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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 경주시 여행

허영꺼멍 2013. 8. 29.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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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과 왕족을 위한

감산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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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감산사지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토함산 준령의 서편에 위치하고 있는 감산사 대적광전에는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318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안치되어 있으며. 한켠에는 문화재자료 제95호 삼층석탑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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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보면 경주에서 흔하게 만나는 작은 사찰 정도로 보이는 이곳은 성덕왕 18년(719) 김지성이 돌아가신 부모님과 신라왕족 안녕을 위해 조성한 사찰로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전시중인 국보 제81호 석조미륵보살입상, 석조 아니타여래입상을 모셨던 곳이다. 1916년 일제 강점기 당시 경북궁으로 옮겨간 후 지금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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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과의 소통

감은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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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당시 감은사의 절터로 "문무왕"과 밀접한 관련성을 부여하는 곳으로 상당한 규모의 사찰터가 탑 주변에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문무왕이 왜군을 진압하기 위해 감은사를 짓지만 미완성상태로 죽음을 맞이하자 신문왕이 부왕의 유지를 받들어 신문왕 2년(682)에 완성하였다 한다. 지금은 국보 제112호인 감은사지 삼층석탑 2기와 일부 석재가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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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산림환경연구소

경주수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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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산림환경연구소는 서출지, 통일전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지만 입간판이 없어 통과하는 수가 있다. 경주시 불교유적 여행과 달리 숲길 여행으로 아주 색다른 경주여행을 할 수있으며, 입장료는 무료이다. 식물원과 동물원 등 다양한 테마로 도로변 좌, 우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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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향교

시도유형문화재 제1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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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유형문화재 제191호 경주향교는 본래 신라 신문왕 2년(682)에 창건한 국학이 있던 곳이며, 고려시대에는 향학으로, 조선시대에는 역시 향교로 이어져  지방 교육기관으로서의 구실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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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전과 동무, 서무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재향을 받드는 곳이며, 강당인 명륜당과 학생들의 거처인 동재, 서재는 강학을 하는 곳이다.  경주 향교가 처음 지어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성종 23년(1492)에 성균관을 중수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33년(1604)에 동무. 서무를, 광해군 6년(1614)에 명륜당과 동재. 서재를 중건하였다.

 

 

 

김씨 시조 탄생설화를 간직한

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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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이 울었다하여 계림으로 불리는 곳은 본래 시림으로 신라의 신성림이였지만 알지가 태어났다하여 그후로 계림으로 부르며, 지금은 100년을 훌쩍 넘긴 왕버들, 느티나무, 단풍나무,고목과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운 비가 있다.

 

 

 

선무도의 본산

골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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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도로 잘 알려진 골굴사는 함월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예로부터 굴법당을 짓고 전각을 세웠던 골굴암이 존재했지만 오랜세월을 통해 형체가 사라지고  일부 작은 동굴속에 모셔둔 총 12개의 석굴과 붉은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상이 남아 온화한 모습으로 자비를 실천하고 있는 곳으로 조선시대 겸재 정선이 그린 그림에는 목조전실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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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감산사지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토함산 준령의 서편에 위치하고 있는 감산사 골굴사의 역사는 1500년 전 천축국에서 건너온 광유성인이 골굴사와 기림사를 창건하였는데 그 중 골굴사는 인도사원 양식인 석굴사원형식을 반영하고 있다. 골굴사는 조선중기 화재로 소실되고 폐허로 방치되자  박씨 일가에 의하여 태고종에 등록된 사설 암자으로 전해져 왔지만 1989년 개인에게 매매된 것을 당시 기림사 주지를 역임한 "설적운 스님"이 다시 매입하여 대한불교 조계종 11교구 골굴사로 등록하여 지금은 불국사의 말사이다.

