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당리 김씨고택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78호
궁에서 왕의 그림자로 살던 내시가 연로하여 물러나면 내시 촌을 이루어 살았다. 당시 내시라는 신분이 민가에서는 입담꺼리였기 때문에 그들만이 모여 살았다. 은퇴하여 사는 내시라 하여도 위세가 대단하여 지방 고을 수령은 꼼짝도 못할 만큼 두려운 존재들로 알려졌던 내시들 중에서 내시 촌을 떠나 지방으로 내려와 터전을 잡고 사는 내시가 있었는데 오늘의 여행지가 바로 내시로 인생을 살아온 조선시대 궁중 내시로 문관의 정삼품 당상관의 품계인 통정대부 벼슬까지 오른 김일준(1863~1945)의 고택 여행이다.
사극을 통해 왕의 그림자 역할을 하던 내시를 보아왔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내시로, 때로는 남성을 잃은 나약한 남자로 그들의 이야기를 보여주었다. 내시가 되기까지 그들만의 사연은 제각기 다르지만 남성을 제거하고 살아간다는 결정을 해야 했던 그들의 심정은 고통보다 두려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우리나라 내시는 9세기 신라 흥덕왕 때 처음 기록되고 있다. 옛날에는 개가 어린아이 똥을 핥다 고추를 잘라먹는 일이 생겨 고자가 된 아이를 데려다 궁궐 법도를 교육하여 내시가 되었다 한다. 왕의 그림자를 자청하면서 점차 내시의 영역은 폭을 넓혀 권력으로 치닫는 과정을 거치면서 천민의 자식이 신분상승을 위해 거세를 하거나 출세의 지름길로 내시가 되면서 왕의 측근에서 궁중여론을 이끄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던 것이다.
어린 나이에 성기를 거세하고 입궁하여 내빈원에서 내시가 해야 하는 법도를 배우고 140여 가지의 업무를 나눈 후 각자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인원이 300~400명 정도였다. 그들만의 품계도 있었는데 최하위 종9품 상원에서 최고위 종2품 상선으로 소학 삼강 행실 공자 맹자 대학 사서 등의 학문을 통한 승진 시험 있으며, 품계가 높아지면 처첩을 두었고, 경복궁 옆 오늘날 효자동(옛 화자동) 주변에 집을 소유하고 궁으로 출퇴근하며, 가계를 잇고자 양자도 받아 들였다 한다. 양자 역시 내시로 대를 잇는 내시집안이 생겨나기도 했는데 경국대전에 내시의 양자조건으로 3세 이전의 고자 아이를 데려오는 조건이였다고 한다.
시대를 막론하고 내시라하여 정을 통하는 사건이 없는 게 아니었다. 고려 의종 당시 의종의 유모와 결혼한 환관 정함은 권력을 이용하여 관리를 모함한 사건, 환관 백선연의 궁녀 무비와의 정을 통한 사건, 조선 태조 당시 세자 방석의 현빈 유씨와 내시 이만이 정을 통하고 사형당하는 일까지 비일비재 하였다.
▲ 대문에서 정면에서 조금 벗어나 안채로 가는길이 놓여있고 안채는 또 담벼락으로 둘러 쌓였다. 왼편으로 사랑채가 있다.
▲ 집안의 조상을 모시는 '벌묘'로 이곳에서 집안 내력 가첩이 발견되었다. 건물 오른편 끝자락으로 안채에서도 출입이 된다.
임당리 김씨고택(내시고택)이 확인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청도군 운강고택 주변에는 운남고택, 명중고택, 섬암고택, 도일고택 등 많은 고택이 있다. 문화재 등록을 위해 주변 고택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운강고택으로부터 3.4km 거리에 김씨고택을 조사하던 중 조상의 제사를 위해 만들어 놓은 별묘에서 이 집안의 내력이 담긴 축문 “‘내시촌통정김일준가세계’이 발견되면서 우리나라 내시집안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집의 주인은 내시로 정3품 벼슬을 지낸 김일준의 고택에서 확인된 가첩을 통해 1500년대부터 400여 년 간 16대를 잇는 궁중내시 집안으로 확인되었다.
일반 사가와 다른 내시집안
궁중 내시의 집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하는 궁금증이 앞서간다. 담장너머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단 한 번도 흘러나오지 않았을 김씨고택은 안채, 중사랑채, 큰사랑채, 고방채, 큰고방채, 대문간채, 별묘 등 7동과 행랑채, 광채가 있으며, 대문체 좌측에 집 주인이 거주하는 큰사랑채를 두고 우측에 사당을 두었다. 대문체에서 마주보는 중사랑채는 양아들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집으로 들어서자 대를 잇는 궁중내시 집안답게 일반 사가의 집이 남향을 고집하는 것과는 달리 임금이 계신 북서향으로 향하고 있다. 항상 궁궐을 바라보며 잠을 자고 일어나는 철저하게 계획된 집 구조를 하고 있다. 특히 눈여겨 볼 건물이 이집 주인이 머물던 큰사랑채와 내시 부인인 안방마님이 머물던 안채이다.
▲ 안채에는 곡식을 빻아던 디딜방아 흔적과 이층으로 된 독특한 고방건물과 서로 담장과 이어져 또 하나의 공간을 만들고 있다.
큰사랑채와 안채는 독립적 공간으로 만들고 안채로 통하는 통로를 하나만 만들어 놓고 큰사랑채에서 출입하는 사람을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아 다른 고택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청송군 송소고택은 여자들이 편하게 출입하도록 대문 앞에 작은 쪽담을 만들어 두는 배려가 돋보이지만 이곳은 오히려 철저한 구속을 강요하고 있다. 남자구실을 못하는 내시에게 안방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필사의 노력 이였는지도 모른다.
