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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정읍] 최치원 선생을 모신 무성서원

허영꺼멍 2014. 11. 10. 17:06

 

 

 

최치원 선생을 모신 무성서원

 

무성서원을 찾아 나섰다. 가을이 되면 무성서원은 은행나무가 가을을 재촉한다. 사적 제166호 무성서원은 신라 말 유학자인 고은 최치원(857?) 선생을 모신 곳으로 최치원이 이곳 태산군 태수로 부임하면서 그 인연이 시작되었다. 최치원은 7년간 선정을 베풀고 강원도 간성 태수로 전임되자 주민들은 고운 최치원 선생을 기리기 위해 조선 성종 15(1484) 월연대에 생사당을 세우고 태산사라 부르면서 오늘날 무성서원의 시초이자 대원군 서원 철폐령에도 남았던 47개 서원 중 한 곳이다.

 

▲ 대부분 마을 외곽에 위치하는 서원과는 달리 마을 중간에 서원이 자리잡고 있다.

 

무성서원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다른 서원보다 작은 규모로 서원의 형식을 약간 변형된 느낌이 드는 곳 같지만 이곳에도 동재와 서재가 있었다. 동재는 담장 밖에 위치하고 있는데 현재 서재는 사라지고 동재만 남아있어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이곳에 동재와 서재가 없다 말한다. 누각을 통과하면 동재와 서재 그리고 중앙에 강당과 뒤편으로 사당을 두는 형식과는 달리 현가루를 지나면 곧장 강당이 조망되며, 강당 중앙이 뻥 뚫린 창이 없는 공간으로 뒤편 태산사로 향하는 내삼문이 현가루에서도 보인다. 현가루와 강당 중간 왼편에 200~300년으로 추정되는 은행나무 1그루와 내삼문 오른쪽에도 1그루가 있으며, 협문을 통해 강수재로 향하며, 독특하게 주변에 불망비를 세워놓았다.

 

▲ 무성서원 정문 역활을 하는 현가루

 

현가루 편액은 19011010일 태인군수로 내려온 정3품 손병호 글씨로 재임시기인 1904년 글을 적은 것으로 거문고와 비파처럼 줄이 있는 현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한다는 의미이다. 현가루에는 좀 이색적인 것으로 학동들이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 고누놀이 그림판이 새겨져 있어 어느 시절을 막론하고 수업은 지루하고 노는 것은 즐거웠던 것으로 보인다.

 

▲ 다른 서원과는 달리 입구 담장 앞으로 좌우 비석이 즐비하게 놓여 있다.

 

▲ 강당건물인 무성서원

 

태산사는 고려 말 훼철되었다 성종 14(1483) 정극인이 세운 향학당이 있던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으며, 명종 4(1549) 신잠의 사당을 짓고 배향을 하였고 추가로 정극인 안세림, 정언충, 김약묵, 김관을 배향하면서 숙종 22(1696) 최치원과 신잠의 사당을 합쳐 무성이라는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개편되었다 한다. 서원은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지금의 태산사는 헌종 10(1844) 세운 것이며, 편액은 석전 글씨로 알려져 있다.

 

▲ 동재와 서재가 강당 앞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협문을 통해 드나들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 협문을 나서면 만나는 보호각 속에 자리한 비석들

 

▲ 동재 건물인 강수재

 

▲ 서호순 불망비

 

여느 서원과 같이 강학영역과 제향영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서호순 불망비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1894년 철종 즉위년에 세운 것으로 비면에 현감 서호순불망비라 새겨져있으며, 규모는 높이 1.23m, 폭은 0.36m, 두께 0.16m 이다.’

▲ 신용희 불망비

 

서호순불망비와 함께 있는 신용희불망비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1925년에 세운 것으로 비신에는 통정대부 전비서감승 신용희불망비라 새겨져 있으며, 규모는 높이 1.16m, 0.45m, 두께 0.18m 이다.’

 

▲ 강당에서 바라 본 삼문

 

서원은 정문 현가루를 시작으로 정면에 강당을 두고 오른쪽 협문을 열고 나가면 2기의 비각과 강수재가 있으며, 오른쪽으로 신용희불망비와 서호순불망비가 있다. 강당 뒤로 내삼문을 거쳐 위패가 모셔진 태산사로 들어선다. 강당은 중앙 3칸의 마루가 앞뒤 통으로 트여져 있는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 강당 중앙에는 창이 없고 공간이 앞 뒤 개방되어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 태산사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 위치한 무성서원은 최치원의 위패를 봉안한 곳으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이 서원은 신라 말 유학자인 최치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이다. 태산(태인)군수를 지낸 최치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조선 성종 15(1484)에 세워 태산사라고 불렀는데, 조선 숙종 22(1696)에 나라에서 무성서원이란 이름을 내렸다. 현 건물은 헌종 10(1844)에 다시 고친 것으로 치치원 외에도 조선 중종때 태인 현감을 지낸 신잠과 유학자인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 김관 등의 제사를 함께 모시고 있다.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을 모면한 몇 안 되는 서원 가운데 하나로, 2층 문루인 현가루와 강당, 강수재 등 건물이 예전 그대로 남아있다. 또 참배객 명단인 봉심안, 서원의 규약집인 원규 등 귀중한 서원 연구 자료도 보관되어 있다.’