 

 

 

이해하기 힘든 의문의 무덤

괘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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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감산사지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토함산 준령의 서편에 위치하고 있는 감산사 경주 괘릉은 신라 제38대 원성왕(785~798)의 릉으로 추정하는 곳으로 사적 제26호로 지정되어 있다. 괘릉은 밑둘레 70m, 지름 21.9m, 높이 7.7m의 중형급 릉에 십이지신상을  새긴 호석을 돌리고 돌난간을 감싸 경주릉 중에서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봉분 앞에는 좌.우 일렬로 화표석, 문인석이 자리잡고 있는데 인물상이 국내에서 유일한 외국인이다.

 

 

경주교동최씨고택

중요문화재 제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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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개인 건물로 최씨 종가로 알려져 있다. 이 건물이 있던 자리는 요석궁이 있던 곳으로 전해지며, 전하는 말로는 1700년경에 건물을 조성했다 전하며,  1970년 11월 대형화재로 인하여 사랑채와 별당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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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동안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을 배출하였지만 진사 이상의 벼슬을 금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매년 1천석을 내주는 등 나눔을 실천하는 오늘날 기부문화의 선두주자 역활을 하였다.

 

 

굴불사지

보물 제1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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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굴불사터에 자리한 통일신라 불상군으로 백륜사 진입로 왼편 하나의 바위에 동쪽(약사여래불), 서쪽(아미타여래불), 남(석가모니불), 북(미륵불)을 새겨놓은 사방불로 서쪽 아미타여래불은 암벽에 몸체를 새기고 제비원처럼 얼굴 부분을 따로 올려놓고 다른 돌로 조각한 협시불을 두어 삼존불 형식을 띠며,  동쪽 약사여래불은 앉은자세이며,  북쪽 미륵불은 보살상과 관음보살을 두고, 남쪽은 본래 삼존불 형태였지만 일본인이 오른쪽 보살을 분리하여 가져가면서 중앙에 모셔진 본존불의 머리도 가져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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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불사에 관한 기록으로 삼국유사에는 신라 경덕왕이 백률사를 찾았을 당시 땅속에서 염불소리가 들려 주지승에게 땅을 파보라고 하니 그 속에 바위가 있어  사방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굴불사로 불렀다 전하지만  사찰의 역사는 알 수 없고  1985년 발굴 당시 동사라 새겨진 고려시대 기와가 발견되었으며,  삼국유사에는 13세기 중반 굴석사로 불렀다고 한다.

 

 

 

기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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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흘산 자락에 한때는 불국사를 거느린 대사찰이 있었다. 오랜 세월을 통해 지금은 오히려 불국사의 말사로 전략해 버린 안타까운 사찰이 있으니 천축국 승려 광유가 창건한 임정사로 훗날 원효가 확장하면서 오늘날의 기림사가 되었다. 기림사에는 본전인 대적광전을 필두로 삼천불전, 관음전, 명부전, 약사전, 응진전, 삼성각, 진남루, 매월당 사당이 있다.

 

 

경주남산리삼층석탑

보물 제1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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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석탑의 조성 시기는 9세기경으로 추정할 뿐 조성경위는 알 수 없다. 동탑은 모전석탑 방식의 7.04m로 서탑보다 높은 3층탑으로, 이형기단 위 탑신을 올렸지만 상륜부는 보이지 않으며, 전혀 장식을 찾을 수 없다.

 

 

 

계림안에 자리잡은

내물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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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188호 신라 내물왕릉은 계림을 통하거나 경주향교를 거쳐 방문할 수 있다. 신라 제17대 내물왕(358~402)의 릉으로 밑둘레 68m, 높이 5.8m, 지름 22m의 봉분으로 밑둘레에 큰 돌이 박혀 있다.

 

 

 

능지탑지

경북기념물 제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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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서쪽기슭 옛 중생사지로 추정되는 곳에 있는 능지탑(경북기념물 제34호)은 능지탑 또는 연화탑으로 탑의 일부가 소실되어 정확한 탑의 규모는 알 수 없지만 경주 김유신 장군의묘에서 볼 수 있는 12신상을 둘레를 따라 새겨 놓았다.

