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건너 남해로
상주리각석을 찾아서
어딜가?
왜 그 먼곳을 또 가냐고?
글쎄..볼것이 없긴 하지.
▲ 실안낙조 전망대
옛날에는 남해대교를 통과하여 완행버스를 타고 상주해수욕장으로 가는 길목 금산에 내려야 했던 길을 이제는 남해고속도로 사천에서 내린 후 사천시를 관통하여 삼천포대교를 지나 남해읍 외곽으로 진입하여야 한다. 그 길목 중간에서 만나는 사천시 실안낙조길에서 잠시 머물러 본다.
▲ 전망대에서 바라 본 마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 거북선 첫 출전 사천해전 그 장소 사천해역은 선조 25년(1592) 전라좌수영 여수를 떠난 거북선은 처음으로 사천해역으로 접어 들었다. 첫 해전을 통해 왜선 13척과 왜군 2,600여명을 사살하였다 한다. 지금은 주변 해안을 따라 원시업으로 알려진 죽방렴이 설치되어 장관을 이룬다.
▲연륙교에서 바라 본 늑도
▲ 초양도와 늑도를 잇는 아치형 교량
▲ 사천에서 초양도를 잇는 삼천포 대교
▲ 삼천포대교 사이로 본 아두섬 ?
▲ 장구섬 ?
▲ 삼천포대교
▲ 늑도에서 창선을 잇는 교향
연륙교를 지나 남해로 GO~
그리고 만나는
남해상주리석각
기념물 제5호
우리나라에 있는 우리 선조의 흔적을 왜 중국 서불이라는 이름으로 각색하려 드는가.
두모계곡에서 부소대로 오르는 등산로에 첫 발을 딛는다. 남해 금산으로 오르는 길목 중에서 가장 평탄한 코스이자 잘 알려져 있지 않는 코스로 봄이면 털진달래 만발한 숲길이 부소대로 안내하는데 뜻밖에 부소대는 진시황의 아들 부소가 유배되어 머물면서 부소대라는 이름이 생겼고 그 속에 암자가 부소암이라는 것이다. 진시황의 아들이 우리나라 그것도 최남단 섬에 위치한 남해금산에 유배를 왔다고? 오늘의 여행은 두모계곡에서 부소대로 향하는 길목에서 다소 황당한 추리력을 펼쳐 보고자 한다.
▲ 두모계곡에서 출발하는 첫 출발지 등산로는 길이 협소하여 일렬로 올라야 한다.
두모계곡 입구에 주차장이 생겨졌다. 주차를 하고 산길을 따라 접어들면 두 사람이 겨우 비켜갈 정도의 산길이 나온다. 한동안 산길이 폐쇄되어 있다가 다시 열린 길이지만 남해 금산으로 오르는 코스 중에서 가장 먼 거리라 스쳐가는 사람 구경도 하기 힘든 곳이다.
▲ 출발지에서 500m 지점에서 만나는 등산로는 점점 밀림속으로 들어가는 착각을 불러 온다.
산길을 따라 오르면 크고 작은 바위가 등산로를 가로막거나 주변에 장승처럼 버티고 그 사이로 길을 열어 둔다. 한때 이곳에서 경작을 한 흔적인 담벼락을 돌아 주차장으로부터 800m 지점까지는 거의 평탄한 숲길이 이어지다 조금씩 경사가 이어진다. 본격적으로 경사길이 시작되는 1km 지점에 도착하면 오늘 찾아 나선 ‘상주리각석“이 등산로 바로 옆에 있다. 처음 이 각석과 대면하였을 당시는 양아리각석이였는데 언제 바뀌었는지 안내판에는 상주리각석으로 표기되어 있다.
▲ 바위 왼편 하단 부분에 남겨진 그림. 개인적으로 주변의 흙을 전부 걷어내서 확인을 하고 싶다.
상주리 각석은 바위에 ‘상주리 서블과차‘ 즉, 중국 진시황 때 불로초를 구하러 온 서불이 이곳을 지났다는 의미의 '서불과차'로 해석되는 문자를 남겼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길을 따라 더 오르면 부소대가 나오는데 전설에 의하면 진시황 맏아들 부소가 간신배의 모함으로 진나라를 탈출하였는데 때마침 불로초를 찾아 나선 서불을 만나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하여 바위를 “부소대”라 한다. 중국 기록에는 진시황은 직언을 하는 부소를 북쪽 변방으로 보내 상군에서 몽염의 군대를 감독하게 하지만 진시황이 죽자 조고가 조칙을 고쳐 막내아들 호해를 즉위시키고 부소, 몽염, 몽의를 죽임으로서 진나라는 멸망했다고 한다. 전설이 어찌되었던 이 먼 이국땅에 진시황의 맏아들 이야기가 왜 존재하는지 그것도 궁금증을 유발시킨다.
▲ 한문 각자를 찾아 보려했지만 흔적을 식별하기 어려웠다.
오늘 이곳을 찾은 이유는 한동안 암각화 관련하여 잊고 지내다 우연한 인터넷 기사를 보면서 다시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사건이 생겼다. 좌측 상단에 ‘古旨十月十日十月十八日吉辰(고지 시월 십일 시월 십팔일 길신)’이란 각자와 “○○○공도 ○○○석장수” 라는 일종의 제작자가 표기되어 있는 것을 확인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 또다시 “김민각공이 그리고, 최금○석장수”라고 판독을 하였다는 것은 실로 놀라웠고 다시 길을 떠나 그 각자를 확인해 보려 하였으나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실패하였다. 당장 탁본이라도 확인하고 싶었지만 일반인이 탁본 하는 것은 훼손하는 일이라 일단 인터넷 기사를 신뢰하기로 했다.
