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년 씨앗이 꽃피운 아라홍련
박물관 입구 수련을 내려다 본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모네(Claude Monet)는 1906년 청아한 하늘이 물속에 노닐며 연분홍색과 노랑색 수련이 핀 작품을 남겼는데 그 가지가 오늘날 소더비경매에서 약 550억원에 낙찰되었다 한다. 연꽃이 피는 시기보다 약 2~3주 전에 피어나는 수련의 아름다움을 모네의 시선으로 한번 만나보면 명화 한 점 마음에 담아 가는 여행이 될 것이다.
▲ 아라홍련 그 고운 자태를 만날 수 있는 탐방대
연꽃은 무한의 아름다움이자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 강렬한 색상으로부터 자유로운 마음의 등불을 닮은 은은한 연분홍 아름다운 소담스런 이야기는 도심에 멍든 궁핍 속 피곤함으로부터 웅크린 말들이 피어나며 활력을 가져다준다.
연꽃이 피어 있는 연못으로부터 조금 멀리 떨어져 바라보면 초록빛의 향연이 펼쳐진다. 봉우리를 틔운 연꽃과 아직 피어나지 않은 봉우리는 탐방객의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하다. 연밭으로 점점 다가서면 형형색색 화려한 연꽃이 떼지어 피어나고 그 속으로 여름이 깔려져 있다. 연초록 개구리밥부터 연 줄기에는 우렁이가 알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고 그 사이로 어린 개구리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인기척에 연잎 뒤로 숨느라 바쁘다.
▲ 아름답게 개량된 연꽃과 달리 화려하지 않은 색상이 곱다.
▲ 700년 지나 개화를 하여 벌써 뿌리를 나눈지도 몇년이 흘렀다.
▲ 이보다 더 고울 수 없다.
▲ 아라홍련의 그 고운 자태
함안군박물관에서 만나는 연꽃은 좀 특별하다. 언론에서는 고려시대 감성을 담은 전통 연꽃이라며 칭찬일색이지만 일반인이 본 함안 아라연꽃은 평범한 연꽃이다. 함안 아라홍련의 출발은 2009년 함안군 성산산성을 발굴하는 과정에 연씨가 발견되었고 연대측정 결과 고려시대로 추정 확인되었고 다음해인 2010년 연씨가 발아하여 700여 년 만에 꽃을 피웠다는 것으로 현재 씨앗으로 번식하지 않고 뿌리로 번식하면서 약 150촉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여름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연꽃과는 크게 다른 모습은 아니지만 고려시대 불교 탱화에 그려졌던 그 연꽃의 순수한 색상을 가졌다 한다. 고려시대 이후 개량되지 않은 순수혈통을 가진 연꽃인 셈이다.
함안박물관
연지를 지나면 곧장 박물관으로 들어선다. 박물관 야외 주차장에 주차를 한 후 박물관 여행을 하며, 요금은 무료입장이다.
▲ 박물관 전경
박물관에 전시된 가야시대 흔적을 통해 기억의 저편에서 가물거리는 안라국을 떠 올릴 수 있다. 안라국은 가야시대 함안 땅을 군림했던 집단이지만 안라국이란 명칭은 생소하다.
▲ 박물관 뒷편에 위치한 함안 말이산고분군 탐방로 안내
안라국이라는 지명보다 함안에서는 후대 사람들에 의하여 아라가야가 더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신라에 복속되기 전까지 인근 가야국과 함께 철기문화를 꽃피우면서 이웃한 일본과 외교를 통해 문물을 전파하는 등 정치적인 안정을 보였지만 가야국은 결국 단합하지 못하고 존속하다 561년 신라에 복속되면서부터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리고 우리의 역사는 삼국만 전하고 있다.
▲ 수레바퀴모먕 토기
박물관은 전시실 외 외부 창을 통해 직접 생생한 고분군을 볼 수 있는 휴게실이 있으며, 영상실을 갖추고 있어 가야사 연구에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말 철갑옷
박물관에 도착하면 우선 토기 굽모양의 상징적 건물과 뜰에 전시되어져 있는 말산리 4호분에서 발견된 수레바퀴모양토기의 대형 상징성 전시물을 통해 가야사의 놀라운 기술과 마갑총 출토 말갑옷은 당시 철을 다루는 솜씨를 알 수 있게 한다. 마갑총 출토 말갑옷은 1992년 말산리고분군의 북쪽 능선에서 발견되었는데 길이가 6.9m, 너비가 2.8m, 길이가 1.1m로 긴 타원형으로 상당히 큰 말위에 올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함안 군북 지석묘군 을 하나 옮겨 놓았는데 지석묘 위편을 구멍을 뚫어 두었는데 성혈이라고 부른다. 가장 많은 성혈이 있는 것은 무려 398개로 성혈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증을 더해준다.
