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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수원] 화성을 걷다.

허영꺼멍 2014. 3. 19. 10:54

 

 

 

화성을 따라 거닐다.

 

화성행궁을 돌아나와 되돌아 가는 길을 걷기로 하였다. 정조대왕동상을 시작으로 화서문을 거쳐 성벽을 따라 서북공심돈~북포루~북서포루~북서적대~장안문~북동적대~북동치~북동포루~화홍문~동북각루(연화수류정)~북암문~동북포루~동암문~동장대 순으로 이동을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 수원화성 그리고 가르키는 지점들

 

수원화성은

 

느릿느릿 쉬어가며 걷는 길, 연초록 잎 사이 완연한 계절이 햇살에 녹아난다. 성벽 모퉁이를 돌아 설 때 사도세자를 향한 아들 정조의 끝없는 사랑함이 느껴진다. 어제의 미래이자 오늘의 현실이 스쳐가는 순간 정조는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노론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화성을 만들고 그 속에서 노년을 보내려 하였을까?

 

▲ 정조대왕

 

현재나 과거나 권력을 탐하는 세력은 존재하였고 노론과 소론의 당쟁으로 인하여 뒤주에 갇혀 죽어야 했던 비운의 사도세자 그 이후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은 특별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는데 바로 수원에 화성행궁을 짓고 그 주변을 화성을 쌓았다. 당시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면 엄청난 국력을 동원한 도전이기도 하였다.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으로 알려진 영우원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 명당으로 알려진 수원 화산으로 정조13(1789) 옮겨오면서 강력한 왕도정치 실현을 위해 평산성 형태인 수원화성을 조성하게 된다. 17941월에 착공, 17969월 완공 후 전쟁으로 인한 전소와 훼손 그리고 대대적인 원형복구를 통해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12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 화서문(보물 제403) 등이 있다.

 

 

▲ 서북공심돈 / 보물 제1710호                   

 ▲ 벽에 그려놓은 화서문

정조는 아버지를 옮겨 모신 수원 현릉원을 정기적으로 능행하면서 묵직하게 가슴을 짓눌렸던 아픔을 바람에 하나하나 색을 입혀 날렸을 것이다.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스쳐가고, 낯선 이들과 눈이 마주치기도 하며 또 다른 이야기가 저 모퉁이 돌아서서 기다리고 있다.

 

정조대왕이 수원 화성행궁과 화성를 만들려고 하자 대신은 재정부담을 고려하여 백성을 부역으로 동원하거나 승려를 동원하도록 건의하였으나 정조대왕은 이를 거부하고 석수, 목수, 단청공기, 벽돌장, 미장, 대장장, 조각장 등 기술자는 부역으로 차출은 하지만 일꾼에 비하여 더 놓은 품삯을 계산해 주었고 일반 일꾼 역시 품삯을 주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방안을 지시했다.

공사에 투입된 약 70여만 명의 전문인력과 일반 백성 모두에게 충분한 보상을 한 것으로, 여름철 노동으로 허약해지는 인부를 위해 척서단 약을 내려주는가 하면 상품과 잔치도 열어 주며 공사를 독려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성성역의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쌀1(15)5냥이였는데 전문직은 매일 돈 42, 일반 백성은 25, 전문직 중에서 석수는 보조 1명을 포함하여 매일 돈 45푼과 쌀6되를 지급했다고 한다. 특히 무노동무임금 원칙이 아니라 당시 질병이 걸린 노동자를 진료 및 치료기간 중에도 매일 쌀 1, 1전씩을 지급했다고 하니 당시로서는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 동북포루에서 바라 본 전경으로 북암문과 동북각루(방화수류정)이 조망된다.

