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
석상에 카이즈수염을 한 중국인과 곱슬머리 서역인을 세웠는가? . . 이해하기 힘든 신라왕릉 . .. 풀리지 않는 의문 . . 괘릉 천년도고 신라의 또 하나의 미스터리 그 의혹의 중심 괘릉 그리고 괘릉을 둘러싼 이야기를 찾아 여행하는 코스 . .
불국사-괘릉-활성리석불입상-숭복사지-경주남산 탑곡-불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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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괘릉은 신라 제38대 원성왕(785~798 / 김경신)의 릉으로 추정하는 곳으로 사적 제26호로 지정되어 있다. 괘릉은 밑둘레 70m, 지름 21.9m, 높이 7.7m의 중형급 릉에 십이지신상을 새긴 호석을 돌리고 돌난간을 감싸 경주 릉 중에서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봉분 앞에는 좌,우 일렬로 화표석, 문인석이 자리잡고 있는데 인물상이 국내에서 유일한 외국인이다. 무덤을 두고 괘릉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곳이 연못이였고 연못을 매워 능을 만들어 관이 물에 젖자 널을 걸어서 묻었다하여 괘릉이라 하나 아직 발굴을 하지 않아 알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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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릉은 좌우 화표석, 무인석, 문인석 각 1쌍과 돌사자 4마리를 배치하고 있다. 처음부터 그곳을 지키고 있었는지 이동을 한 것인지는 발견당시 누워있던 그 위치에 그대로 세웠다한다. 지금도 그 흔적으로 석상은 철분성분으로 물든 색상과 본래 색상이 얼룩져 있는데 땅속 철분이 석상에 물들어 색상이 변했다. 2005년 1월 20일 보물 제1427호로 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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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당시 국제무역에 관해 신라의 국력을 느끼게 하는데 미스터리한 것은 왜 왕릉 앞에 이방인인 서역인 이 서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국내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단 1기의 왕릉에서 말이다. 어쩌면 왕릉보다 규모가 작은 것으로 볼 때 왕릉이 아니라 서역인 중 고위층이 신라에서 죽음을 당하고 무덤을 조성한 것은 아닐까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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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릉 석상 및 석주 일괄은 보물 제1427호로 통일신라시대 릉 중에서 가장 우수한 표현을 한 릉 주변에 세운 석물로 왕릉입구에는 남쪽으로부터 화표석, 무인석, 문인석 각 1쌍과 돌사자 4마리를 동서로 약 28m 거리를 두고 마주보고 있는데 발견당시 넘어져 있는것을 세웠다 한다.
무인석은 괴량감과 박진감이 넘치는 석조물로 그 얼굴에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어 통일신라 당시 서역과 문물교류가 활발하였음을 말해주는데 왜 하필이면 이 릉에 외국 서역인이 릉을 지키는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또한 사자 4마리는 2마리씩 마주하고 있는데 동남쪽과 서북쪽의 것은 정면을 주시하고, 서남쪽과 동북쪽의 것은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려 남쪽과 북쪽을 지키고 있는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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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무기를 든 형태를 통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몽둥이처럼 생긴 무기 또는 다른 어떤 도구를 들고 있는 건장한 남성은 누가보아도 서역인으로 일부는 아리아 계통으로 추정하고 있다. 옆구리에 주머니도 달고 있으며, 머리에는 천으로 된 중앙아시아 또는 아랍권에서 사용하는 둥근 터번을 질끈 동여매고 있다. 왕의 무덤을 지키는 서역인은 실크로드를 통해 신라로 유리. 금속 공예품을 들여온 페르시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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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역인의 뒷 모습. 옆에 찬 주머니가 잘 표현되어 있는데 일부 우리나라 복주머니라 주장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주장일뿐.. 우리나라 복주머니는 아닌듯 보여진다. 확인 당시 석상이 앞으로 너머져 앞면에는 철분으로 붉게 물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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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을 중심으로 오른쪽 카이즈 수염에 중국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석상을 두고 문인석인가 아니면 무인석인가 논란이 일고 있다. 일단 앞에서 보면 문인석으로 볼 수 있지만 뒤쪽에서 보면 갑옷을 입고 있어 무인석이다. 얼굴모습 역시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고대 중국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 . 정면에서는 손에 홀을 든 것처럼 보이지만 칼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모자에 그려진 곤충역시 매미가 아닌 벌로 확인되었고 입고 있는 옷 역시 무인이 입던 대수장포로 정밀분석결과를 내 놓아 무인석상으로 정리되고 있다. 모자에 벌이 그려진 유물로는 중국에서 당 예종의 아들 장혜태자 묘 벽화에서 확인되었다. 벌은 독침을 통해 무사의 상징으로 표현된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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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을 중심으로 오른쪽 무인의 뒷모습. 앞으로 넘어져 뒷면은 철분성분이 없다. 갑옷을 걸친 무사의 옷임을 뒷쪽을 통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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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으로 부터 오른쪽 카이즈 수염을 한 중국인으로 추정되는 무인석으로 표정이 근엄하고 무사다운 눈빛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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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으로 부터 왼쪽에 서 있는 서역인의 모습으로 한쌍이 모두 손에 무기로 추정되는 긴 물건을 들고 있지만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서 있는 모습이 당당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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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으로 부터 왼쪽 서역인의 얼굴에는 외국인의 얼굴 생김새 그리고 머리에 질끈 동여맨 터번이 잘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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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으로 부터 왼쪽 서역인의 뒷모습으로 정면에 있는 오른쪽 서역인과 복장상태가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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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복주머니라고 주장하지만 생긴 모습 그리고 주머니를 매달기 위한 끈의 굵기 등을 통해 복주머니가 아닌 어떤 장비일 가능성이 있다. 