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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가는 옛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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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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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함안군은 옛 안라국이 있던 곳으로 능선을 따라 고분이 자리하고 있다. 남해고속도로
함안IC에서 하차하여 시내로 진입 후 함안군청 방향으로 진행 그리고 함안군청을 지나 첫번째
골목을 따라 진입하면 도항리.말산리고분군 주차장이 오른편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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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여행 코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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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공원(도항리말산리고분군)-1호분~37호분 코스길 - 고인돌 2기 및 고인돌 암각화 1기 -
함안박물관 - 진동방향 도로를 따라 진행 - 이수정(무진정) - 대사리석불 - 검암천을 따라
이동 - 입곡군립공원 순으로 따르면 된다.
코스 단축 또는 자가용 이동하면서 여행을 하려면
1. 아라공원(도항리말산리고분군)-1호고분-37호고분 코스길 - 고인돌 2기 - 고인돌 암각
화 1기 - 함안박물관 - 주차장 (이동)
2. 무진정 주차장 -이수정(무진정) - 대사리석불 - 무진정 주차장(이동)
3. 함안입곡군립공원 주차장 - 입곡군립공원 - 차량이동 고려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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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가야로 불리는 함안군 도항리구분군(사적 제84호/면적 41만 1340㎡) 및 말산리고분군(사적 제85호/면적 2만 200㎡)는 함안군의 최고봉인 여항산 기슭을 따라 늘어선 4m-15m의 대형급 고분으로 단지 지역이 분리 되었을 뿐 하나의 고분군으로 추정된다.
말산리 고분군은 44기의 고분으로 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지만 대부분 훼손, 상당수의 유물은 도굴되어 버렸으며, 주로 앞트기식돌방(굴식에서 시체를 넣은 관을 안치하는 네모형 방)식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34호로 지정된 고분은 산의 정상을 전부 차지하며, 도항리고분은 구릉을 따라 70여기가 늘어서 있다.
가야에 관한 기록은 각기 달라 정확한 지역을 알기 어렵다. 가야고분이 발견된 경로를 따라 지역을 살펴보면 가야는 원삼국 시대부터 삼국시대 까지 추정되며 낙동강을 경계로 서쪽 경상지역이 대다수를 차지하며 전라도 일부지역 까지 이어져 있지만 6가야에 관한 뚜렷한 자료가 없다. 6가야로 불리는 지역은 진주(고령가야), 성주(성산가야), 고령(대가야), 함안(아라가야), 김해(금관가야), 고성(소가야)로 나누지만 그 속에 또 다른 작은 소속된 집단이 있음을 밝혀주는 일부 자료가 출토되는 등 가야사에는 아직까지 미스터리 그 자체로 남아있다.
가야무덤의 상호 특징으로 능선 또는 산위에 고분이 있는 점과 고분 주위에 하천 또는 평야가 있다는 것, 또한 주변에 성곽이 있어 가야사를 더욱 이해하기 힘들 게 한다.
대표적인 발굴을 살펴보면 1917년 일본인 이마니시가 발굴한 자료가 함안고분의 최초 발굴로서 무덤의 높이가 10m로 가장 크며, 무덤 밑지름이 40m에 이른다. 무덤 안은 석실을 만들어 시체를 위에서 내려놓고 여러 개의 판석을 잇대어 덮어 만드는 [수혈식 석실묘]로 밝혀졌다.
가야라고 하면 흔히들 김수로왕을 떠 올린다. 또한 김수로왕이 모든 가야세력을 규합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절대 가야는 김해의 금관가야가 가야사를 주도했다고 볼 수 없다.
가야사를 여는 왕으로서는 김해 금관가야 수로왕, 고령 대가야 이진아시왕이 기록될 뿐이다. 김수로왕을 얼핏 떠올리는 이유는 가야에 관한 가장 많은 근거가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금관가야는 수로왕을 시작으로 10대 왕이 490년간 존속하였음을 삼국유사 및 가락국기에서 전하고 있다. 가락국기에 있는 내용 중 하나는 김해지역 구지봉에 하늘에서 6개의 알이 내려와 여섯 가야국의 임금이 되었다고 전한다.
