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고택여행
삼족당을 거쳐 선암서원까지
고택여행의 출발점이기도 한 동산리 처진소나무 숲길을 지나 동청천 벼랑위 삼족대 그리고 동천교를 지나
만나는 선암서원까지 달려가 본다.
천연기념물 제295호 청도 동산리 처진소나무는 흡사 봄날 가지를 아래로 늘어 뜨린 수양버들을 닮았다하여 유송이라 부른다. 높이 14m, 가슴둘레 2.04m 로 약 200년으로 추정하고 있는 독특한 소나무로 전하는 이야기로 한 정승이 청도를 지나는데 소나무가 큰 절을 하듯 가지가 밑으로 처졌는데 그 후로 가지는 축 늘어진 모습으로 오늘날에 이른다 한다.
삼족대
김대유(1479∼1551)는 문신출신으로 정암 조광조의 문인으로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숙부 탁영 김일손이 처형되면서 부친인 동창 김준손과 함께 호남으로 유배길 에 오른다. 조정 출사의 꿈이 일순간 무너져 버린것이였다. 중종 1년(1506)이 왕으로 오르면서 귀향에서 풀려난 김대유는 다음해인 중종 2년(1507) 장원급제로 진사에 등용되지만 고향으로 내려왔고, 중종 13년(1518) 조광조의 건의로 현량과가 설치되고, 어수선한 조정에서 새로운 인재 등용을 바라던 중종에 의해 향리에서 천거되어 전생서 직장을 거쳐 중종 14년(1519) 현량과 병과로 급제 여러 직책을 거쳐 정언에 오르자 이를 사직하고 칠원 현감이 되었지만 그해 조광조가 임금이 될 꿈을 꾼다는 소문과 함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이란 글을 벌레가 파먹도록 한 후 이를 임금에게 보여주면서 조광조와 그를 따르던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기묘사화로 인해 현량과가 폐지되고 급제자를 취소하자 현감직 마저 내놓고 낙향하여 후학 양성에 전력하며 지냈는데 중종이 죽고 인종 1년(1545) 직책이 복과되어 조정에서 부르니 왕명을 받들어 먼 길을 가다 중도에 병이나 다시 돌아와 은거하다 명종 7년(1552) 2월 74세로 졸했다.
남명 조식(1501~1571)선생은 김대유를 백가지 재주를 지니고 있지만 세가지 재주에 만족해 삼족당이라 부른다며, 무예가 출중하며, 운문산 주변 말을 달리며 사냥도 즐기는 호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남명 조식이 김대유를 읊은 시로는 天上雲門曲, 人間鹿門客, 傍觀百具足, 自得三爲畫 즉 하늘 위의 운문곡조에 땅위의 큰 인물이 김대유(金大有) 곁에서 보니 백가지 재주를 갖추었는데 스스로 세가지에 만족하고 있구나“라며 그의 재주를 아까워하며 세상을 덮을 영웅이라 하였다.
▲ 기묘사화로 관직을 잃고 낙향하여 빗물 한 방울도 허투로 흘러 보내지 않는다는 동창천 암벽 위 소나무 숲에 정자를 지어 후학
양성에 노력하며 지냈던 한국형 정자로 그의 호 삼족당을 따서 삼족대라 한다.
기묘사화로 정치판은 요동쳤고 김대유는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당시 낙향하면서 비통한 마음을 스스로 달래며 내려와 탁 트인 전망을 배경으로 물이 맑아 맑은 청(淸)을 사용하여 지명이 청도인 동창천 암벽 위 정자를 짓고 은둔생활을 시작하였을 것이다. 어쩌면 다시 현량과가 부활하여 조정으로 부르는 그날을 기다리며 긴 세월을 초야에 묻혀 지내기로 작심을 하였을 수도 있다. 호는 삼족당으로 "나는 60세가 넘었으니 壽(수)에 足(족)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도 할 만큼 했으니 榮和(영화)에도 足(족)하고, 朝夕(조석)으로 식사도 남 못지않게 할 수 있으니 食(식)에도 足(족)하다. 그러니 나의 號(호)를 三足堂(삼족당)이라 하리라“ 하였다 한다. 시대가 바뀌었다. 중종시대가 끝나고 인종시대가 열리면서 복과되는 기쁨을 누렸지만 이미 세월이 너무 많이 흐른 탓에 먼 길을 단숨에 가지 못하고 병을 얻어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 올 때 그는 세상의 허무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 경북문화재자료 제189호 삼족대 그리고 1973년 세운 김대유 신도비와 참봉 김용희의 중수기문이 있다. 조선 중기에는 조식,
박하담, 주세봉 외 여럿 문인이 강론하던 장소로 이용된 곳으로 김대유의 호를 따서 삼족대라 불렀다.