옛날에는 시계도 매달고 다녔듯.. 서역인이라면 당시 뭔가 매달고 다니며 사용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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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으로 부터 왼쪽에 서 있는 무인 즉 무사의 모습이다. 보편적으로 무사를 두면 무인을 두기 마련인데 이곳에서는 무사만 존재할 뿐인데 복장 상태를 보면 갑옷을 입고 그 위에 옷을 걸쳐 무인으로 보이기도 한다. 무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대신급 서열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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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으로 부터 왼쪽 무인의 뒷 모습에는 갑옷차림의 흔적이 또렷하게 남아있어 무인임을 증명하고 있다. 아니면 당시 사회적으로 문인이 갑옷을 입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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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사자를 옮겼다는 주장과 본래 있던 위치하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정확하게 정리된 것은 없다. 분황사 돌사자가 네 모퉁이를 장식하고, 불국사 역시 네 모퉁이를 장식하였기에 무덤주변 사각이 본래 위치라는 주장과 사자석의 바라보는 방향이 일정치 않다는 점을 들어 지금의 위치가 본래의 위치라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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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에 관한 의문도 상당하다. 오늘날 원성왕의 능으로 추정하지만 당대 왕의 무덤이 연못을 막고 만들만큼 이곳이 명당 터인지 몰라도 우리조상은 물이 괘는 곳에는 절대 무덤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과 아예 능비조차 없다는 점, 괘릉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연못을 막고 무덤을 조성하여 관이 물에 닿자 그 당시 기술로 관을 돌 위에 올려 걸고 봉분을 만들어 “걸괘”자를 써 “괘릉”으로 불렀다 한다. 왕의 무덤에 물이 고여 있다는 충격적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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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 주변을 따라 배치된 십이지신상의 조각 수법이 매우 뛰어나다. 그리고 지금도 봉분에서 물이 고여 있는지 알 수 없어도 뒷쪽에는 제법 틈새가 벌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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릉에 새겨진 12지신상의 정교한 작업솜씨는 당대에는 최고의 조각가에 의하여 조성된 릉으로 상당한 심혈을 기울인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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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사자의 얼굴 표정은 사납지 않다. 그리고 꼬리와 발의 표현력은 흡사 살아서 금방이라도 산천을 향해 뛰쳐 나갈 듯 표현력이 우수하다. 일제 강점기 당시 우리나라의 엄청난 석물과 문화재를 유출하였는데 일본이 왜 이 석물을 가져가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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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릉을 나오면서 아직도 천년고도 신라에 관해 이해가 부족하다. 이미 출토된 릉에서 많은 서역인의 형상을 한 인형이 출토 될 만큼 이곳 신라에 서역인이 상당수 존재했다는 것이다. 또한 괘릉을 지키는 서역인이 국적으로 따준다면 중국계와 유럽계라는 것이다. 외국인 두곳이 지키고 있다는 것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더욱 복잡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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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릉을 빠져 나와 길을 따르면 활성리 석불입상 이정표가 나온다 경주 외동에 위치한 연지암 법당 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편에 모셔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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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성리 석불입상
문화재자료 제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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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활성리 석불입상은 얼굴이 심하게 마모되어 다시 만든 불상으로 광배는 머리둘레에 2중으로 선을 돌린 두광과 몸 둘레에 역시 2중으로 선을 돌린 신광을 표현하고 주변에 불꽃을 조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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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성리 석불입상을 떠나 다시금 마을길을 따라 조금만 더 이어지면 원성왕릉을 증명해주는 결정적 계기가 된 숭복사지가 나온다. 비록 가람은 사라지고 형편없이 파손된 2기의 석탑이 옛 사찰터에 외롭게 남아져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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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원성왕을 위해 곡사를 옮겨 지은 숭복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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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복사지에 2기의 석탑이 남아져 있다. 신라 원성왕을 위하여 곡사를 옮겨 지은 것으로 최치원이 비문을 적은 대숭복사비가 있었던 곳이다. 거북 모양의 받침들은 지금 국립경주박물관 정원에 옮겨져 있다.