가야는 어디까지 소속된 지역을 두었을까? 여기에 관하여 삼국유사는 해인사의 가야산에서 남해까지, 낙동강 서쪽에서 지리산 까지 기록되어 있다. 발굴조사 결과 낙동강지역은 동래, 양산, 창녕이며, 섬진강 지역은 진안, 장수, 임실, 남원이다. 상당한 규모임에도 가야는 삼국대열에서 빠졌다. 세력규합을 이루지 못한 채 결국은 삼국의 싸움에 자신의 땅을 빌어 전쟁을 치르게 하는 과정에서 하나씩 무너져 간다.
가야사에서 "큰가야"로 불리는 지역은 옮겨 다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세력권을 가진 가야를 두고 부르지 않았나 싶다. 초기 1-4세기는 김해가 큰가야로 굴림 하였으나 5-6세기는 고령의 반로국이 큰가야로 된다. 당시 규모는 소수로 예상되는 소국으로 4천명 미만을 보고 있지만 고분을 보아 김해의 구야국과 함안의 안야국은 3만에 이르는 가야국 중 대국으로 자리 잡고 상호 건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가야국은 외교능력이 탁월하여 중국과 일본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등 당시 철기문화를 주도한 상당한 능력을 가진 세력으로 성장해 나갔지만 결국 고구려에 의하여 가야사는 사라지게 된다.
안야국을 대표하는 아라가야 고분군은 당시 상당한 세력으로 여느 가야에서 볼 수 없는 분묘의 릉을 만들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있다. 주로 5-6세기로 추정되는 고분에서 발견된 토기는 순수한 반면 귀족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흔히들 함안토기라 불린다.
안야국은 가야사에서 김해세력을 견제하는 집단으로 성장하면서 아라가야 고유의 문화권을 통해 세력을 규합하여 김해 가락국을 치는 "포상8국" 전쟁을 치른다. 이때 동참한 배후지역으로 골포(마산), 칠포(칠원), 고사포(고성), 사물국(사천) 등이다. 안라국은 김해세력을 견제하면서 주변의 세력규합을 이루며 성장하지만 제일먼저 신라에 점령되고 그 후 가야는 2년을 버티지 못하고 다들 무너져 버렸다.
아라가야가 잊혀 버린 사건 중에 하나가 일본이 제시한 임나일본부설이다. 일본이 한반도에 두었다는 고대일본의 행방을 아라가야를 통해 자신의 영토임을 주장한 대사건이 아닐 수 없다. "임나"란 지역도 없거니와 우리 주변에서 "임나"에 관한 기록도 생소하지만 광개토대왕비에는 임나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광개토 대왕비에는 "영락 10년에 왕은 5만의 보병과 기병을 파견하여 낙동강 유역에서 왜를 격퇴하고 임나가라를 복속시키는 한편 신라를 구원하였다" 는 기록은 결국 "임나"는 낙동강 유역에 있고 그 나라가 "가라"라는 것이다. 삼국사기 장수전에는 "신은 본래 임나가라 사람입니다"란 기록이 있지만 그 지역이 어디를 두고 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금관가야 일 가능성을 열어 보이고 있는 것이 우리 측의 입장이다.
임나일본부설(본부)는 일본이 가야지역 군사를 정벌하여 임나일본부를 만들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였다는 학설로 일본에서는 "임나일본부설","남선경영론"이라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일본이 한반도 침략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조작한 것으로 당시 일본은 혼란의 시기를 지나 6세기에 제법 나라다운 기틀을 잡는데 어찌 4세기부터 한반도에 임나본부를 둘 수 있는가 하는 점과 가야사의 유물이 전혀 변하지 않고 계승된 점만 보아도 조작하였음은 확연하게 알 수 있다.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는 무려 200년을 가야 일부지역을 통해 장악하였다는 것이다. 그러하다면 아라가야를 살펴보면 일본문화 전례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도대체 타 나라에서 200년을 장악 했다면 기존 유지해오던 문화권이 박살나는 것은 시간문제가 아닌가. 그러하다면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는 없는 것일까?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것은 분명 쓰시마섬으로 추정된다. 당시 쓰시마섬은 한반도의 영토가 아니었는가. "임나"를 두고 광개토 대왕비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 점을 살펴보자. 이 넓은 지역 중에 하필이면 중국에서 발견된 광개토대왕비에 "임나"가 기록되어져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광개토 대왕비는 1880년 한 농부가 발견한 후 일본이 비문을 조작했다는 설이 있다. 당시 사코라는 일본 파견 밀사(중위계급)는 능비를 탁본해 간다. 그 탁본 과정에서 탁공을 매수해 글씨가 모호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쌍구기록본이라 전하며 제시한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광개토대왕 비문에서 탁본을 떠 제시하는 대목으로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임나,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란 부분이다.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통해 일본은 한반도를 유린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여기에 관하여 재일사학자 이진희 씨는 변조하였음을 제시했다. 이진희씨가 광개토대왕비를 조사한 결과 탁본이 변조되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증거조작에 관하여 탁본의 글씨체가 일정하지 않고, 없던 글자가 탁본 속에 있다는 것이다. 탁본에 관한주장을 근거로 한다면 이미 신라와 백제는 일본에 의하여 멸망(?)하게 된다. 그러나 그 후에 새워진 광개토 대왕비에서는 영락6년 직접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물리쳤다고 되어있다. 일본이 물려 쳐 버린 백제를 광개토왕이 누굴 상대로 전쟁을 하였단 말인가. 이 모든 것으로 보아 일본의 주장은 터무니없다.
