로 향하는 길을 따라 걷다보면 주변에 다양한 꽃과 새들을

만날 수 있다.                                                                                                    

 

반구대암각화로 가는 길목에서

 

숲길을 빠져 나오면 건너편으로 고래형상 지붕을 하고 있는 반구대박물관이 나온다. 우선

박물관에 들러 암각화 조형물을 먼저 관람하는게 좋다. 정작 반구대암각화에 도착하면 그

림을 볼 수 없기 때문.. 암각화 박물관을 암각화 앞에 조성했음..                                  

 

 

 

집청정은 원래 고려 말 정몽주(1337~1392)선생님께서 한번 시를 쓴 후, 이름난 구역이 천고에

깊이 감추어진 것을 애석히 여긴 경주최씨의 정자로 운암 최신기가 세운 정자로 세월이 흘러

최신기의 14대자손(장손 최원식)들이 한국 효 정신을 가르치는  예절방으로 장소를 제공하여

집청정을 활용하고 있다.                                                                                            

 

 

 

 

 

 

반고서원유허비(3기)는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3호로 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1337~

1302)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있다. 포은 선생은 고려 우왕 2년(1376) 성균관 대사성의 벼슬

에 있으면서 중국 명나라를 배척하고 원나라와 친하게 지내려는 외교정책에 반대하다 이곳

에 1년 가까이 귀양살이를 하였는데 반구대에 올라 시를 짓거나 하여 훗날 이곳을 "포은대"

라 부르기도 하였다 한다.                                                                                       

 

숙종 38년(1712) 언양지역 읍생들이 포은 정몽주, 회재 이언적, 한강 정구 세 분을  추앙하

고자 세운 서원이 반고서원으로 고종 8년(1871) 홍선대원군의 명으로 서원은 문을 닫게 되

었으나 훗날 지역유림이 1885년, 1890년, 1901년 등 3기의 비석을 세웠고 1965년 오늘날 위

치로 옮겨졌다.                                                                                                    

 

 

 

 

울주 대곡이 연로개수기는 차 한대가 겨우 너머 갈 수 있는 벼랑길 언덕에 위치해 있다.   대

곡천 가장자리 바위 면에 새겨진, 일종의 마애기로 훼손이 심한 편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명

문을 통해 길의 이름이 연로였다는 것과 더불어 1655년 이전에 이미 길이 개설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옛 지명 연로는 벼루길로 주변 바위가 벼루처럼 미끄러운 바윗길, 벼루에서 음차 한

벼랑길, 사대부들이 수시로 드나들던 학문길 등의 의미로 해석 할 수 있다.                       

 

 

계곡 바위를 잘 살펴보면 비석이 새겨져 있다.

 

 

 

 

 

 

반구대암각화로 향하는 다리를 건너 대나무 숲 아래길로 내려서면 대곡리 반구대 공룡

발자국 화석산지로 내려갈 수 있다.                                                                    

 

 

대곡리 공룡발자국 화석은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 13호로 약 1억년 전의 전기 백악기

시대에 하천평야지대에 살았던 공룡의 발자국으로  용각류 팔용과(Brachiosauridac) 에

속하는 60톤급 공룡과 조각류 이구아나과에 속하는  고성룡족 등 24여 개 발자국이 경상

계 하양층군 사연리층 중회색 사질이암층에서 확인되고 있다.                                   

 

 

 

 

 

태화강의 물줄기 대곡천 중류 기슭 한반도 암각화를 대표하는 경남 울산시 반구대 암각화는

현재까지 밝혀진 자료만 무려 75종 200여점으로  다양한  당시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 대백

 과사전이다.                                                                                                           

 

암각화는 가로 8m, 세로 2m, 높이 3.6m의 암면에 "ㄱ"자 형태로 1965년 울산시의 공업용수

공급을 위해 사연댐을 만드는 과정에 물속으로 수장되어 인근의 천전리각석 보다 훼손이 덜

한 상태로 고래, 개, 늑대, 사슴, 호랑이, 여우, 곰, 멧돼지, 토끼, 여우, 거북, 물고기, 사람이

새겨져 있는데 암각화를 세분화 하면 동물 중  멧돼지의 교미중인 모습과 임신한 모습, 성기

를 노출한 사람, 그물에 걸려든 고기,  작살에 찔린 고래, 내장을 그린 모습, 탈을 쓴 무당 등

당시의 시대상을 윤곽선을 돌출하기,  안쪽 파내기를 통해 입체적으로 쪼아낸  흔적을  통해

 더욱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특히 암각화 중 고래가 유독 많이 그려져 있는데 단순한 고래가 아니라 다양한  고래종류를

새겨 놓은 것으로 지금은 찾기 힘든 향고래를 2마리 새긴 것은 학술적으로도 중요한 자료이

며, 다양한 방법으로 고래를 포획하는 장면은  선사시대에 이미  장승포 부근은 고래잡이가

성행하였음을 말해주며 우리나라가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고래잡이를 하던 포경국가 이었

음을 말해주고 있다.   부산 영도구 동삼동패총에서도 고래 뼈가 조개더미에서 발견과 함께

기원전 6000년 도구를 이용하여 포경을 하였음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암각화이다.             