탑은 동, 서 2기로 쌍탑을 이루며 현재 동탑은 약 4.3m, 서탑은 약 3.2m로 상륜부는 분실되고 훼손이 심한 상태이다. 1층 기단에는 모서리기둥과 2개의 연기둥을 조각하였고 2층부에는 각각 2구씩 팔부신중상을 조각해 두었는데 통일신라시대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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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기의 석탑 중 앞면에 있는 석탑에 새겨진 조각을 통해 괘릉의 12지신상 조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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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탑의 거리를 볼때 상당한 규모의 절집을 짐작 할 수 있다. 경주시 외동 말방리에 위치하여 말방리사지로 불리우다 최치원의 숭복사문비가 발견되어 명칭이 바뀌었다. 일부 발견된 유적은 경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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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의 삼신할매 .
불곡마애여래좌상 . . . . 괘릉 주변여행을 마치고 경주 남산자락에 위치한 경주 남산 삼신할매를 쏙 빼닮은 마애불을 찾아 남산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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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할매 만나로 가는 길은 여느때와 다름없이 대나무 숲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주차장 이정표에서 400m 거리로 숲길을 산책하듯 거닐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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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은 보물 제198호 . . . 남산 동쪽 기슭 작은 자연석 바위를 0.9m 홈을 파 내고 감실을 조성한 후 여래좌상을 조각하였는데 그 얼굴모습이 산심할매를 닮아 할매부처로 부른다. 할매부처는 돋을 새김한 머리에 두건을 뒤까지 덮어쓴 모습과 함께 둥근 얼굴은 위엄감을 준다. 남산 할매부처는 자료에 의하면 장창골 애기부처와 배리 삼존불과 함께 7세기 이전에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 불상이 있는 계곡을 부처 골짜기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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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불은 부처골짜기 햇볕이 잘 드는 위치를 향해 자연석에 석굴을 파고 여래좌상을 모셨는데 흡사 할머니 형태로 천황할미를 연상케 한다. 두건을 둘러쓴 모습과 정면을 주시하지 않고 내려 깔은 눈 모습 그리고 양손을 마주 옷고름 속으로 넣고 대좌하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이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이다. 하동군 쌍계사 있는 보살상과 암실을 파서 새긴 수법이나 손 모양, 옷맵시, 인물의 표정 등 여러 모 습이 닮아있다.
자연암을 이용하여 0.9m 파 감실을 만들고 돋을새김 하였으며 할매부처로 알려져 있는 석불은 한때 할매보살로 불렸다. 지리산에 모셔진 천황할미의 이야기처럼 우리는 일찍이 부터 천황사상을 숭배해 왔다. 단군이래 천황사상은 우리의 모든 산을 통해 숭배되었는데 어쩌면 이 불상도 누군가에 의해 천황사상 속 천황할미를 조각하지 않았나 싶다
석불은 자연석에 0.9m 감실을 파내고 모셨는데 이 일대의 석불중 감실을 찾아 볼 수 없다는 점과 쌍계사의 석불 역시 감실을 만들었다는 점, 또한 양손을 옷속에 넣고 있는 점으로 보아 불상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 등으로 볼 때 남산 일대에 널려져 있는 불상과는 분명 차별화가 되고 있어 연구할 가치가 충분하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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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골짝 수많은 문화재를 다 찾아본다는 것은 하루 이틀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 중에서 개별적으로 떨어져 있어 더욱 찾기 힘든 문화재 중 한곳이 바로 탑곡으로 삼신할매를 만나고 조금만 옆으로 뻗어 오르면 탑곡마애조상군으로 향하는 길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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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201로 남산탑곡마애조상군 .
불심을 향한 끝없는 민초의 도전일까? 탑골로 불리는 길을 따라 들어서면 옥룡사가 자리하고 그 뒤편으로 땅에서 불쑥 솟은 듯한 탑바위가 있다. 탑바위에는 보편적인 마애불 조성을 떠나 거대한 두 개의 탑을 새기고 바위전면과 측면 뒷면까지 사찰의 모든 전각을 옮겨 놓은 듯 암각화와 불탑 불상을 조성해 두고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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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 신인사라는 사찰 터로 추정되는 이곳은 높이 10m,사방 둘레 30m를 하나같이 불상으로 새겨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희귀한 자료이며, 이곳에 모셔진 각 그림 수는 32점으로 전례가 없는 경우이다. 정면(북쪽)에서 바라보면 9층목탑과 7층목탑 사이 석가여래가 연꽃위 앉아 계시고 탑 앞에 두 마리의 사자가 자리 잡고 있는 모습으로 극히 보기 드문 예이다. 왼쪽(동쪽)면에는 중앙에 여래상을 모시고 주변에는 위치에 따라 비천상, 승려상, 보살상, 인왕상, 대나무 등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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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탑곡은 지금 수리중으로 관람이 어렵다. 다음달 말까지 공사가 이어질듯 싶은데..장마기간에 왠 문화재 보수공사가 이리도 많은지..
그래서 앞서 여행했던 사진을 링크 걸어 둡니다. . . . http://blog.daum.net/okgolf/5463754 . . . . |
탑곡의 아름다움에 빠져 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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