▲ 바위 뒷 부분에서 내려다 본 모습
가을 단풍 물든 10월 10일 숲길을 헤집고 두 남자와 먹을 것을 짊어진 일행들이 계곡을 거슬러 올랐다. 양반차림을 한 김민각공과 이곳에서 유명한 석장수에게 거북형상을 한 바위에 뭔가 그려진 종이를 던져준다. 풍수지리 적으로 바다로 빠져 나가는 기를 막기 위한 비보 책으로 바위에 그림을 새기 도록하였다. 돌 앞에는 짊어지고 올라온 맛있는 전통음식이 차려지고 산신에게 제를 올리고 석장수는 거북 바위에 홈을 파기 시작한다. 10월 18일 무려 8일간에 걸쳐 작업을 완료하자 김민각공은 기뻐하며 앞으로 경사스러운 좋은 일이 마을에 생길 것이라 하였다.
▲ 잘 보시라. 어떤 표현인지를..(남해군에서 벽화로 만들어 놓은 그림)
고지(옛 고(古), 맛있을지(旨) 즉 맛있는 옛날음식을, 길신(길할 길(吉), 날 신(辰) 즉 기쁘고 경사스러운 일이 생기는 날이란 의미이다. 궁금증은 더해간다. 8일간 치성을 드리며 만든 작품은 무엇이며, 어떤 경사스러움을 말할까? 그리고 한 가지 의문으로 석장수의 이름은 왜 새겨져 있을까하는 것이다. 또 당시 연호는 왜 새기지 않고 날짜만 적었을까 하는 것이다.
▲ 왼쪽에서 바라본 모습. 탁본을 잘못하는 사람들로 인해 글자체가 많이 변형되어 있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6호 남해 상주리석각은 울산광역시 천전리각석이나 고령 양전동암각화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암각화이다. 일부는 이를 두고 사냥하는 모습을 기록한 상형문자로 고대 환웅 또는 초기 고조선의 그림 문자로 추정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확인된 암각화를 통해 근접해 보면 근거가 희박하다. 또 별자리인 성좌도라는 주장도 나왔는데 바위에 신분차이가 있는 듯 보이는 두 명의 이름이 나왔다는 것, 조각이 흡사 붓글씨처럼 굵기가 있다는 점을 통해 별자리와는 무관한 내용일 가능성이다.
▲ 남해군에서 추정하고 있는 당시 제작하는 방법.
전북 진안군 마이산은 돌탑으로 유명하고 돌탑을 만든 이갑룡 처사가 남긴 수많은 부적을 아직도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오늘날 해독이 불가능한 바위그림 역시 이갑룡 처사처럼 독특한 부적을 바위에 옮겨 놓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큰 바위에 그것도 왼편 아래쪽 한 귀퉁이에 새겨진 그림은 조각하기 편하게 왼쪽부터 파기 시작하다 그림을 다 그렸는지 아니면 그리다 중단했는지 모르겠지만 바위의 일 부분이다 는 점 역시 독특하다. 금산에서 만나는 바위는 아주 큰 글씨체로 바위에 온통 한자를 적어 놓았다. 특히 봉화대가 있는 정상 근처로 가면 오히려 글씨가 없는 바위를 찾는 게 어려울 정도다. 그런데 좋은 의미로 날 잡아 가을날 새긴 것이 한 귀퉁이에 알 수 없는 형상이 전부다.
▲ 거북바위 건너편 계곡의 암벽
거북바위 바로 앞에는 깊은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건너편 절벽에는 깍두기를 썰어 놓은 듯 네모난 바위가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고 거북바위 앞으로는 큰 바위가 비스듬하게 올려져 있는데 그 바위를 자세하게 살펴보면 금산에서 보기 드문 모습으로 대형 초식공룡의 발자국으로 추정되는 크기가 일정한 간격이 확인된다. 또한 이곳 바위에서 남해안 바다를 바라보면 능선을 헤집고 보이는 낙조가 환상적이다. 빛내림이 좋은 바다를 단풍이 머무는 가을에 마주한다면 이 얼마나 즐거웠을까 싶다.
▲ 거북 바위 앞 바위에 공룡발자국으로 추정되는 홈이 경사면을 따라 있다.
▲ 건너편에 보이는 바위 형상이 흡사 주상절리를 닮았다.
▲ 해가 지면서 남해바다에 낙조가 떨어진다.
▲ 거북바위 앞 바위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바다가 뜨겁게 달구어 지고 있다.
▲ 부소대로 오르는 등산로가 잘 조성되어 있다.
▲ 하산길 등산로 주변에서 둥글둥글한 바위 사이로 길을 열어준다.
▲ 등산로 길이 협소하고 미끄러워 주의를 하여야 한다.
전국의 암각화를 찾아 여행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 암각화를 만들 당시 무엇을 보고 만들었을까하는 추정 이였다. 결국 추정에 한계를 느끼고 포기를 하였고 10여 년간 암각화를 찾지 않다 최근 우연한 기회에 다시 찾다보니 새삼 옛 기억이 떠오른다.
우리나라의 고대기록에 관한 학설 대부분은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학설과 용어가 아직도 수정 없이 사실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에 가슴 아플 뿐이며, 일부 개인이 조사하여 근거로 제시하면 받아 들여 검토가 이루어지는 풍토가 필요하다고 본다. 지금 별자리를 주장하는 분은 상당한 자료를 통해 주장하지만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바위에 구멍을 성혈로 부르는 것 역시 구멍에 동물의 피를 뿌려 천신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의미로 발표하지만 이미 그것이 별자리임을 증명하는 많은 근거 자료가 나와 있다.
즐거운 여행을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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