 

고래는 북방긴수염고래, 흑등고래, 귀신고래, 범고래, 돌쇠고래, 돌고래, 향고래 등으로 우

리나라를 회유하는 고래가 주종을 이루며, 추가로 발견된 암각화를보면 동일 크기의 두 마

리 고래와 누워있는 호랑이 그림으로 고래2점, 호랑이 2점, 사슴 1점, 인물 1점 등 6점이 추

가 되어 세계 암각화에서 가장  표현력이 뛰어나고 고래 종류까지 파악되는  유일한 암각화

로 알려져 있다.                                                                                                    

 

반구대 암각화에서 고래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다.  그만큼 암각화에  50여 마리에 이르는

고래의 다양한 모습이 놀라움 그 자체로 고래의 종류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고래수

염과 이빨, 머리모습, 등지느러미 등 상세한 기록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귀신고래는 목 아래 짧은 홈을 25개 표현하였고, 혹동고래는 폭이 넓은 주름을 그렸으며, 북방긴수염고래는 수증기를 내 뿜고, 향고래는 사각형의 머리를, 범고래는 등과 배를 암각 돌출로 명암을 주었는가 하면, 돌쇠고래는 등지느러미를 앞쪽에, 돌고래는 등 중앙에 지느러미를 상세하게 새겨놓고 고래 등에 새끼를 업고 다닌다는 암각화는 새끼라는 표현보다는 지나가는 큰 고래 위에 작은 고래가 지나가는 모습을 수면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 아닐까 싶은데 그 이유로는 새끼를 등에 업고 다니는 고래로서 돌고래에 속하는 살쾡이가 있지만 고래 그림은 앞면 주둥이가 상당히 뾰족하다는 점으로 미루어 살쾡이는 머리가 둔탁한 모습을 한 둥근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고래가 새끼를 업고 가는 것은 해당되지 않고 임신한 고래로 상상한다는 것은 고래 머리에 새끼를 임신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상식선을 벗어나는 것으로 수면 위에서 아래로 본 고래의 모습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울산에는 많은 고래가 살았던 것으로 짐작하게 하는 암각화로 1899년 근대포경의 역사가 열리지만 이미 앞선 시대에 무기를 가지고 고래를 잡았던 것을 증명하고 있다. 한반도 포경은 경남 거제도, 장생포, 함경도, 강원도에서 포경업이 1947년까지 성행하였지만 미국의 압력에 의하여 1978년 국제포경위원회인 I. W. C에 가입하며 고래잡이는 중단되고 동해 앞바다에는 고래가 거의 멸종위기에 처했다.

 

사냥모습 중 그물을 둘러쳐 놓고 주변에는 바다거북이가 몰려다니는 모습은 그 당시 그물을 사용하여 타원형으로 감싸 안으면서 고기를 잡는 지금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는가 하면 말목을 쳐서 잡는 모습은 남해군 창선 바다에 아직도 남아있는 죽방렴을 떠올리게 하는 등 당시 어업을 떠올리게 하며, 고래를 잡기위해 배에 승선한 인원이 대략 10명으로 파악되고, 사냥했던 배는 선채가 높게 추켜올린 모습으로 같은 시기에 나타난 일본과 노르웨이 고기 잡는 암각화의 배 모습과 크게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특히 같은 어업권을 놓고 고래를 잡았을 것으로 보이는 일본의 경우도 배 모습이 우리와는 딴판인 점으로 미루어 두 나라 간에 서로 고래잡기 위해 영역싸움은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암각화 중간 중간 그려진 사람은 사냥을 하는 모습으로 활이나 창을 이용하여 동물을 잡는 모습은 그 당시 수렵생활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표현 된 사람 중에서 나팔을 부는 듯 한 모습과 활을 쏘는 모습 그리고 가면(방패)가 나오는데 가면으로 알려진 것은 사람의 얼굴 윤곽을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세모형태 인 것으로 보아 방패일 가능성이 높고 가운데 사람의 얼굴 윤곽만 나와 있는 것 역시 방패를 그린 것으로 추정한다면 당시 창과 활을 가지고 사냥을 떠나면서 사냥감을 모우는 나팔수가 계속 나팔을 불어 동물들을 이동하게 만들고 방패를 보호 삼아 동물을 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대적으로 보면 바다에는 고래가, 육지에는 사슴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즉, 신석기에 많이 발견되는 종임으로 보아 신석기 시대로 추정을 할 수 있지만 단정 짓기는 곤란하다. 그 이유는 신석기 당시 금속도구를 이용하여 고래를 잡는 긴 작살과 창을 만들 수 있었나 하는 의문 때문이다. 이와 함께 암각화에 나타나는 그림은 육지와 바다 등 무질서하게 배열되어 있는데 이것은 한 사람이 며칠 만에 그린 암각화가 아니라 오랜 시간을 두고 추가적으로 그려 넣은 그림으로 짐작 할 수 있다. 어쩌면 당시 사냥을 하고 돌아와 그 현장을 기록한 일기장과 같은 역할이 아닐까 추론해 본다.