함안과 "임나"에 관하여 살펴보면 일본서기에 임나일본부/안라일본부가 등장한다. 즉, 안라국인 아라가야를 두고 말하는 것이며, 지금의 함안이다. 삼국유사에 안라국은 대단한 세력으로 부상하여 김해세력과 대처하게 됨을 밝히고 있다. 일본에서 아라가야 사에 관한 대대적인 연구를 통해 아라가야 고분의 유적을 도굴해서 가져가 마치 자신들의 주장이 정당함을 내세우고 있지만 그것조차 허구이다. 함안에서는 여느 지역과 달리 일본문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이 70년대까지 일부 남아 있었을 뿐 일본인 무덤이나, 일본인 비석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 왜 "임나"가 등장해서 이처럼 골머리를 속이고 있는가. 일본에서 발견된 내용에는 "재안라제왜신(在安羅諸倭臣)"이란 표현이 있다. 안리에 있는 왜신 즉, 사신이 안리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인리를 안라국으로 본다면 개인적 해석은 이러하다.
당시 철을 이용한 문화를 주도한 가야로서 바다와 인접, 일본과 상당한 교류를 펼쳤음을 짐작하게 한다. 일본은 우리의 철기문화를 이용하여 많은 무기류가 필요했을 것이고 가야는 이를 이용하여 교류하지 않았나 싶다. 안라국의 철기문화를 대표하는 것으로 마갑총과 철제 말갑옷이다. 당시 어떤 집단도 사용하지 않은 앞선 문화로서 엄청난 발전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안라국이 일본의 간섭을 받았다면 누가 믿겠는가.
임나는 어쩌면 일본에서 기록될 만큼 중요한 의미일 수 있다. 당시 가야사를 보면 김해지역 마지막 왕족의 행방이 묘연하다. 김해 인근의 사찰로 들어가 부처가 되었다고 하지만 합리화시키기 위한 전설일 뿐이다.
일본의 탄생설화는 바다로부터 하얀 옷을 입은 신선이 내로 오면서부터 시작된다. 당시 가야에서 사라져 버린 왕자의 수와 일치한다는 것은 어쩌면 일본 역사가 말하는 창건설화는 가야로부터 시작되는 것 일 수도 있다. 오히려 우리가 주장해야 하는 내용이 아닐까 싶다.
당시 가야는 안라국을 비롯하여 김해지역도 일본과 많은 교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가 침공하자 왕자를 일본으로 피신 시켰는데 그 당시 일본은 "왜"로 표현될 만큼 야만인이 아니었던가. 피신한 왕자가 일본의 전설적인 설화 주인공으로 될 가능성은 충분하며, 그러하다면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라는 것은 신라에 있던 어떤 기구이거나 "세력"을 뜻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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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가야공원으로 불린다. 고분으로 올라서는 계단길로 이 길을 넘어서면 박물관으로
향하는 길과 도항리 말산리 고분으로 가는 길이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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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에 올라서면 함안 3.1.독립운동기념탑이 서 있다. 1919년 3월 19일 함안읍 장날을 기하여
3천여 군중이 벌인 독립만세운동과 3.20. 군북시장에서 또 다시 3 천여 군중이 만세운동을 벌
여 21명이 순국, 18명이 부상당하고 수십명이 옥고를 치루었는데 이를 계승하고 추모하기 위
해 1967년 12월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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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을 돌아 내려선 길을 따라 함안박물관에 도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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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박물관에 도착하니 야외 전시장에 낮익은 표본이 전시되어져 있었다. 칠곡에서
만났던 공룡발자국 표본이 보관할 곳을 찾지못하다 박물관으로 옮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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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대 트라이아이스 후기(약2억 2천만 년 전) 쥐라기를 통해 백악기까지 이 지구상을 1억5천만년 정도 군림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공룡은 한반도에 발자국은 숱하게 남겨두고 홀연히 사라졌다.