삼족대는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여느 다른 정자와는 달리 사방으로 토담을 쌓고 정자로 들어서는 일각문과 2칸의 방, 부엌, 우물이 있어 일반 사가처럼 보이지만 한국적 미를 두루 갖춘 정자로 알려져 있다.
삼족대와 함께 이곳에 또 하나의 인물로 사림파가 무오사화를 통해 죽임을 당하던 시기 낙향한 인물 소요당 박하담이 있다. 비슷한 정치인생을 걸어온 두 사람은 이곳 삼족대 아래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빈 낚싯대 드리우고 보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이 두 사람을 두고 조선시대 청도의 양대 기둥이라고 한다.
선암서원
청도 고택의 주인
삼족당 김대유, 소요당 박하담을 모신곳
▲ 선암서원으로 들어서는 문은 2개가 있다. 하나는 정문인 대문채이고 또 하나는 강당에서 계곡으로 나갈 수 있는 사주문이다.
선암서원은 삼족당 김대유, 소요당 박하담을 모신 곳으로 1568년 향현사였던 곳을 선조 10년(1577) 현 위치로 옮겨와 선암서원으로 불렀다. 선암서원이 자리한 곳은 동창천이 휘감아 흐르는 곳으로 주변에서 보기드문 경관을 뒤로하고 있다. 선암서원도 대원군 서원 철폐령을 비켜가지 못하고 훼손, 고종 15년(1878) 소요당 후손에 의해 다시 중간되어 선암서당으로 불렀다 한다.
선암서원은 일반 사가와 서원이 담장 하나로 구역을 나눈 후 문을 통해 출입하도록 하였다. 대문을 열면 정면으로 행랑채와 뒤편 소요당 그리고 오른쪽 사랑채 득월정으로 토담을 세우고 안채와 사랑채를 나누고 있다. | ||
▲ 대문채에서 바라보이는 중사랑채이다. 안채가 있는 공간에서 강단으로 가기 위해 중사랑채 문을 통과해야 하는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 대문채 오른편에 있는 득월정으로 안채와 담장 하나를 경계로 하고 있는데 대문채에서 강단으로 갈때 안채는 개방형이지만
득월정은 담장으로 인하여 보이지 않는다.
▲ 득월정에서 바라 본 안채이다. 안채에서는 득월정이 잘 보이지 않지만 득월정에서는 안채가 잘 보이는 구조이다.
▲ 화촉대가 있는 강단으로 이곳에 배롱나무가 꽃 피우는 여름이면 무척 아름답다.
▲ 사주문 양 옆으로 오랜 배롱나무 가지가 강단을 향해 뻗어 있다.
▲ 소요당에 특별한 건물이 바로 장판각이다. 지금은 텅 비어 있지만 서책과 목판을 보관하던 칸대는 아직도 남아 있다.
운강고택 주변 닫혀 있는 고택
운남고택, 명중고택, 섬암고택, 도일고택
▲ 도일고택
도일고택은 소요당 박하담의 12세손 박시묵의 동생 박기묵(1830~1911)이 합천군수 재임(1899) 당시 만든 집으로 훗날 박재수(1894~1973) 소유로 넘어오면서 도일고택이라 불렀다.
▲ 섬암고택
섬암고택은 문화재자료 제268호로 소요당 박하담의 12세손 박시묵의 둘째 아들 박재소(1840~1873)이 분가하면서 만든 집으로 사랑채와 대문채는 1990년 도로공사 당시 철거되어 안채, 중문채, 도장채가 남아 있다.
▲ 운남고택
운강고택 서쪽에 있는 운남고택은 문화재자료 제270호로 조선 후기 소요당 박하담의 12세손 박시묵의 셋째 아들 박재충(1850-1869)이 분가한 집으로 고택으로 들어서면 운남재 현판 글씨가 멋을 잔뜩 부렸다. 운강고택과 담장 하나로 살아가면서 담장 지붕에 올리는 망와(望瓦)를 올리지 않았다. 운남고택의 돌담은 은근 정이 가는 곳이다.
▲ 운남고택 장독대가 멋 스럽다.
운강고택
소요당 박하담이 은둔하며 세운 서당
그 땅 위 후손이 짓은 고택
▲ 운강고택을 들어서려면 운남고택 옆 담장을 따라 걸어야 한다.
소요당 박하담(1479~1560) 선생은 성종 10년(1479년) 9월 20일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에서 출생하여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던 중 연산군 4년(1496) 20세에 동향 선배인 탁영, 김일손, 오졸재, 박한주 등이 무모사화로 화를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충격에 빠졌고, 다음해 결혼하였다. 30세가 되던 중종11년(1516) 생원시에 합격,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 을묘사화 등 시대적 배경에 절망하여 벼슬에 대한 미련을 접고 은둔하면서 서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는데 노력하였다, 명종 15년(1560) 82세의 나이로 세상과 작별하고 다음해 비슬산 칠엽동에 장례하였다. 그의 호는 낙향 후 조성한 소요정의 이름을 따서 소요당이라 불렀다.
