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학후모 시초 남계서원
사적 제499로 남계서원은 정여창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서원으로 명종 7년(1552) 강익 선생을 중심으로 지방 유생이 모여 건립을 시작으로 명종 21년(1566) 나라로부터 사액을 하사받고, 1561년 사우가 완성되어 정여창 위판을 봉안했다. 남계서원은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후 1603년 나촌으로 옮겨 복원했다 다시 1612년 옛터인 오늘날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 서원 주변을 정비하고 단장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서원은 조선시대의 사설 교육기관이자 선현들을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남계서원은 조선 초기 성리학자이며 동방 5현으로 불리는 일두 정여창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1552년 개암 강익을 비롯한 지방 유생들이 건립하였다.
이 서원은 소수서원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서원으로 1566년에 명종 임금에게서 하사받은 사액서원이다. 출입문인 풍영루와 강당, 동재, 서재, 경판고(장판각),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급한 경사지에 사당을 제일 높은 곳에 두고 출입문까지 일직선상으로 배치하였는데, 이는 전학후묘의 배치 형식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며. 이후 각 지역에 건립되는 서원은 대부분 이러한 배치 형식을 따르게 되었다. 남계서원은 정유재란(1597)때 소실되었으나 1612년 현재 자리에 다시 세웠으며, 홍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헐지 않고 존속한 서원 중 하나이다.‘
▲ 외부에서 바라 본 풍영루
▲ 풍영루 단청칠
▲ 풍영루에서 바라본 강당
▲ 풍영루 화려한 디자인과 채색
▲ 풍영루 문살 틈으로 본 강당
홍살문을 지나 풍영루로 들어선다. 정면 강당으로 가는 길목 좌우에 동재와 서재 그리고 각각 개별적인 연못을 두고 서재 앞에는 묘정비가 서 있다. 또한 강당 오른편에 작은 건물이 경판고이며, 서재 뒤로 관리사와 문간채로 가는 문이 열려 있다. 강당 뒤편으로 가파른 언덕 위는 제향공간으로 전사청과 사당을 두고 내삼문 좌우에 배롱나무를 심었다.
▲ 내부에서 바라 본 풍영루
풍영루를 떠받치고 있는 1층 기둥은 다른 서원과 달리 돌기둥을 사용하였다. 본래 풍영루는 다락집이 없는 형태로 삼문형태로 존도문이라 부르다 후에 다락집을 올려 오늘날 풍영루로 불리게 되었다. 안내글에 의하면 풍영루는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에서 바람을 쏘이고 노래하며 돌아오겠다’ 라는 증점의 뜻을 바로 여기서 느낄 수 있다하여 풍영루라 이름 지었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기수와 무는 춘추시대 전설속에 나오는 곳이며, 기문은 정여창 선생의 후손인 조선 말기 문장가 오담 정환필(1798~1859)이 지었다 한다. 풍영루 안쪽에는 옛 이름 준도문이 걸려 있다.
▲ 풍영루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강당 건물과 오른쪽 동재 그리고 왼편으로 묘정비각이다.
홍살문을 시작으로 풍영루에서 강당을 거쳐 사당까지 일직선상에 중요 건물을 배치하고 풍영루에서 동재와 서재 앞에 계단을, 동재와 서재에서 강당을 오르는 계단을, 강당에서 내삼문으로 오르는 길에 계단을 각각 두었으며, 동재와 서재 그리고 각각의 네모 반듯한 연못을 따로 두는 등 의도적으로 공간을 질서정연하게 배치한 흔적과 강학기능을 하는 강당을 앞에두고 제향기능의 사당을 높은 뒤편 언덕 위 올려놓은 전학후묘(前學後廟) 구조를 하고 있다.
▲ 묘정비각
풍영루로 들어서면 제일먼저 묘정비각을 만나게 된다. 묘정비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남계서원에 일두 정여창)(1450∼1504), 동계 정온(1569~1641), 개암 강익(1523~1567) 선생 세 분을 모시고 향사를 올리고 있음에도 이를 찬양하는 송덕비가 없어 안타까워하다가 남계서원 건립 200여 년이 지난 1779년에 묘정비를 세우면서 글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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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정비각은 오래전부터 채색되어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처음부터 채색을 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비문은 조선 후기 정조 때 문관 김종후가 짓고 황운조가 글씨를, 홍낙명이 전액하였다 하며, 지붕돌에 정교하고 다양한 문양과 함께 아름다운 색으로 채색하여 멋을 잔뜩 부리고 있다.