1982년 고성 덕명리에서 공룡발자국이 발견된 이래 한반도에도 공룡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열어 놓고 뜻있는 학자들의 연구와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지층에 깔려있던 공룡발자국이 하나 둘 공개되면서 더 이상 한반도는 공룡의 불모지가 아닌, 공룡의 지상낙원으로 거듭 재조명되고 있지만 아쉽게도 인식부족으로 관광객의 발길은 아예 끊어지고 일부 학생층만 찾는 실정이다.
1993년 6월27일 낙동강변 칠서산업단지 공단조성과정에서 공룡발자국이 두 개의 지층에서 발견되었는데 지층의 차이가 250cm으로 70여개의 발자국 세 종류가 발견되었다. 함안 칠서지방공단을 조성할 당시 공룡발자국이 화석지대가 발견되어 함안은 새발자국과 함께 인접한 낙동강 지류에서 공룡발자국이 나옴에 따라 함안군 일대가 상당한 늪지로 형성되어 있지 않았을까 추정할 수 있다. 지금도 함안군은 상당한 늪지를 가지고 있으며 공룡발자국은 이곳 외 진동, 고성과 가까운 여항산 일대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공룡 발자국은 34~36cm, 깊이 2.7cm, 길이 37cm로 네발로 걷던 용각류의 직립 보행한 흔적으로 추정된다. 용각류 외 육식성인 조각류 발자국도 주변에서 발견됨에 따라 이 일대에서 우연하게 남겨진 발자국이 아님을 짐작케 하고 있다. 이곳 발견지와 가장 가까운 마산의 호계리 고용발자국과 비슷한 것으로 보아 당시 이 일대 공룡의 흔적을 연구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공룡발자국은 발가락까지 선명할 정도로 보존이 잘되어져 있으며 발견된 지층은 중생대 전기 백악기 퇴적층으로 1억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경상계 하양층군 함안층 회적색 셰일층 층리면에 속하는 지층에서 발자국 70여개가 발견되었으며 1993년 12월 27일 문화재자료 제205호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
초식공룡 조각류의 두종류 및 용각류 1종류의 발자국이 나타난다. 1번은 길이36cm, 폭 26cm으로 세 개의 발가락과 발톱이 없는 것으로 보아 초식공룡 조각류로 뒷발의 보행흔적만 있는 것으로 보아 2족 보행을 하며, 보행 폭은 106cm로 7개가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다.
2번은 1번과 다른 종류의 공룡으로 역시 발톱이 없는 것으로 보아 초식공룡 조각류로 추정되지만 뒷굽치 부분이 타원형이 아닌 안쪽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아 다른 초식공룡 조각류로 판단된다. 발자국 길이는 30cm, 폭은 28cm이다. 2족 보행의 흔적으로 걸음 폭은 76cm으로 1번에 비하여 다소 덩치가 적은 것으로 보이며 6개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있다.
3번은 보편적으로 보이는 용각류로 앞발과 뒷발 9개씩 18개의 발자국이 뚜렷하게 남아져 있다. 타원형의 발자국은 앞발의 경우 길이 36cm, 폭 24cm이며, 뒷발은 46cm, 폭 40cm, 걸음 폭으로 앞발과 뒷발 각각 79cm, 98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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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본격적으로 박물관 여행을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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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 전시된 가야시대 흔적을 통해 기억의 저편에서 가물거리는 안라국을 떠 올릴 수 있다. 안라국은 가야시대 함안 땅을 군림했던 집단이지만 안라국이란 명칭은 생소하다.