안채 또한 담장으로 가려 집안의 노출을 최소화 하여 공간이 폐쇄된 느낌이다. 사랑채에서 안채를 감시받지만 안채로 일단 들어서면 외부와는 완벽하게 차단되는 독특한 구조를 만들어 놓았다. 또한 집이 북서향을 향해 어두운 공간에 한줌의 빛이라도 더 끌어들이기 위해 바닥에 하얀 자갈을 깔았다. 안방을 지키고 있는 내시의 부인은 친정 부모가 사망하는 흉사가 아니면 바깥출입을 할 수 없을 만큼 통제되는 폐쇄적인 생활을 해야만 했다. 출산을 못하니 아이도 없는 안방마님 역할이 그리 녹녹하지 않음을 엿볼 수 있는 감옥 같은 흙담을 바라보며 그들의 신세타령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 안채로 들어서는 입구 오른편 벌묘로 향하는 중간에 연못이 있다.
▲ 연못 뒷편으로 안채와 벌묘로 가는 문이 보인다.
▲ 안채로 가는 문과 그 옆에 작은 헛담을 쌓아 놓았다.
▲ 대문을 지나 큰사랑채가 감시하듯 사랑채 입구를 보고 방향을 틀고 있다.
▲ 큰사랑채가 비스듬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안채로 가는 대문을 볼 수 있는 방문을 만들어 놓았다.
▲ 큰사랑채는 높은 디딤돌을 놓아 오르는 것을 쉽게 하였다.
김일준은 고종 즉위 후 홍선대원군이 개혁을 하던 1863년 출생하여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 그리고 동학농민운동(1894)에 이어 갑오개혁(1894-95)으로 근현대화로 전환되면서 내시제는 폐지되었다. 김일준이 죽은 후 달성서씨, 최영철. 김문선, 김판득씨가 대를 이었고 17대손 내시는 직첩을 받았지만 내시제 폐지로 사실상 내시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18대부터 양자가 아닌 정상적으로 계보가 이어지면서 이곳에도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고택은 사당 지붕 막새에 “강희 25년 병인 윤4월” 명문을 통해 1686년 사당과 건물이 지어진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오늘날 모습은 1800년대로 이야기하고 있다. 왕조의 몰락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면서 후손들은 내시였던 신분을 감추기 위해 조상을 외면하여야 했고, 후손은 문을 걸어 잠그지 않고 문을 밀면 열리도록 해 놓았다.
▲ 안채 담장에 사용된 돌 색상이 밝다.
▲ 큰 사랑채에서 뒷편 디딜방앗간까지 감시가 가능한 구조이다.
내시라 하면 남성이 없는 고자를 두고 말한다. 여기서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남성이 없는 고자는 적어도 고려시대까지는 내시가 아니라 환관이라는 것이다. 고려시대 원나라 환관제도가 도입되기 전까지 말이다. 환관제도가 도입되기 전에는 과거를 통해 내시를 임용하여 왕의 측근에 두고 정사를 보조했다. 그럼 환관은 누구인가? 남성으로 생식기능을 하지 못하는 고환이 없는 남자로 궁중 아낙을 보호하기 위한 필수 조건을 갖춘 남자 즉, 환관인 것이다. 환관이 궁중에 점점 늘어나면서 내시가 하던 업무를 하나 둘 가져왔고 조선조에 이르러 환관이 왕의 주요업무를 하면서 내시는 사라지고 환관이 내시가 되었다. 내시를 환관, 환자, 화자, 엄인, 내관, 내시 등으로 불리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 뒷편에서 본 전경으로 안채 뒷편은 답답해 보일만큼 창을 아껴 만들었다.
조선시대 내시는 생식기가 없는게 아니라 고환이 없어 생식기능을 잃은 것으로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달리 성관계도 가능하였다 한다. 발기가 어려워 부부관계를 도구를 사용하였다는 이야기와 발기가 가능하지만 사정을 못해 후대가 없을 뿐이라는 이야기다. 여기서 살펴보면 내시가 되기 위해 머리카락으로 고환을 묶어 피 공급을 차단하면 저절로 떨어져 나가는 방법으로 남근은 남겨두고 고환만 제거했는데 이를 거세라 하였다. 음경까지 자르는 경우는 죄인에게 벌을 내리는 궁형이 있다. 우리가 아는 내시의 조건과는 사뭇다른데 이는 중국 환관들과 같이 보는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다. 중국은 남성을 제거하여 말려 단지에 넣어 보관하였다 죽으면 다시 봉합하여 같이 묻었다 하는데 그 이유는 수태기능이 없는 노세로 환생하는 속설 때문으로 우리나라 환관은 고환만 제거한 것으로 보여진다. 어찌되었던 고환을 제거한 이유인지는 몰라도 환관들이 양반보다 14~19년을 더 수명연장을 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고택을 빠져 나오면서 후손의 마음도 이해는 가지만 살짝 엿본 문짝 너머 먼지 쌓여 있는 모습은 후손된 도리가 아니지 않는가하는 생각이 들 즈음 이 건물도 관리가 안되 머잖은 날 하나남아 있는 내시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건물이 사라지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지자체는 후손에게 건물을 양도받거나 구입하여 시골에서 살고자하는 사람에게 임시거쳐로 내주면서 사용하도록 하여 훼손으로부터 지켜나가면 어떨까 싶다. 사람의 손떼가 묻지 않는 고택의 수명은 길지 않다는것을 익히 보면서 자라지 않았던가.
방문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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