 

 

 

 

옥산정사로 불리던

독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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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정사라 불리는 독락당은 조선 중종 27년(1532)에 측면 2칸, 정면 4칸의 팔작지붕을 올린 건물로 담장을 쌓고 계곡의 축을 이용하여 은밀한 별당인 계정을 만들고 회재선생이 도학을 펼친 곳으로 자연속에 비경을 평풍으로 둘려친 그야말로 무릉도원에 자리잡고 있다.

 

 

 

 

잘 알려져 있지않는 경주 삼존불

두대리마애석불입상

보물 제1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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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 어느 석공의 손을 빌려 벽도산 중턱 서쪽을 향한 암벽을 가르고 삼존불을 조각한 후 그 위에 경주에서 보기 드물게 목조 전실을 두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체적 조각수법은 둔탁해 보이나 조금 멀리서 바라보면 신라의 미소를 엿볼 수 있다. 마애삼존불은 보물 제122호이다.

 

 

 

서악지구 국보 제25호

태종무열왕비와 무열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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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감산사지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토함산 준령의 서편에 위치하고 있는 감산사 신라무열왕릉은 사적 제20호로 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654~661) 김춘추 릉으로 밑둘레 114m, 높이 8.7m로 주변의 능에 비하여 큰 규모를 자랑하며, 무열왕릉 뒷편 4기의 릉은 누구의 릉인지 알 수 없다.

 

 

 

국내 최초의 수중왕릉

문무대왕릉

사적 제1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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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 용이되어 동해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동해바다 수중에 유골을 안치하니 곧 수중대왕릉(문무대왕릉)이다. 무덤은 섬의둘레가 200m로 동서와 남북이 십자모양을 갖추고 있으며, 가장자리에 흠이 연못처럼 파져있고 그 아래에 깊이 3.6m, 폭 2.85m, 두께 0.9m의 큼직한 돌이 물속 2m 길이에 설치하고 유골을 안치 하였다 한다.

 

 

지붕없는 박물관 속에서 만나는

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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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13점, 보물 26점을 전시하고 있는 경주박물관은  1913년 경주고적보존회가 결성된 후 옛 객사건물에 신라유물을 수집하면서 박물관의 필요성을 느낀 경주시에서 1929년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이 되고, 1975년 광복과 함께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으로 그리고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승격되었다.

 

 

 

보리사터

경주남산미륵곡석불좌상

보물 제1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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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사 경내에 위치한 경주남산미륵곡석불좌상(보물 제136호)는 옛 보리사터에서 확인된 석불좌상으로 경주 남산일원에서 가장 완전한 석불로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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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불꽃무늬와 반쯤 감은 시선과 마주하면 심장이 멎을 만큼 고요함이 묻어나는 불상으로 연꽃팔각대좌 위 불상과 광배를 각각 두었는데 광배에는 연꽃띠를 둘러고 중간 중간 불상을 새겨놓았다. 석불 광배 뒷편에는 약사여래불을 새겨놓았다.

 

 

관광 쉼터 역활을 하는

보문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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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인 관광단지로 발전하기 위해 조성된 숙박, 위락공간으로 종합관광휴양지이다. 봄이면 벚꽃이 보문호를 따라 피어나 화려함을 뽐내며, 가을이면 가로수가 고운 단풍으로 여행객을 반겨주는 곳이다.

 

 

 

경주 유일의 모전석탑

분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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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30호 분황사모전삭탑의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는데 구조를 통해 9층석탑으로 짐작하고 있다. 현재 3층으로 높이 9.3m, 기단 폭 13m, 한변의 길이는 6.5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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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의하면 선덕왕 3년 분황사가 낙성되었다는 글귀를 통해 분황사는 서기 634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며, 신라탑 중 가장 오래된 탑이다. 높이는 동경잡기에 보면 임진왜란 당시 9층으로 일본군대가 파손 후 개축을 시도하다 파손되어 3층만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경주 최고의 사찰