안라국이라는 지명보다 함안에서는 후대 사람들에 의하여 아라가야가 더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신라에 복속되기 전까지 인근 가야국과 함께 철기문화를 꽃피우면서 이웃한 일본과 외교를 통해 문물을 전파하는 등 정치적인 안정을 보였지만 가야국은 결국 단합하지 못하고 존속하다 561년 신라에 복속되면서부터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리고 우리의 역사는 삼국만 전하고 있다.
안라국 발전과 일본과의 문화교류는 결국 일본이 가야를 지배했다는 낭설을 낳는 계기가 된다. 일본 열도에서 발견되는 토기와 함안계 토기가 비슷한 특징을 가진 것으로 당시 철기문화가 발전한 안라국이 일본과의 교류를 통해 토기를 전파한 것으로 일본이 더 이상 역사를 왜곡하지 못하도록 박물관 건립은 중대한 역사적 사명이나 다름없었는데 1998년 첫 삽을 뜬 후 2003년 6월 완공하여 10월 30일 날 개관을 하였다. 박물관에 전시된 대부분의 유물은 개인소장자가 도움을 주어 토기마다 소장자의 이름이 붙어져 있다.
박물관에 도착하면 우선 토기 굽모양의 상징적 건물과 뜰에 전시되어져 있는 말산리 4호분에서 발견된 수레바퀴모양토기의 대형 상징성 전시물을 통해 가야사의 놀라운 기술과 마갑총 출토 말갑옷은 당시 철을 다루는 솜씨를 알 수 있게 한다. 마갑총 출토 말갑옷은 1992년 말산리고분군의 북쪽 능선에서 발견되었는데 길이가 6.9m, 너비가 2.8m, 길이가 1.1m로 긴 타원형으로 상당히 큰 말위에 올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함안 군북 지석묘군 을 하나 옮겨 놓았는데 지석묘 위편을 구멍을 뚫어 두었는데 성혈이라고 부른다. 가장 많은 성혈이 있는 것은 무려 398개로 성혈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증을 더해준다.
박물관은 전시실 외 외부 창을 통해 직접 생생한 고분군을 볼 수 있는 휴게실이 있으며, 영상실을 갖추고 있어 가야사 연구에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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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라국의 "수레바퀴모양토기"로 디자인이 독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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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라국에서 발견한 말갖춤새로 인해 철갑병이 강력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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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수막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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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수막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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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막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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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막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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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막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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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에 있는 또 하나의 표본석으로 고인돌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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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탄생 후 그들만의 독특한 생활방식을 통해 집단생활을 가능하게 하였을 것이라 추정한다면 그 중에서도 장묘문화는 어쩌면 가장 신성시 하면서도 중요한 하나의 의식으로 여겼을 것이라 본다. 세계 각 나라의 장묘 문화가 저마다 달라도 죽음은 곧 신이라는 영적존재에 다가가는 영혼을 위한 생에 있어 마지막 산자가 행하는 행위로 미개한 나라일수록 장묘문화는 더욱 신적인 요소가 짙게 풍겨난다.
고대사회 이 땅을 지배했던 인류는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장례흔적을 한반도 남부와 강화도 지역에 집중적으로 남겨 놓았는데 바로 고인돌무덤이다. 그동안 일부 몇몇을 제외하고는 관심조차 받지 않았던 고인돌에 신비로움을 더해주는 의문점이 남아있는데 그것이 "성혈"이라 불리는 "홈"과 "둥근 타원형"모양을 새김으로 그들은 혼백을 위로하려고 하였을 것인데 성혈의 중심에 별자리의 흔적을 찾아냄으로서 우리는 아주 오랜 옛날 어쩌면 한반도 최초의 신망인 칠성신앙을 추적할 수 있다. 흔하지 않은 칠성신앙은 전남 화순 운주사가 별자리 형식으로 각종 부처와 탑이 배치하고 그 중에서 와불은 북극성, 와불과 조금 떨어진 지역에 둥근 7개의 돌을 북두칠성으로 본다면 인류는 하늘의 별을 통해 북극성, 북두칠성을 단순한 별자리가 아니라 인간사후 세계로 낙점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별자리를 조각해 둔 것으로 경남 함안군 도항리 고인돌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 고인돌이 단군조선의 유물로 간주하고 있지만 자료가 부족한 탓에 검증하기 어렵다. 1991년 4월 국립창원 문화재 연구소 측에 의하여 알려지기 시작한 고인돌은 함안군 읍에 솟아있는 산등성을 가득 메운 도항리고분군 34호분 하층에서 발견되어 안라국 당시 고인돌에 별자리를 기록했음을 짐작케 하지만 이 인근 고인돌은 기존의 고인돌처럼 밑받침이나 기둥은 찾을 수 없는 독특한 형태로 함안군 도항리 도동 고인돌과 군북면 동촌리 고인돌을 살펴보자.
