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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경주 여행에서 자칫 빼먹기 쉬운 서악지구 여행 중 첫번째로 만나게 되는 신라 무열왕릉은 사적 제20호로 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654~661) 김춘추 릉을 만나면서 부터 시작된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김춘추는 신라 중대의 첫 진골 출신으로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통일의 기반은 닦았으나 통일의 대업은 이루지 못하고 릉에 묻혔는데 밑둘레 114m, 높이 8.7m로 주변의 능에 비하여 큰 규모를 자랑하며, 무열왕릉 뒷편으로 4기의 릉은 누구의 릉인지 알 수 없다.
무덤은 큰 자연석을 돌려 경계석을 세웠지만 지금은 일부분만 노출되어져 있으며, 동쪽에 비석을 세웠던 돌 거북과 머릿돌에서 둘째 아들이였던 김인문이 쓴 "태종무열대왕지비" 글씨로 인해 릉의 주인이 무열왕릉임을 확인할 수 있다.
무열왕릉으로 들어서기 전 도로 건너편*주차장쪽)에 2기의 릉이 자리잡고 있는데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과 무열왕의 9세손 김양의 릉을 먼저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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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문(진평왕 51년(629)-효소왕 3년(694))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 문무왕의 친동생으로 외교관 역할을 하였는데 공으로 651년 23세 나이로 좌령군위장군 직함으로 당나라에 파견되고 658년 나당연합을 결성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공을 인정받아 효소왕은 태대각간에 추증하였다. 그 후 당나라에 머물면서 분쟁을 해결하는 중재역활을 맏아온 인물이다.
효소왕 3년(694) 4월 당나라 수도에서 죽음을 맞아하자 유해를 신라로 호송 하였으며 태대각간으로 추증하고 경주 서악동 서쪽에서 장례를 치렀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김인문묘비에는 화강암재질에 높이 약 63cm, 너비 94.5cm, 두께 18cm로 1931년 서악서원 영귀루 보수 당시 확인된 것으로 절반이상이 훼손되어 발견되었는데 확인되는 글로서 26행 4백자 정도로 명문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하게 누구의 비문인지 알 수 없지만 김인문의 묘비로 추정하고 있다. 김인문의 ay는 무열왕릉 앞 김양의 묘와 함께 있으며 일반적 신라시대 형태를 취한 봉분형식으로 무덤 밑둘레 82m, 지름 29.9m, 높이 6.5m이다.
김인문의 묘 옆에는 비신이 사라진 귀부(보물 제70호)이 남아있다. 서악서원 영귀루에서 두조각으로 발견된 비신을 통해 김인문의 비신을 세웠던 귀부로 추정하고 있는데 거북 등에 용을 조각한 이수가 있는 형식으로 거북의 발가락이 다섯 개 인 점을 빼고는 무열왕비의 귀부와 흡사한 형식과 조각을 하고 있다.
김인문 릉과 함께 있는 김양의 릉은 일반적인 삼국시대 말기의 원형봉토분을 하고있 는 무열왕 9세손 김양(808∼857)의 묘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되어져 있다. 김양은 관직에 출사 후 많은 공로를 통해 사후 무열왕릉 동쪽에 장사를 지냈다 기록하고 있는 인물이다.
김양의 묘 옆에 또 하나의 무덤으로 태조무열왕 둘째아들이며 문무왕의 친동생인 김인문의 묘와 비가 있다. 두 무덤이 태종무열왕릉 앞에 있지만 비문이 없는 터라 두기의 무덤을 가지고 누구의 무덤인지 학계조차 논란이 되는가 하면 김인문의 묘를 두고 김유신의 묘라는 주장도 있다.