불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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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도 창건에 관하여 불국사의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 "불국사고금창기"에는 서기 528(신라법흥왕 15)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의 발원으로 불국사가 창건되고 진흥왕의 어인 지소부인574년에 크게 중수하였으며 당시 비로자나불, 아미타미불을 봉안하 그 후 계속 중창사업은 이어져 670년 무실전을 짓고, 751년 김대성이 크게 개수하면서 탑과 석교를 만들었다는 기록과 또 다른 설로 지금까지 알려진 삼국유사를 바탕으로 한 김성이 전세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만들고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만들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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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불교유적으로 불국사다보탑(국보 제20호), 불국사삼층석탑(국보 제21호), 불국사연화교칠보교(국보 제22호), 불국사청운교백운교(국보 제23호), 불국사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호), 불국사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불국사삼층석탑내발견유물(국보 제126호), 불국사사리탑(보물 제61호), 경주불국사경내(사적 및 명승 제1호), 불국사석조(시도유형문화재 제98호)등이 있다.

 

 

 

선도산 아래 자리잡은

서악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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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기념물 제19호 서악서원은 서악동 내 김유신 장군과 최치원, 설총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 서원으로 조선 명종 18년(1563)에 만들었다. 서악서원을 만들 당시 문신이던 이정(1512∼1571)이 경주부운 벼슬로 지방유림의 뜻을 모아 만들었지만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고 1602년묘우, 1610년 강당과 동. 서재를 다시 짓고 인조 원년(1623) 나라에서 인정하여 서악이란 이름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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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악서원 현판은 퇴계 선생이 짓고 직접 쓴 글로 최초 서악정사로 부르다 훗날 서악서원으로 바뀌고 당시 서예가 원진해가 현판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까마귀 설화가 전해오는

서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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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출지는 신라 소지왕 당시의 설화가 전해지는 곳으로, 소지왕이 궁 밖을 거동하는데 쥐가 나타나 까마귀가 가는 곳을 따라가라고 한다. 왕이 이 말을 따라 연못에 가까이 오니 한 노인이 나타나 "거문고 갑을 쏘시오"라는 글이 적힌 종이를 받쳤다. 왕은 궁으로 돌아와 거문고 갑을 화살로 쏘니 그 속에 숨어있던 궁주와 승려가 화살을 맞고죽었다 한다. 그 후 연못을 서출지라 부르며, 까마귀에게 찰밥을 주는 오기일이 생겨났다고 한다.

 

 

 

국내 최고의 걸작 불상을 모신

석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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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당시 시중이던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창할 당시에 왕명에 의해 착공하지만 석굴암이 완성되기 전에 죽게되자 국가에서 완성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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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에 모셔져 있는 본존불은 석가여래상 또는 아미타불로 보는 경향이 있다. 석가여래는 불교 창시자인 석가모니이며,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세계를 통해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는 보살로 무량수불 또는 무량광불로 불리는데 김대성이 부모를 위해 조성했다면 아미타불이 맞을 것이고, 동해로 침입하는 왜적을 물리치고자 했다면 석가야래상이 맞을 것이다. 1891년 석굴암 해체복원 당시 "마타굴"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 미타굴 이전에 수광전으로 불렀다는점으로 미루어 아미타불이 본존불임이 거의 확실시 하다.

 

 

 

과거에서 만나는 전천후 냉장고

석빙고

보물 제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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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성터에 자리한 석빙고는 총 길이 18.8m, 홍예 높이 4.97m, 너비 6.94m로 조선시대 만든 전천후 냉장고로 궁중의 음식을 보관한 곳으로 추정된다. 석빙고는 현재 위치에서 약 100m 지점에서 옮겨 온 것으로 1738년 만든 후 1742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개축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석장동암각화

경상북도 기념물 제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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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언어 암각화로 경주 동국대학교 경주 캠퍼스 옆 낮은 산허리에 위치하고 있다. 예로부터 이곳을 금장대로 알려져 있는데 금장대 석벽에 그려진 암각화는 길이 9m, 높이 1.8m로 다른 암각화와는 달리 동물의 발자국 형상이 그려져 있다.