두 고인돌은 약 7k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두 개의 고인돌은 성격이 전혀 다르지만 성혈흔적은 뚜렷한 모습을 하고 있다.
도항리 고인돌은 정면을 쪼아 성혈을 파고 둥근 원형의 그림을 새겼지만 군북의 고인돌은 상부면적에 성혈을 빼곡하게 새겨 넣었다는 점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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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군을 떠나 진동방향으로 거슬러 오르다 보면 오른편에서 만나는
무진정 그리고 이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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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괴산리에 위치한 무진정(유형문화제 제158호)은 조선 명종 22년(1567)에 무진(無盡) 조삼(趙參)선생을 기리기 위해 후손이 만든 소박한 한국식 조경을 통해 전통적인 팔작지붕의 건물을 언덕위에 사뿐히 올려 인근 검암천 상류의 물을 끌어들여 물이 항상 넘쳐흐르도록 만들었지만 지금은 물길은 끊겨 버렸다.
전서공 휘열의 5세손인 조삼(趙參)선생(1506~1544)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호가 무진(無盡)이라 후손은 정자를 짓고 무진정이라 부르며 편액과 정기는 주세붕이 쓴 글씨로 추정하고 있다. 무진은 1433년(성종14) 국자감시에 합격 후 1507년 문과에 급제하고 함양, 대구, 성주, 상주의 목사와 사헌부 집의 겸 춘추관 편수관을 지냈다. 어려서부터 글을 좋아하여 1488년 약관도 안 된 17세에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1507년에 문과에 급제하니 그의 문장능력은 만인의 숭상이 되고도 남음이 아닐까 싶다.
무진정 바로 옆에 부자쌍절각이 있다. 정유재란 당시 적들이 조상의 묘를 파헤치자 무진정에서 북향 사배하고 스스로 자결한 어계 조려선생의 6세손 조준남과 그의 아들 위 계선공이 1627년 정묘호란으로 전사하니 이 두 부자의 효와 충을 기리어 세운 전각이다.
무진정 또는 이수정으로 불리는 이곳은 인공호수 중앙에 아치형 다리를 연결하고 정자를 띄워 놓고 주변은 수양버들을 비롯하여 무진정과 어우러지도록 꾸며 놓았다. 매년 석가탄생일이면 낙화놀이를 치루는 곳이기도 하며, 일반인에게 공개되어져 지나다가 차 한 잔 우려 놓고 사색에 빠져들기 딱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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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정 건너 대산마을로 들어서면 또 하나의 불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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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정에서 도로를 건너면 대사마을이 자리 잡고 마을 입구에 큰 노거수 아래 석불이 모셔져 있다. 옛 사찰은 간곳없지만 한때 이곳에는 상당하게 큰 사찰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대사(大寺) 즉 큰 사찰을 의미하는 지명과 일부 사찰 흔적 발견이 전부다. 이 중에서 마을 당산나무 앞에다 모아둔 것으로 석불은 두기(보물 제71호)만 온전할 뿐 좌상은 목이 잘리고 남은 하나는 불상이라는 사실을 겨우 알 정도로 세월 속에 방치되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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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불은 처음부터 석불군을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씩 옮겨 놓는 과정에서 가운데 좌불을 두고 양쪽으로 두 불상을 세워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석불을 살펴보면 재질이 붉고 얇게 올려져 있으며 체구가 왜소한 편이다. 부처는 스님의 승복인 가사 대신 한복차림의 옷을 두르고 양쪽 귀부분에 길 게 늘어져 있으며, 귀볼 중앙에 머리를 꼬아서 넘어간 흔적,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수인을 묘사해 두어 여느 불상과는 상당하게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가 하면 양쪽 부처의 조각수법 중 발가락까지 섬세하게 묘사해 두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불상은 통일신라 초기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지만 고려시대 작품 중에서 이와 유사한 불상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의문이 든다.