 

규장각 문신 정약용의 성화주략(1793)을 지침서로, 재상이던 영중추부사 채제공이 총괄 그리고 조심태의 지휘로 17941월에 착공 17969월에 완공하였다. 화성행궁 그리고 십리성벽을 28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완성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철처한 계획과 특수고안된 거중기와 녹로 등이 사용으로 공사가 가능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당시 공사 현장을 기록한 200여년 전 공사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1801 발간)를 통해 현장의 숨소리까지 엿볼 수 있다. 화성성역의궤는 축성에 관한 계획 및 동원된 인부의 인적사항 및 공사에 관한 모든 정보를 아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 화성열차 정류장 옆 화성 출발지점에 위치한 정조대왕동상

 

 ▲ 서일치 전경. '치'란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돌출된 시설로 성벽에 접근하는 적군을 쉽게 공격하도록 만든 시설로

화성을 따라 10개의 치가 있다. 치는 뀡을 의미하는데 이는 뀡이 자신의 몸을 잘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하기 때문이며, 치성이라

부른다. 서일치는 서북각루와 서포루 사이에 있다.

 

 

▲ 돌출되어 있는 '치'

 

 ▲ 서일치에서 성벽 구멍으로 바라 본 서북각루

 

 ▲ 서북각루는 성곽보다 높게 만들어 주변을 감시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하는 시설이다. 비상시에는 각 방면의 군사지휘소의

역활을 수행하는 곳으로 서북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 하나이다,

 

 ▲ 높은 위치에 있는 서북각루에서 바라 본 전경으로 성벽을 따라 장안문 까지 조망된다.

 

 ▲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 서북 공심돈

 

 ▲ 서북공심돈과 연결된 화서문

 

▲ 올려다 본 서북공심돈

 

 ▲ 성벽에서 바라 본 서북공심돈 출입문

 

 ▲ 화서문

 

 ▲ 북포루에서 바라 본 서북공심돈으로 포루는 성곽을 바깥으로 돌출시켜 만든 치성 위에 지은 목조건물로 군사들이 망을 보면서

대기하는 곳이다. 북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하나로 정조 19년(1795) 2월 20일 완공되었다.

 

 ▲ 북서포루

 

 ▲ 포루를 외부에서 본 모습. 독특한 디자인이 눈에 띈다.

 

 ▲ 성루를 따라 계속 이동할 수 있다.

 

 ▲ 성 아래로 지나가는 화성열차.

 

 ▲ 북서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하나로 화서문과 장안문 사이에 있다. 정조 18년(1794) 9월 24일 완공되었으며, 포루는 성벽의

일부를 바깥으로 돌출시킨 치성 위 3층 내부를 비워두고 화포공격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 북서포루에서 본 전경

 

 ▲ 장안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북쪽 문으로 수원화성의 정문이다. 정조 18년(1794)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5일 날 마쳤다. 장

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자 백성들의 안녕을 의미한다.

 

 ▲ 장안문에 올려져 있는 잡상 모습.  장안문은 우진각 지붕(지붕면이 사방으로 경사지게 만든 형태)으로 웅장하게 만들었으며, 성문

바깥에 반달모양의 옹성을 쌓았다.

 

 ▲ 북서적대에 놓여 있는 홍이포

 

 ▲ 장안문 측면 전경

 

 ▲ 옹성에서 바라본 장안문

 

 ▲ 북동포루

▲ 북동포루

 

 ▲ 장안문을 나와 북동포루에 도착하면 동북각류와 동북포루가 조망된다.

 

 ▲ 언덕 위 자리잡은 북동포루

 

 ▲ 화홍문

 

 ▲ 화홍문 앞에 있는 조각상

 

 ▲ 북수문은 화성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수원천 위에 북수문과 남수문으로 불리는 두 개의 수문이 있다. 북수문은 정조 18년

(1794) 2월 28일 공사하여 정조 19년(1795) 1월 13일 완성하였으며, 별칭으로 화홍문이라 부른다.