 

 

 

옛 궁성안의 연못이었던

안압지(임해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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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지는 월지, 압지부평, 임해전지로 불렀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무왕 14년(674) 궁성안에 못과 산을 만들어 화초를 기르고 진금이수를 키웠다는 기록은 곧 안압지를 두고 하는말이며 임해전지에 부속된 하나로 추정할 수 있는 인공연못이다. 경주여행의 야경 여행지로 안압지를 손꼽는다.

 

 

 

유네스코 등재된

양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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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민속마을에는 보물로 지정된 가옥으로 50평 남짓 16세기 만든 무첨당(보물 제311호), 관가정(보물 제442호), 향단(보물 제412호) 및 다수의 중요민속자료 가옥이 있다.  양좌동 초안 기록을 보면 1819년까지 91호가 거주하였다 한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중요 민속자료 제189호인 양동민속마을은 조선초기 마을을 이루면서 대대로 살아온 월성손씨, 여강이씨의 동족 집단마을이다.

 

 

 

여름이 즐거운

연꽃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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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여행의 중심지인 첨성대 앞에서 안압지 주변까지 일대의 공터에  사계절 꽃을 심어 여행객을 불러모우는데 여름이면 연꽃단지에 피어나는 아기자기한 연꽃을 보려는 많은 여행객이 찾아드는 곳이다.

 

 

 

오릉

사적 제1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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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172호로 봉분 높이 10m 내외, 지름 20m 내외로 신라삼릉이라 부른다. 신라삼릉은 박혁거세와 알영부인 그리고 남해왕, 유리왕, 파사왕 등 신라 초기의 왕릉이다. 왕릉 내에는 혁거세왕의 지향을 받는 숭덕전과 내력을 새긴 신도비, 알영지 등이 있다.

 

 

 

이언적을 배향한

옥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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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서원에 들어서면 우선 무변루가 눈에 들어온다. 함양 동호정 정자를 오를 때 통나무로 해 놓은 계단을 이곳에서 다시 만난다.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을 배향한 사원으로 경주부윤이었던 이제민이 안강 고을 선비와 합세하여 독락당 아래 사당을 세우고 서악의 향현사로부터 위패를 옮겨와 모신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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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가 옥산서원의 사액과 서적을 하사하였는데,  옥산서원에서 전해지는 책이 무려 230종 2,197권으로 당시 이곳에 얼마나 많은 유생이 머물렀는지 짐작하게 한다.

 

 

 

신라의 궁궐터로 추정되는

월성

사적 제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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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월성은 사적 제16호로 신라시대 궁궐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하여 신월성 또는 월성으로 불렀으며, 임금이 사는 성이라 하여 재성이라고 하였다. 조산시대부터 이곳을 반월성이라 불러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부채꼴 모양의 독특한 주상절리

읍천항 주상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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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읍천항에서 해안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만나는 경주 읍천주상절리는 군부대가 철수하면서 일반인에게 알려지면서 많은 여행객이 찾는 곳이다. 보통 서 있는 주상절리와는 달리 부채꼴로 펼쳐진 세계 유일의 모습과 수직, 수평절리가 혼합형으로 확인되고 있으며, 읍천항을 따라 벽화를 조성하여 볼꺼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놓았다.

 

 

 

탑정사로 알려진

장항리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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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리사지는 통일신라시대 사찰로 추정,  금당지 좌우 동쪽과 서쪽에 있는 오층탑은 1923년 불탑은 일제에 의해 도괴되고, 1932년 서탑만 복원하였으며, 석조불대좌가 남아 있는데 당시 파손된 불상은 경주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있다.

 

 

 

자옥산 왼편 기슭에 자리한

정혜사지13층석탑

국보 제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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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신 4면에 감실형 구조를 갖추고, 2층 이상의 탑신부에서 얇고 낮은 석재를 사용하면서 높이 5.9m, 기단 너비 2.1m로 무려 13층을 올린 독특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탑은 1911년 도굴을 당한 후 1922년 정비되었지만  1998년 9월 다시 도굴을 하려다 실패하여  훼손되었는데 중간부분의 몸돌이 사라져 탑의 비례감각을 깨뜨려 놓았다.