▲ 서재 |
▲ 동재 |
묘정비 뒤로 동재와 서재를 만나게 된다. 풍영루에서 오른편이 동재(양정재)이며, 왼편이 서재(보인재)로 대부분 동제에는 선배가 머물고 서재는 후배가 머문다고 하며, 동재와 서재 앞에는 각각 개별적인 닮은꼴 연지를 두고 동재 누마루를 애련헌(愛蓮軒), 서재 누마루를 영매헌(詠梅軒)이라 불렀다 하니 정여창 선생이 평소 좋아했던 연꽃과 매화를 심어 마음의 안정을 꾀하였나 보다.
동재와 서재가 독특한 방식으로 위치하고 있다.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가 같다. ‘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강당의 서쪽에 있어 “서재”라고 한다. 서재는 “보인재”라고도 하는데, 이는 “논어”에 나오는 군자는 글로서 벗을 사귀고 벗으로서 인을 돕는다 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서재는 동재와 같은 2칸의 건물로 1칸은 온돌방이며 나머지 1칸은 영매헌이라고 이름 붙인 누마루로 되어 있다. 영매헌과 애련헌은 연못을 파고 못 옆에 둑을 쌓아서 연을 구경하고 매화를 읊조릴만하다 라는 뜻이다.’
동재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강당의 동쪽에 있어 “동재”라고 한다. 동재는 “양정재”라고도 하는데, 이는 역경에 나오는 교육을 함으로써 사람을 바르게 기르는 것은 성인의 공덕이다 하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동재는 서재와 같은 2칸의 건물로 1칸은 온돌방이며 나머지 1칸은 애련헌이라고 이름 붙인 누마루로 되어 있다. 정여창 선생은 송나라 때의 성리학자 주돈이의 애련설에 영향을 받아 매화와 연꽃을 사랑하여 누 이름을 애련헌과 영매헌이라고 지었다.’
▲ 강당 건물인 명성당
서원 중심에 있는 강당으로 들어서기 위해서 또 계단을 오른다. 강당을 명성당(明誠堂)으로 부른다. 다른곳과 달리 서원의 현판이 두글자씩 각각 떨어져 걸려 있으며, 좌 우 각각 하나의 방을 두고 거경(居敬), 집의(集義)로 불렀다. 명성당 현판은 안쪽에 낮게 위치하고, 내걸린 남계서원은 서원 앞 남계천에서 이름을 가져와 남계서원이다. 이곳 남계서원은 풍영루에도 화려한 단청칠이 아름답지만 강당에서도 단청에 한껏 멋을 부렸다. 서원에서 찾아보기 힘든 색감이다.
▲ 명성당 현판
▲ 남계서원 현판
▲ 강당 건물 뒷편에서 제향공간 삼문으로 오르는 계단길에는 배수를 고려하여
돌계단을 쌓은 흔적이 역력하다.
강당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강당은 경과논을 연구하고 학습하는 곳으로 명성당이라고 하며, 중용의 참된 것을 밝히는 것을 가르침이라 하니, 참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참되게 된다 라는 뜻이다. 강학영역을 구성하는 중심 건물로 1559년에 완성되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 2칸은 대청마루이고, 양쪽 각 1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오른쪽 방은 거경이라 하며 경에 거해서 이를 깊이 연구한다는 뜻이고 왼쪽 방은 집의 라고 하며,호연지기는 도와 짝이 되는 의를 축적해야 생기는 것이다 라는 뜻이다.’
▲ 삼문으로 오르는 계단 길 |
▲ 삼문 앞 배롱나무
계단을 오른다. 서원에서 가장 긴 계단 끝자락에 태극문양을 한 삼문이 서 있다. 삼문에도 멋을 한껏 부렸지만 돌계단 그 어디에도 별다른 디자인이 없다. 제향공간에는 사당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전사청을 두고 정면에 내삼문을 열어 왕래를 하도록 하였다. 내삼문 앞으로 배롱나무를 심었다. |
▲ 사당
사당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한 칸 반으로 이루어진 아담한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주벽은 조선 5현의 한 분인 일두 정여창 선생을 모셨고, 서쪽은 1675년에 동계 정온 선생을, 동쪽은 1689년에 남계서원 건립을 주도한 개암 강익 선생을 모셨다. 강익선생은 정온선생의 외삼촌이다.’