 

 

▲ 화홍문 전경

 

 ▲ 화홍문 옆에 있는 북암문

 

 ▲ 수원 방화수류정(동북각루)은 보물 제1709호로 정조 18년(1794) 10월 19일 완성되었다.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

이지만 정자 기능을 함께하고 있는 아름다운 곳으로 다른 각루와 달리 독특한 지붕형태를 하고 있다. 

 ▲ 동북포루를 향하다 본 전경으로 북암문과 방화수류정(동북포루)이 눈에 들어 온다.

 

 ▲ 앞에 연못을 조성하여 정자를 만난 듯 하다.

 

 ▲ 동북포루

 

▲ 동북포루

 

▲ 동북포루를 내려서면서 만나는 동장대(연무대)

 

 ▲ 동암문은 성곽 후미진 곳에 만들어 놓은 숨겨진 비밀문으로 군수품을 조달 할 목적으로 만든 암문이다. 화성에는 총 5개의 암문

이 있는데 정조 20년(1796) 3월 25일 완공하였다.

 

 ▲ 동장대에서 동북 공심돈으로 가는 성벽 길

 

 ▲ 동장대

 

 ▲ 동장대에서 바라 본 동북공심돈이 지금 수리중이다.

 

 ▲ 동북공심돈

 

 ▲ 창룡문

 

사대문 마다 옹성을 쌓고 치성과 여장을 높여 적으로부터 공격을 유리하게 하며, 군사를 보호하는 등 기능성을 갖춘 성이자 요새이로 둘레가 5.7km, 높이가 4~6m로 유형원과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였다. 수원성은 벽돌을 이용하였는데 이는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벽돌집 제도를 북한파 실학자들이 수원화성을 만드는데 제의하였고 그 결과 오늘날 수원화성을 두고 석전교축(石塼交築)으로 만든 성이라 하고 있다. 당시 수원화성에는 화성행궁을 비롯 많은 건물을 조성하였으나 한국동란으로 소실되는 아픔을 통해 화성행궁 일부였던 낙남헌만 남았으며, 성벽 역시 많은 부분 파손되었다. 이후 화성성역의궤를 통해 1975~1979년 대대적 복원을 하여 오늘에 이른다.

 

 

팔달문은 보물 제402호이며, 사발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의미로 화성의 4성문 중 남쪽 문이다. 팔달문은 정면 5, 측면 2카의 중층 문루를 만들고 주변에 반달형 옹성과 좌우 성문을 방어하는 적대를 두었다. 특히 지붕에 잡상 장식이 올려져 있어 시선을 끈다. 화서문은 공사를 지휘하였던 채제공이 화서문이란 편액을 남긴 곳으로 화성의 4성문 중 서문이다.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

 

조선 제 22대 임금 정조(正祖 1752~1800)는 영조 28(1752) 사도세자와 혜빈 홍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첫째 의소세손이 3살로 요절한 후 태어나 원손으로 그리고 영조 35(1759) 명장전에서 왕세손으로 책봉되었으며, 세손궁 사부로 영조의 정통 계승자가 영조임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김종수와 남인 출신의 실학자 안정복을 임명하였다.

 

 

소론과 남인계 인사를 등용하며 반대로 생부였던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된 노론벽파와 갈등을 일으킨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는 당시 영조가 노론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사를 이끌어 갔지만 이와 반대로 소론을 지지하자 노론은 정신병으로 몰아 뒤주에 가두고 결국은 죽게 만든다. 사도세자가 죽을 당시 정조는 8살로 아버지를 구원하려 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사도세자가 서로 정치적 이견으로 죽는 과정을 지켜본 정조는 최대한 몸을 낮추고 지내게 되지만 노론은 뒷날 후환이 두려워 세손을 제거하려 하지만 세손궁 홍국영에 의해 실패로 끝난다. 정조가 24(1775)이 되던 해 영조는 세손을 통해 대리청정을 맡긴다. 당시 노론의 좌의정이던 홍인한의 반대가 대단하였지만 영조는 세손에게 대리청정 및 병권과 순감군권을 넘겨주었고 영조는 죽임이 임박할 무렵 사도세자를 공격하였던 문서를 공개하고 83세 나이로 1776년 영조가 승하하자 애도기간 5일을 지낸 뒤 26살 나이로 제22대 왕위를 계승하였다.