불상은 좌불이 86cm, 좌보살상이 151cm, 우보살상이 162cm 크기로 얼굴표정과 손짓만 약간 달리할 뿐 비슷한 모습을 하고 2단 연꽃대좌위에 맨발로 사뿐 올라서 있다. 석불은 위엄은 없어 보인다. 작은 체구에 풍채를 느낄 수 있는 조각은 없고 그저 밋밋하지만 머리에 두건인지 원통관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보관을 올려서고 정면을 주시하고 있다.
이 부처는 약사여래불로 짐작케 한다. 손에 든 약병으로 보아 중생의 질병을 구재하는 약사여래 부처님이 이곳에 자리 잡고 계시다는 것은 사찰이 폐허가 된 후 약사여래불을 마을 당산나무 격인 느티나무 아래에 옮겨놓고 지속적인 건강을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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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 나오면서 도동마을 입구로 진입 후 곧장 오른편을 따라 진입
그리고 잊혀져 버린듯 숨어있는
암각화
2년만에 다시 만났는데
관리가 안되어 암각화가 알아보기 힘들정도로 변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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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탄생 후 그들만의 독특한 생활방식을 통해 집단생활을 가능하게 하였을 것이라 추정한다면 그 중에서도 장묘문화는 어쩌면 가장 신성시 하면서도 중요한 하나의 의식으로 여겼을 것이라 본다. 세계 각 나라의 장묘 문화가 저마다 달라도 죽음은 곧 신이라는 영적존재에 다가가는 영혼을 위한 생에 있어 마지막 산자가 행하는 행위로 미개한 나라일수록 장묘문화는 더욱 신적인 요소가 짙게 풍겨난다.
고대사회 이 땅을 지배했던 인류는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장례흔적을 한반도 남부와 강화도 지역에 집중적으로 남겨 놓았는데 바로 고인돌무덤이다. 그동안 일부 몇몇을 제외하고는 관심조차 받지 않았던 고인돌에 신비로움을 더해주는 의문점이 남아있는데 그것이 "성혈"이라 불리는 "홈"과 "둥근 타원형"모양을 새김으로 그들은 혼백을 위로하려고 하였을 것인데 성혈의 중심에 별자리의 흔적을 찾아냄으로서 우리는 아주 오랜 옛날 어쩌면 한반도 최초의 신망인 칠성신앙을 추적할 수 있다. 흔하지 않은 칠성신앙은 전남 화순 운주사가 별자리 형식으로 각종 부처와 탑이 배치하고 그 중에서 와불은 북극성, 와불과 조금 떨어진 지역에 둥근 7개의 돌을 북두칠성으로 본다면 인류는 하늘의 별을 통해 북극성, 북두칠성을 단순한 별자리가 아니라 인간사후 세계로 낙점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별자리를 조각해 둔 것으로 경남 함안군 도항리 고인돌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 고인돌이 단군조선의 유물로 간주하고 있지만 자료가 부족한 탓에 검증하기 어렵다. 1991년 4월 국립창원 문화재 연구소 측에 의하여 알려지기 시작한 고인돌은 함안군 읍에 솟아있는 산등성을 가득 메운 도항리고분군 34호분 하층에서 발견되어 안라국 당시 고인돌에 별자리를 기록했음을 짐작케 하지만 이 인근 고인돌은 기존의 고인돌처럼 밑받침이나 기둥은 찾을 수 없는 독특한 형태로 함안군 도항리 도동 고인돌과 군북면 동촌리 고인돌을 살펴보자. 두 고인돌은 약 7k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두 개의 고인돌은 성격이 전혀 다르지만 성혈흔적은 뚜렷한 모습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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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항리 고인돌에 새겨진 원형(동심원이라 부른다) 6개(희미한 것이 더 있지만 알 수 없다)과 170여개의 성혈자국이 뚜렷하게 남아있고 이곳에서 마제석촉 23점과 단도마연토기 4점이 함께 발굴되어 이 고인돌의 주인이 당시 상당한 권력가였음을 짐작케 한다. 고인돌에 새겨진 성혈은 상부면적을 그의 차지하고 뒷면이나 밑면에는 볼 수 없다. 이곳의 고인돌에 있는 3단의 타원형은 울산 천전리 암각화와 고령 양정동 암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함안군은 유독 원심형 외 성혈만 있을 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살펴보자. 성혈자국의 배치와 깊이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천문학자가 아닌 탓에 정확하게 어느 별자리를 관측하고 새겼는지 알 수 없지만 성혈의 크기가 유독 큰 것과 유독 깊거나 너무 옅은 표현 등은 어쩌면 별자리를 관측하고 그 별의 크기 즉, 빛의 밝기를 표현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중국에서 별자리 관측기술이 넘어온 것으로 보기 그 이전에 우리조상은 상당한 별자리 관측능력을 가졌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전남 화순의 운주사에 있는 일곱 개의 칠성바위는 둥근 타원형에 북두칠성의 위치를 그대로 옮겨놓고 북두칠성의 별의 밝기에 따라 돌을 다듬어 놓았다는 것이다.