▲ 아라가야에서 출토된 암막새
안라국 발전과 일본과의 문화교류는 결국 일본이 가야를 지배했다는 낭설을 낳는 계기가 된다. 일본 열도에서 발견되는 토기와 함안계 토기가 비슷한 특징을 가진 것으로 당시 철기문화가 발전한 안라국이 일본과의 교류를 통해 토기를 전파한 것으로 일본이 더 이상 역사를 왜곡하지 못하도록 박물관 건립은 중대한 역사적 사명이나 다름없었는데 1998년 첫 삽을 뜬 후 2003년 6월 완공하여 10월 30일 날 개관을 하였다. 박물관에 전시된 대부분의 유물은 개인소장자가 도움을 주어 토기마다 소장자의 이름이 붙어져 있다.
▲ 강명리 마애불
강명리 마애불로 박물관 외부에 있다. 강지마을 길가에서 수습된 마애불을 2008년 함안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옮겨 온 작품으로 높이 225cm, 너비 66cm으로,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칠서정수장에 있던 공룡발자국이 박물관으로 옮겨져 왔다. 중생대 트라이아이스 후기(약2억 2천만 년 전) 쥐라기를 통해 백악기까지 이 지구상을 1억5천만년 정도 군림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공룡은 한반도에 발자국은 숱하게 남겨두고 홀연히 사라졌다. 1982년 고성 덕명리에서 공룡발자국이 발견된 이래 한반도에도 공룡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열어 놓고 뜻있는 학자들의 연구와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지층에 깔려있던 공룡발자국이 하나 둘 공개되면서 더 이상 한반도는 공룡의 불모지가 아닌, 공룡의 지상낙원으로 거듭 재조명되고 있지만 아쉽게도 인식부족으로 관광객의 발길은 아예 끊어지고 일부 학생층만 찾는 실정이다.
1993년 6월27일 낙동강변 칠서산업단지 공단조성과정에서 공룡발자국이 두 개의 지층에서 발견되었는데 지층의 차이가 250cm으로 70여개의 발자국 세 종류가 발견되었다. 함안 칠서지방공단을 조성할 당시 공룡발자국이 화석지대가 발견되어 함안은 새발자국과 함께 인접한 낙동강 지류에서 공룡발자국이 나옴에 따라 함안군 일대가 상당한 늪지로 형성되어 있지 않았을까 추정할 수 있다. 지금도 함안군은 상당한 늪지를 가지고 있으며 공룡발자국은 이곳 외 진동, 고성과 가까운 여항산 일대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공룡 발자국은 34~36cm, 깊이 2.7cm, 길이 37cm로 네발로 걷던 용각류의 직립 보행한 흔적으로 추정된다. 용각류 외 육식성인 조각류 발자국도 주변에서 발견됨에 따라 이 일대에서 우연하게 남겨진 발자국이 아님을 짐작케 하고 있다. 이곳 발견지와 가장 가까운 마산의 호계리 고용발자국과 비슷한 것으로 보아 당시 이 일대 공룡의 흔적을 연구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공룡발자국은 발가락까지 선명할 정도로 보존이 잘되어져 있으며 발견된 지층은 중생대 전기 백악기 퇴적층으로 1억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경상계 하양층군 함안층 회적색 셰일층 층리면에 속하는 지층에서 발자국 70여개가 발견되었으며 1993년 12월 27일 문화재자료 제205호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 초식공룡 조각류의 두종류 및 용각류 1종류의 발자국이 나타난다. 1번은 길이36cm, 폭 26cm으로 세 개의 발가락과 발톱이 없는 것으로 보아 초식공룡 조각류로 뒷발의 보행흔적만 있는 것으로 보아 2족 보행을 하며, 보행 폭은 106cm로 7개가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다.
2번은 1번과 다른 종류의 공룡으로 역시 발톱이 없는 것으로 보아 초식공룡 조각류로 추정되지만 뒷굽치 부분이 타원형이 아닌 안쪽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아 다른 초식공룡 조각류로 판단된다. 발자국 길이는 30cm, 폭은 28cm이다. 2족 보행의 흔적으로 걸음 폭은 76cm으로 1번에 비하여 다소 덩치가 적은 것으로 보이며 6개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있다. 3번은 보편적으로 보이는 용각류로 앞발과 뒷발 9개씩 18개의 발자국이 뚜렷하게 남아져 있다. 타원형의 발자국은 앞발의 경우 길이 36cm, 폭 24cm이며, 뒷발은 46cm, 폭 40cm, 걸음 폭으로 앞발과 뒷발 각각 79cm, 98cm이다.