 

정조는 왕위 계승 당일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강조하며 노론을 압박하였고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된 외척과 벽파 세력을 홍국영을 앞세워 재거작업을 하는 동시 노론이였지만 정조를 지지하는 인물은 과감하게 등용하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사도세자를 장헌이라는 존호를 올리며 장헌세자라 부르며 복권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정조는 양주에 있던 사도세자의 무덤 수은묘를 영우원으로 격상하였다가 수원으로 옮겨 현릉원으로 고쳐 부른 후 능행을 정기적으로 하다 현릉원 주변에 화성과 행궁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정약용에게 지시하였다. 그 결과 1794년 착공하여 1796910일 완공되었는데 기존 화강암 석축방식이 아닌 벽돌을 사용하였으며, 무거운 벽돌을 쌓기 위해 거중기를 고안하여 사용하는 당시로서는 첨단 방식이 동원된 축성이였다. 정조는 60살이 되면 왕위를 순조에게 물려주고 수원화성행궁에 내려와 노년을 보내려 하였지만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조의 죽음 그리고 아버지와 떨어진 장소에 묻혔다가 1821년 효의왕후가 승하하면서 효의왕후와 함께 오늘날 자리에 합장 되었다.

 

 

화성의 절반을 따라 도는 길이라 안내지도 한 장 구하고자 안내소를 방문하였으나 매표를 해야 받을 수 있다는 말에 이곳이 정조가 만들려고 했던 그 공간인지 실망감이 앞서갔다. 성곽을 따라 돌며 여행을 하고자 하였으나 성곽으로 향하는데 매표를 해야하는지, 화성열차를 타면서 끊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매표부터 하라니 일단 매표하고 받은 안내서는 왜그리 글자체가 작은지 노인은 지도들고 찾아나서기도 힘들 듯 하였다. 옛 성곽을 찾는 외지인이 받은 지도는 너무나도 알뜰하게 절약하여 만든 탓에 여행을 하는데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성벽 주변 맛집과 커피숖 화장실이 표기되어 있다면 하는 생각이다.

 

 

 

화성여행은 걸어서 하루면 성을 전체 다 돌아 볼 수 있다. 혹시 이곳에서 화성열차를 타고 여행을 할 계획이라면 찾지 않는게 좋을 만큼 화성열차는 여행과는 거리가 먼 하나의 돈벌이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승차와 동시에 출발하면 목적지까지 그냥 달린다. 가끔 안내를 하지만 안내는 대충 넘어가는 식이고, 달리다가 갑자기 안내원이 내리실 분 손들라고 할 뿐이다. 화성 성곽이 상당한 규모로 여행객에게 4대성문 또는 중요한 지점에서 열차가 정차하여 몇분간 설명을 해주고 내려 사진을 찍을 수 있어야 하지만 그런것이 없다. 부산 태종대처럼 내렸다 다시 탈 수 있는 열차도 아니다. 단순하게 성을 따라 절반에 해당되는 화성행궁 가까운 곳에 내려 놓을 뿐이다.

 

시간이 촉박하여 여행을 단축하여 하려면 화성열차를 이용하지 말고 차라리 택시를 이용하여 여행 할 것을 권하고 싶다. 또한 화성관련 안내원의 태도도 지적하고 싶다. 많은 여행객에게 시달려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여행당일 불쾌함은 말할 수 없었다. 다시는 수원을 여행 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안내서를 요구하는데 어디서 왔냐며 되묻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었던 여행길을 접는다.

 

 

 

 

1편 화성행궁

2편 화성

 

즐거운 여행하시길 바랍니다.

http://blog.daum.net/okgol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