경주시 서악동에 자리한 신라 왕족 김양은 태종 무열왕 9대손으로 흥덕왕 3년(828) 고성 태수로 부임 한 후 무주도둑을 거쳐 830년 장보고 세력에 힘입어 민애왕을 죽이고 신무왕을 추대하고 신무왕이 죽은 뒤 문성왕을 다시 모셨지만 문성왕 19년(857) 50세 일기로 죽음을 맞이하고 무열왕릉 앞에 묘를 조성하지만 일제 강점기 당시 철도로 도로를 내면서 무열왕릉과 김양의 묘 사이를 반으로 갈라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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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도 신라 땅에 묻혀있는 역대 왕들의 무덤 중 피장자가 유일하게 확인되는 고분으로 서악동 구릉을 따라 형성된 김 씨 묘역 5기 봉분 중 중앙에 해당되지만 일제가 철로 및 도로를 개통하면서 지금은 제일 아래에 위치하고 도로 건너편에 김양의 묘, 김인문의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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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 앞에는 국내최고 걸작으로 알려진 태종무열왕의 비(국보 제25호)를 모신 건물이 있다. 생동감이 넘치는 거북등에 정교한 조각으로 귀갑문과 비운문 등 다양한 문양을 새기고 비신은 사라져 버렸지만 이수는 6마리용이 양쪽 3마리씩 반결쟁주하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화려함과 정교함을 더해주며, 피장자의 신분을 과시하는 한편 중앙부에 높이 42 cm, 폭 33 cm 네모공간을 만들고 전서체로 "太宗武烈王之碑/ 태종무열대왕지비"을 2행 8자로 양각해 놓고, 비신은 무열왕 둘째 아들 김인문이 글씨를 적었다 전해지며, 사라져 버린 비신은 숭불정책에 의하여 파괴된 것으로 추정되며, 일부 비신의 조각은 경주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태종무열왕릉비에서 주목할 것은 용의 머리에 거북형상을 한 것이 아니라 거북모양을 하고 비석을 짊어진 상태로 이수를 올리는 중국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최초의 비로 기록되고 있다. 귀부 높이는 1.03 m, 길이 3.8 m, 폭 2.49 m, 이수(首) 높이 1.06 m, 폭 1.36 m, 두께 0.36 m, 비좌(碑座) 1.73×0.86 m이며, 도로 건너편 김인문의 비와 거북이 발가락 숫자만 다를 뿐 거의 유사하다.
태종무열왕(김춘추, 재위 654∼661)은 김유신, 김인문과 함께 당나라 세력을 통해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진 인물로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재위기간 654-661년)으로 등극한다. 김유신과 교분을 쌓은 김춘추는 김유신의 누이동생 김문희와 정략결혼을 하여 김유신과 처남 매부지간이 되며, 자신의 딸이 머물던 대양성이 642년 무너지면서 사위부부가 죽자 김춘추는 복수를 다짐하여 고구려 연개소문을 만나 동맹을 제의하지만 거절당하고 일본과 동맹 역시 실패하자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백제를 무너뜨린 후 고구려를 치려는 준비를 하던 와중에 죽음에 이르고 서악동 구릉지역에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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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무열왕릉은 사적 제20호로 미발굴고분이며, 높이 약 13m, 주위둘레 약112m로 내부는 횡혈식석실분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분의 피장자 신분으로 추정할 때 고분 주변에 호석이나 다른 장식이 있을 것 같지만 고분에는 자연석 호석을 돌린 상태로 일부 몇 개의 호석이 겨우 돌출되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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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산 남쪽 자락에 위치한 서악리 고분군은 무열왕릉을 대표로 능선을 따라 위치해 있는 대형급 고분으로 4기의 고분이 연결되어 있지만 누구의 무덤인지는 알 수 없고 단지 무열왕의 무덤 뒷편에 위치하여 무열왕과 관련있는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 될 뿐이다. 서악리 고분군은 사적 제42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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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산에서 바라 본 무열왕릉 전경
신라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김춘추 무열왕의 사후 세계는 선도산 정상에 자리한 삼존불 입상이 내려다 보면서 오늘도 천년고도 신라를 지키고 있다. 부강했던 신라는 결국 포석정에서 열린 연회를 마지막으로 역사의 뒷편으로 사리져 버리지만 가장 많은 시대적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어 여행가는 뚜껑없는 박물관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곳이다.
무영뢍릉을 여행 후 서악서원에서 차 한잔 나누고 왼편 담벼락을 따라 선도산에 올라 미륵삼존불 입상을 만나 본 후 김유신 릉으로 여행하면서 경주 시내로 진입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