함안 도항리에서 발견된 상부 지역의 집중적으로 분포한 성혈과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깊이와 크기의 다양성이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정교한 솜씨이기 때문이며, 성혈 외 동심원을 살펴보면 겹동그라미의 숫자가 크기와 상관없이 각기 다르다는 점이다. 비슷한 크기인데도 5겹이 있는가 하면 6겹도 있고 원의 굵기 역시 차별화 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심형에 관하여 견해를 달리하는 학자들의 주장이 제각기 다르듯 아직까지 정확하게 어떤 의도로 새겼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 당시 시대상으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음으로 볼 때 별자리로 추정해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흑자들은 다산을 기원하는 상징적, 주술적 의미를 부여하지만 과연 아주 오랜 먼 역사 속에서 다산의 의미가 필요했을까? 물런 과대 표현된 울산반구대 암각화의 노출된 성기표현 및 여성의 음부로 비유하고 있지만 분명 그런 모습의 암각화가 있기 때문에 굳이 다른 표현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즉 함안군 도항리의 고인돌 암각화를 통해 상당한 지배층의 무덤에는 많은 별자리를 새김으로서 다시 하늘로 올려 보낸다는 의미로 동심은 큰 별, 또는 태양을 의미할 수 있다. 여기서 성혈을 별자리로 본다면 태양을 함께 그려 넣었다는 것은 상반된 모순을 낳는다. 그러면 동심원은 큰 별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이곳에서 떨어진 군북면 동촌리 지석묘를 찾아가 보자. 동촌리는 정면에 충분한 성혈을 그려 넣을 공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바라보면 상단부에 그렸는데 집중적으로 그려 놓은 부분에 의아할 정도로 많이 분포되어져 있다. 하늘을 올려보자. 맑은 하늘 미리내(은하수)를 보면 무수한 별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고 그중에서 빛나는 별이 유독 보이게 마련이다. 그러면 하늘로 올려보게 만든 이 성혈자국은 어쩌면 당시의 은하수를 옮겨 놓은 건 아닐까?
후대에 누군가 바위에 한자로 칠련정(七蓮亭)이라 정면에 새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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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쪽 끝에 성혈이 일렬로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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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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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돌아나와 입곡군립공원으로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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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비가 내린 뒷날이면 아카시아 향기에 취하여 걸을 수 있고, 가을이면 지천에 널려있는 밤나무가 군침 돌게 하는 입곡군립공원은 겨울철 온통 꽁꽁얼어버린 모습이 신비한 사계를 그려내고 풍부한 어자원으로 인해 봄부터 오염원이 없는 저수지로 낚시꾼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인근 상족암군입공원과 함께 지정된 입곡군입공원은 자연이 주는 신선한 아름다움을 통해 산책하는 코스로 경남 일원에서 최상급이라 말할 수 있다. 산책로를 진입하는 코스는 제방을 따라 들어가거나 저수지 끝나는 부분에 있는 다리를 통해 들어가는 코스로 나눈다. 차량을 이용한다면 입곡군립공원 안쪽 주차장에서 주차를 한 후 출발하면 된다.
입곡군립공원의 저수지는 일제 강점기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하여 만든 저수지로 함안일대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지루한 일상생활을 조금이라도 벗어나 연인끼리 혹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면 당장이라도 찾아가는 것이 좋을 정도로 사색하기 좋은 곳이다. 산위로 단풍이 물들면 호수에 비친 그림은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곳이 입곡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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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
피곤한 마음에 쉬고픈 마음은 굴뚝 같은데..
밀리는 차량 머리 위로
보이는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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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한 마음으로 하루를 쉬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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