▲ 박물관 뒷편 쉼터
▲ 말이산 고분군으로 향하는 탐방로
말이산고분군
박물관 뒤편 탐방로를 따라 오른다. 이정표에 “함안 말이산고분군”으로 되어 있어 잠시 멈칫했다. 어린시절 고분군을 뛰놀 때 분명 도항리고분군과 말산리고분군으로 나눠져 있던 곳이 오늘날 말이산고분군으로 개칭되어져 있었다.
▲ 여름색이 짙게 드리운 고분군 전경
말이산고분군은 사적 제515호로 옛 도항리고분군(사적 제84호/면적 41만 1340㎡) 및 말산리고분군(사적 제85호/면적 2만 200㎡)이 2011년 하나로 통합되면서 사적 제515호로 재지정되었다. 함안군 가야읍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고분군은 옛 아라가야시절 역대 왕과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아라가야의 흔적으로 말이산 구릉을 따라 남-북으로 약 1.9km 능선길에 위치하고 있다.
말이산은 본래 머리산의 소리음을 한자로 표기되는 과정에서 말이산으로 즉, 우무머리 산(왕족의 무덤이 있는 산)이라는 의미이며, 함안군 지명에서도 말산리가 등장한다. 현재 관리가 되고 있는 봉토무덤은 약 37기 이지만 구릉을 따라 이어지며 약 100여기를 확인할 수 있으며 원형을 잃은 흔적까지 약 1천여기로 추정하고 있다.
고분군은 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지만 대부분 훼손, 상당수의 유물은 도굴되어 버렸으며, 주로 앞트기식돌방(굴식에서 시체를 넣은 관을 안치하는 네모형 방)식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34호로 지정된 고분은 산의 정상을 전부 차지하며, 도항리고분은 구릉을 따라 100여기가 늘어서 있다.
▲ 말이산 능선을 따라 도열하고 있는 고분
▲ 함안군천 앞 도로
▲ 고분에서 바라 본 함안 검암리 방향
▲ 고분 정상에서 마주하는 함안가야 시내 전경
대표적인 발굴을 살펴보면 1917년 일본인 이마니시가 발굴한 자료가 함안고분의 최초 발굴로서 무덤의 높이가 10m로 가장 크며, 무덤 밑지름이 40m에 이른다. 무덤 안은 석실을 만들어 시체를 위에서 내려놓고 여러 개의 판석을 잇대어 덮어 만드는 [수혈식 석실묘]로 밝혀졌다. 잊혀져가는 가야사에는 일본이 단단히 한몫을 하였는데 바로 “임나”에 관한 해석 때문이다.
함안과 "임나"에 관하여 살펴보면 일본서기에 임나일본부/안라일본부가 등장한다. 즉, 안라국인 아라가야를 두고 말하는 것이며, 지금의 함안이다. 삼국유사에 안라국은 대단한 세력으로 부상하여 김해세력과 대처하게 됨을 밝히고 있다. 일본에서 아라가야 사에 관한 대대적인 연구를 통해 아라가야 고분의 유적을 도굴해서 가져가 마치 자신들의 주장이 정당함을 내세우고 있지만 그것조차 허구이다. 함안에서는 여느 지역과 달리 일본문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이 70년대까지 일부 남아 있었을 뿐 일본인 무덤이나, 일본인 비석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 왜 "임나"가 등장해서 이처럼 골머리를 속이고 있는가. 일본에서 발견된 내용에는 "재안라제왜신(在安羅諸倭臣)"이란 표현이 있다. 안리에 있는 왜신 즉, 사신이 안리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안리를 안라국으로 본다면 지금의 대마도를 두고 임나로 불렀다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보면 일본이 가야지역 우수한 철을 수입하기위해 왜신과 장사꾼이 머물던 곳을 대마도에 설치하고 안라국 인접에는 일본 무역상이 머물던 지금의 영사관 정도 존재하지 않았나 싶다.
함안군 여행은 안라국을 거쳐 고려시대까지 보편적 여행이 가능하다. 또한 여행지가 산재해 있지만 알려져 있지 않아 다소 여행에 불편함은 감수해야 하지만 사전에 충분하게 조사하여 떠난다면 하루코스로도 많은 여행지를 두루 살펴 볼 수 있다.
즐거운 여행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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