 

 

 

 

 

 

 

우리나라의 포경역사를 말하려면 동해바다에서 큰 고래가 회유하는 장면을 쉽게 목격해야 되지만 어디를 찾아봐도 우리나라에 고래에 관한 최근 기사가 없다. 단지 그물에 걸려 붙잡혀 끌려나온 고래나 간혹 무리에서 이탈한 고래가 육지 가까이서 발견되는 것이 대부분으로 그것조차 가뭄에 콩나듯 어렵게 접할 수 있는 것이 고래이기 때문에 감히 우리나라가 포경국가라고 한목소리 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반구대암각화에는 선사시대 당시로 추정되는 엄청난 암각화가 벽면을 자리 잡고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해 주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그려진 암각화가 고래라는 점과 고래의 종류가 정확하게 분간된다는 점은 이미 오래전 우리나라는 포경국가의 선두주자였을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고래암각화는 세계에서 몇 곳 발견되지 않는다. 그 중에서 노르웨이, 일본이 있지만 고래그림은 겨우 몇 마리에 불과하며 그 종류도 알아보기 힘들다.

 

 

선사시대를 거슬러 올라오면서 우리는 고래를 통해 아이를 낳고나면 미역국을 먹는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우리나라를 회유하는 대부분의 고래가 동해안 해안에서 새끼를 낳고 바다속 미역 해초를 먹는 모습을 보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출산 후 미역을 먹는 나라가 되었지만 고래는 어부로부터 천대받기 시작했다. 고래를 잡으면 나라에 진상하거나 높은 양반이 고래 해체작업을 시키는 노동 때문에 고래잡이는 힘든 일로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고래를 잡지 않으니 동해는 많은 고래가 확인되었고 외국인 눈에는 그것이 곧 돈이었다. 1899년 일본 나가사끼항에 있던 러시아 태평양포경회사(께이제를 링그 백작 설립)는 장생포에 고래 해체장을 만들고 고래를 포획하기 시작한 후 러일전쟁으로 러시아가 패하자 일본이 러시아를 대신하여 1905년 국내 포경업을 독점하고 동해안의 고래를 마구잡이로 포획하였고, 해방과 함께 일본인에게 월급대신 받은 포경선을 이용하여 만든 조선포경회사 및 1962년 포경조합 설립(11개 회사)을 하였지만 1978년 미국을 비롯한 축산대국은 국제포경위원회인 I. W. C 가입을 압력행사하기 시작하였고 1982년 제3차 I. W. C에서 일시적 상업포경금지를 통과시킨 후 1986년 1월 1일부터 5년간 상업포경 전면금지 모라토라움을 선언한 후 지금까지 상업포경은 재개되지 않고 있다. 이와 반대로 우리나라의 고래를 멸종단계로 만든 장본인 일본은 국제포경협회(IWC)로부터 포경 허가를 받아 연간 2만 t까지 고래를 잡을 수 있다.

 

우리나라 포경선은 62년-15척, 66년-29척, 78년 이후-21척 이후 마지막 남은 단 1척이 장생포고래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중이다. 귀신고래가 10월이면 남쪽으로 이동하는 길목에서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무려 6,500여 마리의 고래를 포획하였고 해방 후 일본선주로부터 받은 포경선으로 15,000여 마리를 포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고래를 잡아 식용으로 대처하고 하는 상업포경을 허용하라는 것이 아니다. 아주 오랜 기간을 통해 이미 포경국가였음을 말하는 것이고, 포경에 관하여 우리의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린피스의 반대라 하여, 환경파괴라하여 힘없는 나라만 받아들이는 주장이라면 그 주장은 이미 무효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