 

 

 

진평왕릉

사적 제1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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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6대 진평왕(579~632) 김백정을 모신 왕릉으로 사적 제180호이다. 경주에서 흔하게 확인되는 흙으로 조성한 봉토분으로 밑 둘레에 자연석을 두르고 아무런 시설없이 평야 가운데 있는 특징을 보여준다.

 

 

 

삼국유사 최초의 궁궐지

창림사지

사적 제3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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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최초의 궁궐지로 기록된곳으로 창림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후 고려까지 이어오다 조선초기에 폐사되고 탑만 남았으나, 1824년 사리 장엄구를 도굴하는 과정에서 파손되었고, 이 때 조탑사실이 기록된 창림사 무구정탑원기가 발견되어 이 탑이 신라 문성왕17년(855)에 건립된 것임을 확인해 주었다.

 

 

 

경주 고분을 대표하는

천마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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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고분을 대표하는 대릉원은 미추왕릉, 황남대총, 천마총 등 총23기의 고분이 모여있는 일대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미추왕이 사후 대릉에 장사 지냈다 하여 대릉원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릉원 내 고분 중에서 유일하게 개방된 고분으로 1973년 발굴하면서 자작나무 껍질에 천마를 그린 유물이 확인되면서 천마총으로 부른다.

 

 

 

 

우주를 관측했다?

첨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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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는 높이 9.16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로 한 변이 1m인 정사각형 문을  만들고 사용된 돌은 17단으로 262개로 12단까지 흙과 돌로 채우며, 19단~20단, 25단, 26단에는 한문 우물정자형의 장대석을 설치하고  바깥으로 돌출시켜 판석을 설치,  네모난 창틀에 사다리를 이용하여 오른 흔적이 남아 있다.  첨성은 남쪽으로 향한 창이 북두칠성을 바라본다며 별을 우러러본다는 의미이다.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

옥룡사 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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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201호 경주남산탑곡마애불상군은 통일신라시대 신인사라는 사철터로 추정된다. 탑사에는 높이 10m, 사방둘레 30m의 바위전면부에 불상 암각화를 새겨 놓았는데  무려 34점으로 전례가 없는 독특한 마애불상군이다.

 

 

 

신라 패망의 장소로 알려진 유상곡수

포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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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휜의 칼날 앞에 사라져 버린 신라의 종말을 두고 포석정에서 왕이 술판을 벌렸다는 망국의 장소로 알려져 있지만 역사는 어차피 승자의 기록이 아니던가. 포석정은 중국, 한국, 일본에서 즐겨노는 유상곡수로 인공으로 만든 물길에 둘러 앉아 잔을 띄우고 자신의 순서가 오면 시를 짓는데 짓지 못하면 벌칙으로 술 석잔을 마시곤 했다고 한다.

 

 

 

황룡사지

사적 제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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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일원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황룡사지는 철처하리 만큼 훼손되어 그 흔적이라고는 몇몇 석재가 전부인 황량한 곳으로 신라 진흥왕 14년(553) 왕명에 의해 창건, 진흥왕 35년(574)에 신라 최대의 불상으로 알려진 장육존상을 모신 곳이지만 몽고군의 방화로 폐허가 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없다.

 

 

 

 

황오동삼층석탑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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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역사 앞에 있는 경주 왕오동삼층석탑은 효공왕릉 부근인 동방동 장골사지 옛터에서 통일신사 ~ 고려시대로 이어질 당시 양식을 한 석탑이 무너져 있어 1936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 탑 주변에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대좌와 불상 1구도 함께 옮겨져 있다.

 

 

 

이 외에도 경주시에는 크고작은 문화유산이 많이 있다. 경주 여행은 어떤것을 볼 것인가에 따라 코스가 결정되는데 처음 경주를 방문하는 여행객은 불국사-석굴암-보문단지-문무대왕릉 순으로하지만 경주여행을 다녀간 여행객이라면 탑이나 불상을 테마로 찾아가는 여행코스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