 

▲ 태산사 정면

 

무성서원에는 고은 최치원 선생의 영정이 있었지만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정조 7(1783) 하동 쌍계사에 있던 최치원 영정을 무성서원에 이양할 뜻을 밝혀 1784년 무성서원에 봉안하였지만 순조 25(1825) 서원 강당이 소실되자 1831년 영정을 모사하여 봉안하고 쌍계사 영정은 보관하였지만 1968년 국립중앙박물관 측에서 문화재 지정 목적으로 반출 후 반환을 하지 않고 있다. 지금 영정은 1923년 어진화가 채용신이 다시 그린 작품으로 전북도립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한다.

 

 

 

 

무성서원에도 가을이 물들었다. 제향공간인 태산사 내삼문 오른쪽 담장에 노거수 은행나무 샛노란 잎사귀가 태산사 뜨락을 노랗게 물들여 놓고 있었다. 서원이지만 동재와 서재가 없다. 앞뒤를 터놓은 강당에서 올라서면 태산사로 향하는 내삼문과 정문인 입구가 곧장 시선과 마주하는 단순하면서도 독특한 공간을 두고 있다.

 

 

무성서원 주변 둘러보기

 

무성리삼층석탑

 

▲ 석탑 그리고 옆에 집처럼 보이는 곳이 작은 절집이며, 그 속에 석불이 안치되어 있다 한다.

 

무성서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8호인 무성리삼층석탑과 불상이 있다. 방문 당일 석탑은 확인하였지만 불상은 보이지 않았다. 탑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이 탑은 인근의 무성리 석불입상과 함께 미륵사에 전해지는 것으로, 현재는 절 앞 온 위에 높게 돌을 쌓아 터를 마련하고 그 위에 탑을 세워 놓았다. 원 위치에서 이곳으로 옮겨 세웠기 때문에 제작 당시의 모습은 알 수 없지만, 1층 탑몸에 비해 2,3층은 그 규모와 높이가 작다. 지붕돌(옥개석)은 완만하게 수평으로 처리되었으며. 그 폭이 두텁지 않아 경쾌한 모습을 보여준다. 탑의 꼭대기 장식부분이 일부 남아 있으나, 이는 훗날 보완한 것이다. 이 탑은 제작기법으로 보아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 석탑

석불을 찾아 탑 옆에 있는 건물로 들어가 보았지만 아무리 불러도 인기척이 없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걸까. 사람이 없는 집을 다 헤집고 들여다 볼 수 없어 석불은 만나지 못한 채 물러서야만 했다. 비록 보물급 문화재는 아니라 하여도 석불을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는 것에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개인소유라면 문제는 다르겠지만 석탑처럼 석불 역시 옛 사지에 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현재 석불 안내판은 절이라는 건물 앞에 서 있을 뿐 석불은 볼 수 없다.

보물 제1181호 향약

 

무성서원 길목에 태인 고현동 향약이 있다. 보물 제1181호로 뭘까 싶어 찾아보니 허망하기 짝이 없다. 낡은 건물과 잡초 무성한 마당 그리고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닫혀 있는 건물에 무슨 보물이 있을까 싶어 안내글을 다시 한 번 살펴본다.

 

▲ 잡초 무성한 건물 내부

 

▲ 대문 장식

 

▲ 삼강오륜을 강조하고 있는 대문장식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이 향약은 전라도 태인현 고현동에서 결성한 마을 자치규약으로, 조선 선조 때부터 1977년까지 약 400년 동안 작성된 총 29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헌 가운데 태산 향약안. 고현동약 그리고 동네 사람들끼리 맺은 계와 관련된 동계좌목. 동중좌목 등 24책은 향약자료로 분류할 수 있으며, 남학당기. 상선록 등 5책은 향약 관련 자료이다. 이 향약 자료는 정극인(1401~1481)이 조선 성종 6(1475)에 이곳으로 낙향하여, 도의선양과 상호친목 그리고 권선징악의 미풍양속을 주민에게 권장하기 위해 만든 태인동중향음서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결국 보물 제1181호는 찾아가 봐야 볼 수 없는 것인데 국도변에 200m 지점이라며 안내를 표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마을에는 비지정 문화재인 정순왕후태생유지비 보호각이 현재 수리중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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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여행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