▲ 세월이 흘러 대문 하나는 철문으로 교체되어 있다.
소요당 박하담이 세상을 뜨고 순조9년(1809)이 되던 해 11대손 박정주(1789~1850)가 분가하면서 살림집으로 가옥을 만들었고. 순조 24년(1824) 박시묵이 중건, 1905년 박순병이 중수를 거쳐 오늘날 6대손 박정주 선생이 소유하고 있다.
▲ 현재 중요민속문화재 제106호로 9동의 건물에 80칸의 규모를 가진 조선후기 사대부집이다. 건물은 사랑채와 안채, 사당이 각자
‘ㅁ ’자 영역을 두고 그 영역 세 곳이 합쳐 '品' 구조를 하고 있다. 대지는 총 1,700여 평이다. 운강고택은 정치적 격동기를 피해 고향
으로 낙향하여 서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며 은둔생활을 했던 곳이다.
▲ 아쉽게도 이곳도 문아 닫혀 있다.
▲ 곡식을 보관하는 곡간이 2곳, 안채와 행랑채 등에 딸린 부엌이 3곳, 신분별 화장실 4곳이 있는데 행랑채는 측간, 안채는 뒷간,
하인은 통시라 하였다고 한다.
▲ 옛 건물 외벽은 가문마다 저마다 독특한 그림을 기왓장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큰사랑채와 중문간채 사이 꽃담에 한문으로 길할
길(吉)을 중앙에 두자를 모아 적고 양 측면에 기왓장을 포개는 방식으로 표창을 하나씩 두고 또 길(吉)자를 한자씩 넣는 기왓장
그림을 한 면 가득 그려 놓았다.
▲ 중사랑채와 고방이 보인다.
▲ 대문간채로 들어서는 입구
▲ 독특한 모습의 꽃담
사랑채와 중문간채 사잇 담장에 고택에서 보는 기왓장으로 ‘길(吉)’과 함께 담벼락에 신경쓴 흔적과 함께 선비의 곧은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운강고택 주인장은 가끔 만화정에 올라 세월을 보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운강고택에서 약 400m 지점에 동창천변 벼랑 위 1856년 만화정을 올렸다. 지금은 919번 지방도가 그 옆을 통과하는데 금전교 지나 왼편이다. 별서로 지어진 또 하나의 공간인 셈이다. 운강고택 주변에는 운남고택, 명중고택, 섬암고택, 도일고택 등이 모여 있다.
또 하나의 공간 만화정
▲ 만화정은 답답한 집안을 벗어나 동창천을 내려다보며 머물던 곳으로 살림채가 딸려 있어 잠시 머무는 공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동창천이 흘러 밀양 박 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섶말이라는 마을을 지나면서 비단내로 불리는 동창천변 언덕에 운강 선생이 철종7년(1856) 만들어 공부하며 학문을 강의했던 만화정 있다. 한국동란 당시 만화정에서 운문들판을 내려다보았는데 주변에 20만 명이 넘는 피난민이 모여들자 이를 위로하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이 찾아 이곳 만화정에서 하루 묵었다 전하는 만화정은 40 이곳 운강고택에 딸린 일종의 별채이다.
▲ 만화정은 젊은 인재를 교육하기 위해 사재를 동원하여 배움을 길을 열었는데 오늘날 장학제도의 근간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속 정치가 그러하듯 오늘날의 정치 역시 옛날과 별반 다른 것이 없다. 권력의 속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청도로 내려와 동창천 자락에 정자를 짓고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삼족당 김대유 선생과 소요당 박하담 선생의 가슴 한편 묵지근한 세월을 담아놓고 동창천을 찾은 철새에게 술 한 잔 건네며 자신들의 처지를 하소연 하였을지 모를 일이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 오는 길
청도에서 유명한 한재미나리 밭으로 향하다
▲ 한재미나리를 손질하고 계신다.
이곳 미나리는 청정자연암반수를 이용하여 재배한다하여 알려진 곳으로 봄, 가을 미나리 출하시기가 되면 이 일대는 차량으로 몸살을 앓는 곳이다. 싱싱한 미나리 향과 함께 삼겹을 쌈싸먹는 곳으로 먼곳에서 미나리를 먹기위해 이곳을 찾기도 한다.
가을 미나리가 끝나 이제 끝물이라며, 봄미나리가 나는 봄철에 오라며 끝물 미나리 한 묶음을 포장해 주셨다. 가격은 8천원으로 다른 곳에 비하여 비싼편이지만 맛과 향이 윌등한 곳이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많은 생각이 스쳐간다. 고택여행을 준비하고 떠났지만 문이 닫혀 있는 안타까움에 담장너머로 속살을 엿봐야 하는 우리나라의 암담한 문화재 현실은 언제쯤 고쳐질까.
좋은여행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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