▲ 사당 화촉대 |
▲ 사당 담장 |
사당 오른편에 전사청이 자리잡고 있다. 전사청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향사에 필요한 제기를 보관하고 제향을 준비하는 공간이다. 전사청은 제향영역 내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고, 제향영역 밖 독립된 영역에 위치하는 경우도 있다. 진사청이 건립되지 않은 사당은 고직사에서 제향을 준비하거나 외부에서 준비하기도 한다.’
▲ 경판고
강당 건물 옆으로 경판고가 자리하고 있다. 경판고라 함은 합천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처럼 서원에서 중요한 서적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경판고 또는 장판각이라 한다. 경판고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경판고는 “장판각”이라고도 하며, 서원에서 보유하는 책이나 판각 등을 보관하는 곳이다. 유생들을 교육한 이정오경 등의 서적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건물을 지면에 붙이지 않고 4면을 모두 터놓아 공기의 유통이 자유롭게 하여 판각을 보관하기 쉽도록 하였다. 외부 벽체는 나무로 구성한 판벽으로 되어 있고 내부 역시 가운데 판박이 있다.’
▲ 강당에서 내려다 본 전경, 좌우 연지가 보인다.
내려선다. 함양에 이처럼 멋진 서원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한때 구불구불 산길을 넘나들던 함양으로 잇는 도로는 최근 함양-진주간 고속도로와 88고속도로 등 빠른길이 생겨 나면서 국도 여행은 꼭 필요에 의한 여행길이 아니면 찾을 수 없었다. 예전에는 이러한 서원들은 문을 굳게 잠근 채 주변에는 잡초가 무성하여 발 딛기 조차 어려웠지만 오늘날 서원은 또다른 배움의 공간으로 변신을 하면서 주변 정비와 함께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또!
바로 옆에 다른 서원하나가 있는데 바로 청계서원으로 담장을 하나 사이에 두고 있는 셈이다.
청계서원은 남계서원을 축소해 놓은 것처럼 꼭 닮아있다. 꼭 다른 것이 있다면 강당 건물 앞에
노송 한그루가 고상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는 것이다.
청계서원
청계서원은 경남문화재 자료 제56호이다. 청계서원은 조선 연산군 때 김종직의 제자이자 학자 문민공 김일손(1464~1498)을 모신 서원으로 청도에서 정여창 선생을 존경하여 함양으로 내려와 청계정사를 짓고 배움의 길로 들어섰지만 무오사화를 통해 김일손 사후 폐허가 되어가던 청계정사를 함양 선비들이 그곳에 유허비를 세우고 청계서원이라 불렀다.
▲ 청계서원으로 들어서려면 취도문을 거쳐야 한다.
▲ 청계서원 전경
▲ 탁영 김일손 유허비
▲ 청계서원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한 기와집 형태이다.
▲ 동재 구경재
▲ 서재 역가재
▲ 청계서원 애학당. 바로 옆 서원과 현판 배치방식까지 똑 같다.
▲ 청계서원 제향공간인 청계사
서원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서원은 1907년에 청계정사가 있던터에 세워진 것으로, 탁영 김일손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로 향사를 지내고 있다. 김일손은 성종 때 사림파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청요직을 두루 지냈으나 연산군 때 무오사화에 희생되었다. 그가 이곳 청계정사에서 한 동안 공부를 한 적이 있어 유림에서 그 터에 서원을 세운 것이다. 서원의 건물은 중앙에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기와집 형태의 강당이 있으며, 그 뒤쪽 높은 지대 위에 묘우인 청계사가 있고. 강당 앞으로 학생들이 거쳐하던 동재인 구경재와 서재인 역가재가 있다. 경내에는 탁영김선생유허비와 네모난 연못이 있다.’
선비의 고장 함양에는 이 외에 많은 서원이 있지만 대부분의 서원은 발 딛기조차 어려운 환경이며, 문이 잠겨 있어 접근이 어렵다. 청계서원과 남계서원처럼 한 언덕자락에 그것도 나란히 자리잡고 비록 담장은 서너발자국 떨어진 곳에 각자 하지만 너무도 닮은꼴을 하고 있다. 곧 남계서원이 정비를 끝마치고 디지털화 되면 이곳 청계서원과 연계하는 새로운 선비의 문화공간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다시 한번 가져 볼 생각을 하며 들어선 문을 나선다.
즐거운 여행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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